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상실
근대기는 아마도 끊임없는 ‘정리’, ‘재정리’, ‘상품화’에서 발생하는 소외, 타자화, 여과와 상실의 시대라고 불러볼만합니다. 현대성은 무기력한 착잡함과 우울, 그리고 분열과 편집증적 집중과 해체적인 공존이 특징적입니다. 국지 테러전에 전지구적 대응을 하고 있으며, 급격한 보수화를 겪고 있는 아시아를 보면서 ‘반복’의 지리멸렬함을 느끼는 것을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작고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뉴욕 911 테러 직후에 <불량배들>이란 글을 썼습니다. 그는 여기서 어떤 사건의 도래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국가와 그 체제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저는 역사적 사건들, 특히 크고 작은, 일상적이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트라우마적 사건들의 반복에 주목하였습니다. 제 해석으로는 ‘도래함’이란 것은 예견된 반복입니다. 반복의 시작지점은 매우 강렬하고 심지어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소입니다. 이 장소에서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식민과 전쟁은 국지전과 테러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특정 장소를 점유하는 자가 통치자가 되었고 그들의 정치에 의해서 자본과 노동이 불평등 분배되었습니다. 지금은 역사 자체도 불평등 분배로부터 예외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역사’를 소유할 수 있는, 거래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역사 혹은 인간의 노력, 삶은 여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유가능하고 거래가능한 상품’이었는데 이제서야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있는것은 아닐지요. 이 괴상한 깨달음 또한 처음은 아닐 것입니다.
광주 뽕뽕브릿지에서의 서른 백번째 만남
전남 광주에서 새롭게 개관한 대안공간인 뽕뽕브릿지는 개관 첫 해부터 분주합니다. 국내외 작가들의 레지던시와 공유전시를 진행되고 있고, 해외 프로젝트까지 추진하는 등 정말 의욕넘쳐보이는 곳입니다. 관장인 신호윤의 말처럼 얼떨결에 마구 일이 이어지고 있는가 봅니다. 그야말로 ‘신생’ 공간의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얼떨결에 작가들과 장소들과 이야기가 마구 이어나가면 실로 재미있긴 할 것 같습니다. 위치 또한 재밌습니다. 개발이 안되어 차라리 보존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광주 발산마을의 초등학교 뒷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전시에는 항상 초등학생들과 지역 노인들이 주된 관객층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재밌는 볼꺼리’ 차원에서 전시장에 놀러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올 해 초에 레지던시를 하고 전시를 하였습니다. 그 분은 제가 싱가포르에서 자료 조사를 하면서 알게된 중년의 싱가포르 아저씨입니다. 전시는 세달간의 레지던시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6월 14일부터 7월 4일까지 ‘자료수집가를 수집하다(Archiving the Archvist)’ 라는 타이틀로 이뤄졌습니다. 전시에는 함께 참여한 림쉔겐(Lim Sheng Gen)이 있었고, 제게는 아직도 낯선 용어인 ‘증강현실’이라는 장치로 볼거리_체험거리를 추가하였습니다. 전시는 과거 싱가포르의 작고, 중년 작가들의 어떤 작품_혹은 작업에 대한 Koh Nguang How(이하 ‘코으앙화’)의 참조와 재연, 그리고 광주 레지던시 기간동안의 수집과 조사에 바탕한 오브제 설치 전시였습니다.
광주시 발산마을, 여기서 ‘싱가포르 아저씨’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어떤 지점에서 이 전시에 ‘관람’을 이뤘을까요? 이웃 뿐 아니라 타자 자체에 대해서 아주 피상적인 이해 혹은 오해에 기반한 ‘공유’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실험일까요?
