회화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큐레이터들 혹은 비평가들의 입을 통해 쉽게 듣는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년 사이에 꽤나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에 전시서문을 부탁하려 했던 사람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나 머리가 복잡해진다.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를 읽기 어렵다는 것인가, 회화를 통해서 글을 쓰기 어렵다는 말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를 읽기 싫다는 이야기인가. 혹은 회화를 현대적으로 읽기 어렵다는 이야기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라는 매체가 이미 예술적인 의미에서 현대적 추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를 통해 그럴 듯하고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는 것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술적 지평과 다르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나의 회화가 어렵다는 것인가. 모든 상상은 어느 정도 맞을 것이다.
회화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회화를 이미지로 바라보라고. 사진과 영상과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회화 역시 볼 수 있다.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거대한 회화의 역사가 작업을 하고 보는데 짐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관객과 관찰자의 입장이라면 좀 더 편하게 바라볼 수 있다. 본인이 볼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회화를 제외한 다른 매체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렵다는 말 대신 보통 재미가 없다, 있다, 좋다, 싫다의 표현을 쓴다. 작업을 바라보는 본인의 주관성을 믿지 못한다면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예술 작업도 볼 수 없다.
회화처럼 수많은 검증의 반복을 거친 매체도 없을 뿐더러, 단호하게 스스로 종말을 고한 매체도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치열한 평면매체에 대한 실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유럽에서는 이미지 실험이 진행되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Lichter),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와 뤽 타이먼(Luc Tuymans)에 이르는 계보는 사진과 회화 그리고 내러티브와 역사, 구상과 추상 사이의 고민을 이미지의 영역에서 구현한다. 사진과 이미지를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커다란 흐름, 회화를 평면적 물성의 문제로 치환시킨 70년대 미국 추상회화와는 다른 방향의 흐름이다. 이미 회화의 역사 안에서 회화는 이미지로 전환되어 있거나 그 간극에 존재한다. 다른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해석 도구로서 회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 곳에서 회화의 현대성은 발현된다. 다른 매체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로서 말이다. 나는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가 ‘회화는 전위가 아니라 후위이다’라고 이야기한 그녀의 자신감을 믿는다. 전위가 아니라 후위이기 때문에 좀 더 사색적이고 그만큼 복잡하고 동시에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가끔 불쑥불쑥 영상을 해보는 것은 어떠냐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평면에서 영상의 속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보다는 차라리 영상을 하는 것이 쉽지 않느냐, 낫지 않겠냐는 의미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평면이 영상적 속성을 함유하며 영상을 오마주하면서 재구성되는 이미지는 영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상에 대한 이미지이다. 즉 영상을 통해서 발현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결국, 우리가 읽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보다, 형식에서 주어지는 쉬운 이득을 취하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형식이 내용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퍼포먼스나 영상이 과연 현재 그러한 형식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물어봐야하지 않을까 싶다(개인적으로는 3D 프린터가 로봇과 결합하여 작은 다리를 만들어내는 영상이 그 어떤 액티브한 예술 영상보다 나를 더 심각한 고민으로 빠뜨렸다). 비물질 미술에 대한 환영은 언제쯤 재해석될지 궁금하다.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에너지와 물질은 결과물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 매체 자체를 비물질이라고 봐야하는가? 이런 단순한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된 미술적 논의를 들은 적이 없다. 영화가 성취한 영상미학에 대한 논의와 결과물은 많지만, 미술적 영상의 성취에 대해 재평가된 것은 참으로 찾기가 힘들다. 단순히 미술의 역사에서 다음단계의 역사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영상과 퍼포먼스의 가능성에 대해 차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때가 있다.
회화는 이미지의 역사를 다룬다. 회화가 현실에 개입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구체적인 현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회화는 개념을 다루는 추상적인 매체이며, 가장 아날로그한 매체이다. 가장 아날로그하다는 것은 반대로 가장 쉬운 매체라는 의미도 된다. 또한 가장 가능성이 많은 매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의 범주가 아닐 수도 있지만, 처음으로 사람들이 미술적 경험을 하는 행위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손쉽게 접하는 매체가 왜 읽기가 어려운 매체로 인식되는 것일까. 그것도 그냥 지나치는 일반 관객이 아니라, 미술관계자들에게 말이다. 우리가 취향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에 대해서 어렵다니. 솔직히 그 말을 정확히 해석한다면, 진부한 매체이므로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혹은 회화나 이미지에 대해 미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소외당한 타자가 다른 타자를 소외시키는 이 기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범주에서 미술 역시 아날로그하고 진부하다. 환영의 위험함, 스펙타클의 위험함은 현재 미술이나 예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다. 현재, 회화를 포함한 미술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 매체들 사이에서 바라보자면 환영과 스펙타클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매체는 실상 설치와 영상이다. 하지만 매체와 상관없이 우리가 예술가로서 견지해야하는 부분은 얼마나 현실을 디테일하게 관찰할 것인가이다. 선동적으로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이 미술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전용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쉬운 분류와 배제의 방식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장점, 경계를 흩뜨릴 수 있는 흔들림을 위협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은 귀찮고 어려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잉여를 통해 사회적 시스템이 보지 않는 가치에 대해 되도록 많은 레퍼런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설명적이지 않으면서 폐부를 깊이 타고 들어오는 감동을 주거나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작업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의 작업 사진을 볼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이 있다. 명쾌하지만 명쾌하지 않은, 보편적이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그것을 온전히 가로지르는 작가의 의지와 행위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