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프린지페스티벌과 도청 산책하기-
K가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으로 짐작되는 데를 쳐다보았다.
-프란츠 카프카, 『성』-
카프카 자신을 꼭 닮은 K는 소설이 마지막 장에 이르도록 끝내 ‘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아니 가까이 다가가려고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만 옆길로 새거나 주의력을 잃어버리는 이상한 관능에 사로잡혀 성의 주위만을 맴돌 뿐이었다. 저 멀리 어느 지점에 성이 존재한다는 것만 인지하게 할 뿐 좀처럼 K에게 성문을 허락하지 않던 이 소설이, 구도청 주변을 배회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시아문화전당이 건립 중이던 수년 동안 공사장 주변의 가벽들은 광활한 부지를 가진 초유의 시설을 기대하게 하였으나, 그 중심부를 시민들이 과연 활보할 수 있을지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 이후 새롭게 단장된 5.18의 성지(?)가 다시 나의 관심을 끌었지만, 이상하게도 구도청을 산책하겠다던 계획은 좀처럼 실현이 되지 않았다. 한 때는 (현재는 철거된) 구도청 건물 안에서 일을 하며 문화기획자의 꿈을 처음 꾸었던 적도 있었건만 다시 그곳에 가닿는 일은 사소한 핑계나 이상한 어색함에 늘 방해받았다.
도청 분수대 광장 일부는 차 없는 도보로 단장되어 시민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80년 5월엔 깊은 공포와 광기어린 열정으로 사수해야만 했던 광장이, 2016년 광주프린지페스티벌이 열리던 오후엔 힘을 쫙 뺀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환영했다. 한 명이라도 아쉬운 듯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라도 할 기세였다. 분수대 앞 교차로와 금남로 일대에서는 익숙하고 식상한 체험과 거리 퍼포먼스, 버스킹, 마술쇼, 길놀이 등이 이어졌고 다음날 신문기사는 60여 개의 문화•예술단체가 페스티벌에 참여하였다고 보도했다.
광주시가 주최한 ‘프린지 페스티벌’은 마치 지난 6개월 간 아시아문화전당의 동태를 조용히 살펴보던 지역 예술이 ‘광주다움’을 잔뜩 묻힌 탈을 쓰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메인무대의 제목부터 <무등애가>라는 가무악극이었으니. 전통연희와 음악, 연극 단체가 공동으로 협연하고 푸른연극마을의 오성완 대표가 총연출을 한 창작 공연이다. 2015년 광주아리랑축전에서 선보이던 ‘아리랑우수작품’ 공연의 내용과 장면들이 일부 중복된 것에서 창작기간이 짧았음을 짐작했지만, 사자탈춤과 판소리와 연극이 잘 어우러져 완성된 하나의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 안도했다.
흰 바탕에 검은 줄무늬를 가진 무등산 호랑이는 동양의 신화에 나오는 백호만큼이나 위엄을 자랑했다. 하지만 금세 과장되고 장난스러운 동작으로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너는 혹시 낙타가 아니냐?”하면 호랑이는 등에 두 개의 볼록한 혹을 만들고, “그렇다면 너는 혹시 강아지더냐?”하면 가장 귀엽고 덩치 큰 애완견이 되어 익살스럽게 뒹군다. 모든 물음에 긍정하며 변신을 해대는 무등산 호랑이의 재간은 거절하기 어려운 호객행위처럼 객석을 가득 메우는 힘이 있었다.
관객들을 한 자리에 모은 후 무대는 사뭇 진지해진다. 평화롭던 농경마을에 선남선녀들은 사랑을 나누고 행복해하지지만 ‘흑룡’이라는 존재의 출현으로 죽고 병들며 서로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흑룡은 전쟁처럼 잔혹하게, 독재자처럼 교활하게, 혹은 천재지변과 같이 저항할 수 없게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간다. 도청 분수대 앞에 가득 퍼지는 소리꾼들의 절절한 노래를 들으니 필경 ‘장소특정적’이라는 예술의 새로운 장르가 이곳 항쟁의 성지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재연되었으리라.
