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안티고네』
∥극단 푸른연극마을, 오성완 연출․각색
∥2016. 6. 16. ~ 6. 26. 씨어터 연바람
인간의 원죄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운명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아 동침을 한 그 침상에서 원죄가 시작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리하여 신들이 인간에게 내린 진짜 저주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어도 더 이상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라면, 그래서 끔찍한 딜레마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 이것이 진짜 형벌이라면, 우리는 신들에게 시지프보다 더 큰 미움을 산 것임에 틀림없다.
씨어터 연바람에서 열린 푸른연극마을의 무대(연출/각색 오성완)는 소포클래스의 희랍 비극 『안티고네』가 아니라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를 선택했다. 장 아누이의 크레온은 소포클래스가 그린 군주 크레온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다. 알고 보면 매우 냉철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으며 진실 앞에서 갈등할 줄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또는 국가)를 위해 폭정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악역이다.
한편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는 소포클래스의 안티고네보다 훨씬 자유롭고 또 불완전하다. 죽음 앞에서 ‘혼자’라는 사실에 불현 듯 슬퍼지는 스무살의 어린 소녀. 그녀가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죽음을 무릎 쓰면서까지 친오빠의 시신을 묻어주려 하는 이유는 ‘신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신념이라는 말이 좀 무거운가. 그렇다면 ‘자기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녀는 그저 인간으로서 ‘선택’했다. 가족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권리를 선택했다.
선택.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롭고 난해한 과제.
장 아누이가 그린 안티고네의 성격은 ‘작고 깡마르고 머리가 헝클어진’이라는 수식어에 모두 담겨있다. 세상물정을 아직 몰라 막무가내에 고집스러운 작고 마른 소녀. 왕족의 딸이지만 머리가 헝클어진 채 맨발로 흙과 이슬을 밟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왕은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에 반역자라는 가면을 씌우기 위해 어떤 장례의식도 치르지 말 것을 엄포하지만, 그녀는 ‘나의 선택’이라는 단어 하나로 왕명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과연 왕의 천적이다. 그녀는 자기의 선택을 신념보다는 ‘자유’라 칭한다. 그래서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는 폭군에 저항하는 혁명가이기 보다는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은 ‘이기적이어서 자유로운’ 존재로 표현된다.
그녀는 타협을 통해서는 인간이 완전한 존재(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이 죽음을 통해 완전한 자유를 찾는 일은 왕의 정책 따위와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왕은 왕의 일을 하면 되고 나는 그저 사람으로서 나의 의무를 다할 뿐, 이것이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선택이 바뀔 이유는 없다.
“난 전부를 원해요. 완전한 전체라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거에요. 만일 삶이 두려워하고 거짓말하고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만일 삶이 자유로울 수 없고 후회하지 않고 깨끗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해요.”(안티고네의 대사 중)
그녀의 죽음은 소포클래스의 안티고네 죽음처럼 비장하거나 신성하지는 않다. 비장하기보다는 고되고 안쓰럽다. 신성함보다는 인간적이고 또 그래서 한없이 외롭다.
안티고네는 폭군 크레온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크레온은 작고 깡마른 조카 안티고네의 주장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안티고네와 같이 순수한 자아는 왕에게 갈등만을 안겨줄 뿐이며 사라져야 마땅할 힘없는 자아에 불과하다. 통치자는 수많은 안티고네를 죽이고, 자기 안에서 여러 개의 자아를 없앤다, 딱 하나의 자아만을 남겨둘 때까지 잔인한 본보기는 계속된다.
하지만 관객을 정말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안티고네의 외로운 외침보다도 더 불편한 점은, 성스러운 여인 안티고네로 하여금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폴리네이케스가 사실 영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크레온의 말에 따르면 폴리네이케스는 ‘바보같은 놈팽이에 우둔하고 무감각한 식충이요, 그저 남보다 더 빨리 자동차를 굴리고 좀 더 많은 돈을 술집에서 탕진하는 것만이 능사인 불량배’였던 것이다. 그런 못난 자식을 위해 오이디푸스 왕은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아들을 구해내려 했건만, 결국 폴리네이케스는 아버지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기 위해 돈으로 하수인들을 매수하는 부도덕한 역적이 됐다는 것이다.
크레온은 ‘순진한 소녀’ 안티고네에게 말한다. “정치의 추악한 이면”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안티고네의 처절한 죽음이 아무 의미 없는 흙 한줌으로 전락하는 순간, 관객은 선악과를 먹어도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안티고네들은 그래서 더 외로울 것이다....
소녀는 이날밤, 젊은 남자와 웃으며 지껄이는 자기 언니 이스메네와 오늘밤 죽지 않아도 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혹은 우리들로부터) 눈부신 속도로 멀어져갑니다.(장 아누이 『안티고네』, 코러스 중)
추악한 이면이 항상 폭군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갈등해야 한다. 선과 악이 분명하다면, 적어도 소포클레스의 원작 『안티고네』에서 보여주는 만큼이라도 ‘지조있는 선택’이라는 게 분명하게 보인다면 이 작은 소녀의 죽음을 그리 헛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선이 무엇이고 악은 또 무엇인지, 하나의 진리라는 게 과연 존재는 하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드는 현대의 통치기제야말로 신이 내린 형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오”를 말하는 안티고네에게 크레온은 말한다.
“아니오”라고 하기는 쉽다. 그러나 “예”라고 하려면 땀을 흘리고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야 한다. “아니”라고 하기는 쉽다. 비록 그 말이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아니”라고 하기는 쉽다.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살아가면서 죽어지기만 기다리면 된다. 이것은 비겁한 자의 역할이야! (크레온의 대사 중)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화가 여기까지 다다르면 그리스 비극은 부조리극이 된다.
나는 ‘아니오’를 얼마나 쉽게 말했는가. ‘예’를 하는 이들은 사실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죽도록 규율을 쫓아가고 있건만, 나는 얼마나 쉽게 자유를 말했는가. ‘아니오’는 죽음보다 더 영리해야 했고,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니오’를 외치기는 했는가....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크레온의 논리에 빠지고 만다면 작은 소녀의 죽음은 정말 헛되고 말지니 각별히 정신차릴 일이다. “아니오”라는 대답하는 자는 비겁하지 않다. 신들의 이야기는 비극이 존재하지 않듯이,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기에 비극이 아름답듯이, 죽음은 그렇게 쉽지 않고 비겁하지도 한다.
크레온은 안티고네에게 “나무가 땅에서 올라오는 수액을 거부하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느냐? 야수가 식욕과 성욕 앞에서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지만, 인간이기에 수액을 거부하고 식욕과 성욕 앞에서 아니오를 외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무겁디 무거운 무대에서 연출자는 말한다. 오늘날의 수많은 안티고네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아버지를 대체할 강력한 보호자가 아니라 당신의 선택이 옳다고 믿어줄 동지들의 따뜻한 손길이라고, 죽음보다 더 혹독한 것은 대중의 침묵이라고….(푸른연극마을 소식지 연출자의 말 中) 죽음을 감행하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 나 자신의 원석에 가까워지려 노력했다면 당신은 안티고네이다.
잠시 눈을 감는다. 나는 오늘 하루 단 한 순간이라도 안티고네였는가. 나는 오늘 세상의 안티고네들과 얼마나 또 멀어져가고 있는가.
(2016. 6. 26. 위정선)
<사진출처 : 씨어터연바람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greenthe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