이 전시에서, 코으앙화는 예전처럼, Tang Da Wu(이하 탕다우), Chng Seok Tin(이하 챙석틴), Shui Tit Sing(이하 수이티싱) 을 참조하여 광주라는 지역에 대한 본인의 인상과 체험을 섞어 놓습니다. 물론 그의 인상은 잘 알려지게 된 요소들(항쟁과 저항정신, 그것의 문화적 계승과 현실에서의 몇몇 아이러니들)에 주로 바탕하기도 합니다만, 무엇보다 발산마을이라는 이 동네, 아이들, 그리고 할머니, 아줌마 관객들에 대한 인상이 큰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코으앙화는 자신의 어릴적 추억이 담긴 작업(그는 기억을 더듬어서 외할아버지가 밧줄을 만들던 기계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실제로, 양쪽에서 돌리면 가는 실들이 꼬여서 튼튼한 밧줄이 되는 구조입니다). 코으앙화의 외할아버지는 밧줄을 만드는 일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도자기도 만들었고, 뭐든 수공으로 만들어서 파는 가내수공업을 하셨던 분이지요. 싱가포르에서 지금의 공공주택인 HDB를 정책적으로 짓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주택문화(캄풍문화)에서 소요되었던 오브제들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외조부의 생업도 사라지게 된 직업중의 하나이지요. 그게 코으앙화의 십대때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런 거대 변화가 일어난 것이80년대 중반입니다. 즉 싱가포르도 한국 못지 않게 매우 빠른 성장 위주의 근대화를 추진한 아시아의 국가인데요, 그 근대화와 개발의 속도라는 것은 한국에 비해서 엄청 빠릅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인들의 삶에서 남겨진 것, 혹은 역사, 기억할 만한 것들이 미쳐 문화, 예술이 되기도 전에 그냥 없어져버린 것들도 많지요. 코으앙화는 이런 것들, 즉 근현대화의 빠른 속도에서 버려지는 것들을 줏어 모으고, 사진으로 남기고, 그리고 심지어 나아가 중요하다고 주장해온 아저씨입니다. 그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방식은, 마치 시스템의 외부에서 시스템에 대해서 호소하고, 욕하고, 화내고, 불평하고, 그러다가도 또 제안하고, 자꾸 소문을 만들고 하는 아주, 개인적이고 안타까우면서도 매우 절박한 방식이지요. 마치 벌거벗은 생명의 주권 획득을 위한 처절함처럼 말이죠.
그 밖의 오브제 설치와 노트 배치, 드로잉들은 탕다우, 챙석틴, 수이티싱의 작업을 참조하여 한 것입니다. 그가 제작년 광주 아시아문화의 전당에서 싱가포르 국립미술관의 소개로 실시한 레지던시와 아카이브 전시에서 계속 소개된 이들 작가들은 싱가포르의 역사적인 인물들입니다. 수이티싱은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여러 예술, 문화적 관심 하에 프로젝트도 하고, 자료 수집도 하였던 근대 초기의 작가입니다. 탕다우와 챙석틴은 싱가포르 현대미술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중년의 미술 작가들입니다. 탕다우는 다소 교육적인 차원에서 국가와 시민의 역할에 대한 계몽적인 어법과 반어법 등으로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많이 하였고, 그의 작업의 특유의 유머와 대중성으로 인하여 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중견 작가입니다. 챙석틴은 다양한 매체 실험을 한 여성 작가인데요, 유학 후 싱가포르를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중 사고를 당하여 시력을 잃게 되었고, 지금은 오브제 설치와 드로잉, 판화 등을 하면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로 휴머니즘에 바탕한 아이러니의 철학을 갖고 작업을 해온 근현대기의 작가들입니다. 사회, 역사, 국가에 대해서 이들 싱가포르의 작가들은 한편으로는 ‘시민’의 편에서, 한편으로는 ‘역사’의 건립 편에서 이러저러한 모순들을 드러내었고, 교훈과 깨우침, 일침을 놓기도 하였습니다. 지극히 모더니즘시기의 계몽주의적인 방식이기도 하지만 이것에서 영향을 받은 코으앙화는 계몽주의적이라기보다는 다소 개인적인 차원에서 재연됩니다. 