무등산 호랑이는 마을을 위해 싸우지만 기대와는 달리 흑룡에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만다. 마을사람들의 선택은 ‘제의(祭儀)’다. 무등산 호랑이를 위한 마을의 제의식은 단순히 기복적인 주술을 넘어 애도와 기념비화의 과정에 서 있다. 조상에 대한 제의식도 본래는 자신들의 복록을 비는 ‘산 자를 위한 신성화 전략’이었지만, 쓰러진 호랑이로 인해 마을 안에는 ‘순수한 애도’의 감정이 물결친다.
가면극이
원래 가면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토테미즘에서 출발하였음에도 ‘굿’에서 ‘극’의 형태로 발전한 것은 민중의식의 성장을 증명한다. 이제 이들은 호랑이의 위업을 추모하고, 기억하며, 배워서 스스로 싸우게 될 것이다.
쓰러진 호랑이를 치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무등산 신령들과 생명의 원천인 무등산 샘물이다. 자기 생명의 원천을 자신들 고장의 자연에서 얻고 있었다 하니 대단히 지역성이 강한 광주시민들임은 분명한 것 같다.
돋움무용단의 아름다운 춤사위가 무등산 신령들의 치유의 몸짓으로 표현되고, 이윽고 무등산 호랑이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탈춤과 전통무용, 판소리와 국악기악 그리고 현대적 극이 하나의 무대에서 어우러진 복합적 무대는 제의적 위기극복이라는 단순한 구성이었지만 예상 밖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카프카가 끝내 당도하지 못했던 ‘성(城)’으로 가기 위해 발을 떼었다. 사회자가 올라와 “오메!”를 연발하는 무대와 그 뒤편은 풍경이 사뭇 달랐다. 아시아의 컨템포러리를 표방하는 건축물 ‘아시아문화전당’이 새초롬한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광주를 처음 방문한 이방인처럼, 광주의 가장 역사적인 건물 아래에서 새침하게….
예전엔 자동차만이 지나갔던 분수대 주변엔 걷기 편한 도보가 펼쳐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자유롭게 광장을 활보하지는 못했다. 아트상품 셀러의 천막들과 예쁜 수공예품의 관능에 이끌리며 구도청 건물의 입구와는 다시 멀어졌다. 천막들 사이에서 인디밴드들의 무대가 한창이었고 풍선을 손에 든 아이들과 부딪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나는 성의 주변만 맴돌다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냥 좀 가만히 두어도 좋지 않나….’
오랜만에 시민들에게 허락된 광장이건만 문득 피곤이 몰려온다. 빈 공간을 빈 채로 그냥 두지 못하는 관(官)의 대단히 ‘문화적인’ 행보가 아쉽다. 전당 개관 이후 광주시는 전당 주변 활성화를 위해 많은 문화행사를 지원하고 계획하고 있다. 광주프린지페스티벌도 매월 둘째주 넷째주마다 5.18 민주광장 일원에서 펼쳐진다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놀이판은 관 주도의 그래피티 그림처럼 감동이 없다.
광장을 누구에게나 열어놓되 억지로 채우려하지 말자. 그곳이 못내 그리워 사람들이 광장을 배회하러 올 때까지 비워두면 좀 어떤가. 그러면 언젠가는 저 새초롬한 성과 같은 아시아문화전당이 사람들 가까이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광장은 꿈틀대건만 성지는 더욱 은밀하게 은밀하게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렇게 그는 다시 나아갔는데 먼 길이었다. 이를테면 거리,마을의 길은 성 언덕으로 통하는 게 아니라,
성에 가까이 가기만 했다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휘어지며 설령 성에서 멀어지진 않는다 해도 성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프란츠 카프카,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