코으앙화의 ‘참조’는 과거의 인물들이 시도했던 것을 실현해야한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직접 체험하면서 느꼈던 감동의 차원, 제도나 후대에까지 공유되지 않는 아쉬움의 차원, 제도 밖으로, 혹은 역사의 외부로 밀쳐지는 어떤 삶으로부터의 저항과 안타까움의 차원이 얽혀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수집물을 갖고 이어나가는 프로젝트들은 다소 정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할때 더욱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 안타까움은 작가들의 미약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제도와 국가는 다소 폭력저인 방식으로 여전히 ‘삶’을 걸러내고 있고, 거기에서 걸러진, 없어지는, 놓치는 것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고, 충분히 느낄 수 없었으며, 사후적으로 느껴지는 것, 다른 장소에서 공유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일 것입니다. ‘관람’이란 것은 현재적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정서적 효과는 사후적이거나 사장되는 것이거나 미리 메뉴월화 되는 것이거나, 미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역사라는 시뮬라크르, 그것의 스펙타클한 재생산
저는 지금 싱가포르의 한 개인의 아카이브를 소재로 하여, 역사의 응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싱가포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싱가포르란 급속도로 발달한 도시국가의 문화, 사회에 대한 관심은 미술사와 현대미술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깊어졌습니다. 아이가 아직 어렸기때문에, 슬렁슬렁 조사를 시작한 것은 제작년 그러니까 2014년 하반기부터입니다. 착수시점은 ‘미술사’를 매개로한 ‘역사’ 들여다보기였습니다. Singapore Art Museum을 시작으로, 그곳에 소장된 팜플랫들을 들춰보면서 교류사, ‘현대미술’에 대한 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반응, 싱가포르 내에서 현대미술 육성시점과 그 변화과정등을 보았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컨템퍼러리’는 일종의 ‘문화상품’, ‘관광상품’ 만들기처럼 ‘추진’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와중에도 일 개인, 일 개별 작가들은 ‘무엇인가’를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리 정부주도, 자본주도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그 속에서의 일그러진 ‘주체’상은 다소 징후적으로(증상적으로) 보자면 꽤 흥미로운 것이 ‘아시아’ 이니까요.
싱가포르에 대해서 검색해보면 주로 떠오르는 기사들이나 이미지가 있습니다. 금융산업, 마리나베이와 센토사, 머라이언 상, 동남아 허브, 이관유, 영어공용화, 에어컨과 껌, 검열과 곤장때리기 등등과 관련한 것입니다. 마치 재미있는 가십거리처럼 한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참으로 착잡한 짓입니다. 한 국가와 그 나라의 사람들의 삶이 겪어온, 일궈온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단순하게 보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죠. 마치 나의 삶 자체가 관광상품이나 한두시간 프리젠테이션꺼리로 요약정리되는 느낌입니다. 물론 어떤 서술은 굉장히 세련되어서 정말로 블록버스터급의 영웅극이 될 수 있고, 어떤 서술은 비교적 산만하여 정리가 안된 채 그 어떤 클라이막스도, 영웅도 없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서술이라할지라도 복제재생산과 문화상품화의 맥락에서는 비슷하게 지극히 진부하고 평범해진다는 것입니다. 전 이 진부함과 평범함이 두렵습니다. 한편으로는 거기에서부터 ‘그냥’ 사람들의 삶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지금의 ‘묻혀짐’이 폭력적으로 일어나도록 그냥 지켜보는 무기력함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역사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주체로 하여금 역사와 삶에 대해서 생각케 하고 그 입장이나 관점을 정리하면서 자신 혹은 미래의 삶에 대해서 어떤 왜상적인 거울, 비평적인 거점으로 삼게 되는 가치 기준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 역사관이 일종의 공식적인 문화상품 소개이거나 블록버스터급의 스펙타클함과 장렬함의 기승전결을 갖춘 ‘감동적인 이야기’와 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리얼리티와 상징화가 어긋나는 바로 그 장소에서 생겨나는 비판적이고 트라우마적인 외상에 비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작년 가을 즈음, 싱가포르의 한 극장에 갔습니다. 앞으로 출시될 영화들의 트레일러가운데 인상적인 어떤 블록버스터급의 개관박두 광고를 보았습니다. (광고에서는) 공간을 쾅쾅 울리는 엄청난 사운드, 그 속에서 육중한 신전같은 건물이 드러납니다. 일렬의 신전식 컬럼들 사이로 카메라가 가속도를 갖고 이동합니다. 빠르게 여러장의 역사화와 사진, 장면들이 교차 팝업됩니다. National Gallery Singapore _ South East Asian Art Museum개관 광고였습니다. 2015년 11월 25일. 마치 그것은 어마어마한 자본과 노력, 테크닉이 투여된 블록버스터의 전 세계 출시 광고같았습니다. 오늘날의 ‘뮤지엄’ 혹은 문화자본의 저장소는 사람들의 별의별 행위들, 삶의 증상들, 찌꺼기들, 혹은 그 결여와 잔여들을 ‘블럭버스터’로 만들어 배급하는 장소입니다. 마치 잔인한 사건들의 뼈아픈 기억과 상처가 손쉽게 엔터네인먼트 산업의 리소스가 되듯이 말입니다.
수집, 보존, 개별성, 고유성, 그것의 열악함과 고집스러움
작년, 그러니까 2015년은 싱가포르가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의 독립하고 이관유 체제로 재건국한지 50주년을 맞은 해였습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문화 예술 행사를 ‘경축’ 차원에서 많이 하였고, 웅장한 규모의 National Gallery Singapore을 신축 재개관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아마도 잘 정리된 근대사를 볼 수 있겠지요. 매우 공들인 국가주의의 아름다운 꽃으로서의 건물과 수장고가 될 것입니다. 특히 2000년 초반부터 이어진 싱가포르가 역사, 문화에 대해서 집중 육성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예술, 문화의 어떤 허브, 교두보가 되고자 하는 국가적 욕망을 과시합니다.
이 와중에 그 보존의 정도가 열악하기 그지 없는 개인의 한 아카이브가 있습니다. 그의 아파트에 가보면 아파트 전체가 천정부터 바닥까지 빼곡하게 자료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어머니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실정이고, 그나마도 그가 어질러놓은 자료들때문에 거실도 어수선하기 그지없습니다. 2014년부터 미술관 큐레이터들은 분주하게 코으앙화의 아카이브(Singapore Art Archive Project)를 찾았습니다. 물론 그는 그 이전에도 그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기획전시, 프로젝트, 오마주성격의 전시, 관련 작가들 자료 제작이나 개인전 등에 스스로 기획도 하고, 참여도 하고, 기여도 하고, 때로 언급도 하면서 활동해왔습니다만, 2015년을 전후로, 즉 싱가포르 이관유 체제 재 건국 50주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의 자료들은 다시한번 취사선택되었고, 마치 국가 대표인 냥, 한국 광주에 있는 아시아 아카이브 센터(ACC)에서 싱가포르관의 전시 자료를 제공하고 레지던시 연구자로 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싱가포르에서 미술관을 전전하면서 연구하던 저는, 뭔가 아쉬움과 부족함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던 차였고, 마침 저의 리서치도 작년에 코으앙화를 알게 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그가 (NTU CCA)의 레지던시 작가로 있었기 때문에 제가 시간이 날때마다 찾아서 예전 자료들을 검색하고 이야기를 듣기에 좋은 조건에 있었습니다. 이 아카이브에서 해외에서 방문한 방문연구자들도 종종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코으앙화는 매번 설명합니다. 보다 생생한 싱가포르의 문화, 미술사의 단면을 볼 수 있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전해들을 수 있었고 한층 깊이 싱가포르의 근현대 예술사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코으앙화는 1965년 생으로 National Museum Art Gallery에서 어시스턴트(1985-1991)로 일하였습니다. 이 시기 그의 청소년기부터 수집한 미술, 문화 자료들, 신문들, 콜라주 등이 확장되고 전문화되었고, 현재 방대한 규모의 싱가포르 근, 현대기의 미술, 문화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는 아카이비스트가 되어있습니다. 아카이브 특성상, 신문자료, 잡지자료, 팜플랫들, 서적들, 포스터 등 다양한 자료들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그 자신은 주로 집중한 것은 사진 촬영이었습니다. 그는 미술관 재직시절의 주요 미술 행사들을 매우 꼼꼼하게 촬영하여 기록하였고, 보존해왔습니다. 때로 녹음이 필요한 경우 녹음하기도 하였습니다. 미술관 사직 이후, 그는 중국 작가인 수이티싱(1914-1997)의 아카이브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로써 그의 아카이브는 보다 역사적 가치를 갖게 됩니다. 수이티싱의 자료들은 사진, 드로잉, 조각, 작가노트 등을 포함하며 그가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한 1940년부터 1990년대까지의 싱가포르의 사회, 문화 자료들을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이티싱이 결성한 Ten Men Art Group라는 열명의 작가 그룹의 동남아시아 예술프로젝트 활동까지 같이 있어서, 근대기 싱가포르의 사회, 문화, 예술상 뿐만 아니라 동남아지역의 몇몇 이미지까지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수이티싱의 예술탐험을 재연하듯이 그 지역을 재방문합니다. 올해만해도 앙코르와트에 두번씩이나 가게 되었고, 그 여정은 수이티싱과 텐맨 아트그룹의 자취를 다시 밟아가는 것이었습니다.
National Museum Art Gallery에서 뮤지엄 어시스턴트로 재직 당시 코으앙화의 수집과 사진도큐멘트는 당시 뮤지엄의 여타의 행사들에도 해당했습니만, 지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탕다우(1943-, 싱가포르)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활동에 주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코으앙화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그만의 작가로서의 길이 형성된 것은 탕다우와 챙석틴(1946-, 싱가포르)의 영향, 관계하에서였습니다. ‘민주주의’에의 열정, 시민 참여 등을 강조한 탕다우의 퍼포먼스, 프로젝트들과 챙석틴의 글과 작업으로부터 깊이, 지속적으로 영향받으므로써 그의 아카이브를 매개로 한 활동또한 이러한 ‘민주주의’적이고 자유로운 표현, 그것의 생생함과 중요성에 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선택된 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리어 역사 속에서 선택받지 못한 자 혹은 사건, 그 선택이 이뤄진 폭력적인, 혹은 무지한 혹은 무관심했던 맥락을 재조명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자 함을 이야기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문제시되어온 싱가포르에서 그의 아카이브는 ‘자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예술 프로젝트화하고, 외치고, 시도하고, 보여주었던 작가, 사건, 기관들에 대한 각별함이 있습니다. 그 자신이 직접 이러한 활동을 지지하여왔고, 참여해왔고, 현장에서 촬영하고 기록해왔습니다. 일례로 그는 싱가포르의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욕망들을 직접 공유하게 된 현장인, The Substation(1990 설립, 싱가포르에서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과 교류를 보여줄 수 있는 공연장과 미술공간이 있는 비영리 기획 공간)과 The Artists Village(TAV, 1988 설립, 이는 탕다우가 시작하였고, 코으앙화 또한 초기 멤버로 있는 작가단체입니다. TAV는 싱가포르의 주요한 활동적이고 자생적인 단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에 직접 참여, 공동 추진, 활동하였습니다. 그 활동속에서 그는 수많은 사진들을 남기게 됩니다. 이 사진들은 객관적인 도큐멘트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코으앙화 개인의 관점과 싱가포르 내에서의 어떤 비판적이고, 자생적인, 대안적인 노력에 대한 그 자신의 애착이 반영되어있다는 것이 큰 특징이 됩니다.
저는 주로 수이티싱, 탕다우, 챙석틴 그리고 The Artists Village, Post Ulu, P10, The Substation등과 관련한 자료들에 집중하였습니다. 현재 코으앙화의 아카이브가 평가받는 주된 맥이며 그 평가의 초점은 싱가포르의 여러 자생적인 활동들을 기록, 보존해온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코으앙화가 처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매우 고집스럽게 그의 아카이브를 보존하고 있는 힘이기도 하고요. 이에 대한코으앙화의 평가는 관련 단체와 작가들의 실험들, 자생적인 노력들, 대안적인 활동들과 그 속에서의 자유의 정서적 유대에 기인합니다. 코으앙화 자신이 느꼈고, 동참했고, 기록해오는 과정에서 이들의 무형적인 노력들이 그의 예술적 실천과 아카이브 활동을 통해서 보존되어 오고 있다는 점이 그에게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그 간 코으앙화의 활동은 때로 액티비스트적인 양상으로 평가되기도 하였고, 기존 기관들이 간과하는 구체적인 예술활동들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보존하는 대안적인 실험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습니다.
침묵. 구체적이고 고유한 영역, 줄 수 없는 것, 그것이 비가시적인 영역에 “있다”
코으앙화의 아카이브는 그 산만함과 사적 특성때문에,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벤야민의 서술을 다소 사적으로 보이는 상념들과 철학적 단상들, 그리고 미완의 글들이 일종의 ‘역사서술’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많이 비웃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 무엇도 결론내리지 않았고, 열거하고, 사유하였고, 상념하였고, 질문하였고, 드러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산만함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볼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미완의 열려있는, 다소 산만하지만 지극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에 정서적 영향관계에 있는 이 덩어리들이 역사와 갖는 관계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몇몇은 역사라는 무대에 정식으로 올려질 것입니다. 아니면 묻혀버리겠지요. 그러나 골치아픈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이도 저도 아닌 정서적 덩어리로만 존재하는 것들말입니다. 전 이런 골치아픈 정서적 매개 역할로서의 아카이브와 예술활동이 흥미롭습니다.
2000년 이후 코으앙화의 아카이브를 매개로한 활동은 주로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의 사진들 정리, 제시, 설명, 행사들마다 참조제시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2000년대의 인터넷의 공용화로 인하여 많은 자료들이 디지털화되어 공유되었기때문에, 이 후 코으앙화의 아카이브는 주로 수집보다는 아카이브의 현재적 역할, 즉 확장과 공유, 재맥락화 등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그가 본격적으로 아카이브를 갖고 기획, 활동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활동이 공식적으로 평가받게 된 주요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2004년 P10에서의 레지던시와 Singapore Art Archive Project의 정식 출범은, Errata의 발표라는 사건과 함께였습니다. 이것은 한 미술사책에 어떤 그림의 잘못 기재된 캡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림은 Chua Mia Tee의 <National Language Class>라는 그림이었는데, 1996년에 발간된 <A History of Singapore Art>(National Heritage Board / Singapore Art Museum)에는 1950년 제작으로 기재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단지 1959년이라는 실제 연도를 1950년으로 잘못 쓴 오타지적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대한 예술 작품에의 고증에 바탕한 출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운 사건으로 주목받았고, 아카이브, 미술사가 어떻게 사회, 역사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말레이시아 선생님이 말레이시아계 성인들에게 국가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1959년에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언어가 싱가포르 국어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1950년에 그것을 국어로 가르킨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지요. 이 상태로 출판에 이르렀고, 이 사건은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의 역사적 사실과 역사인식 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 되었지요. 코으앙화는 2004년 이 오류를 보고하였고, 이듬해인 2005년 P10 (The Artists Viallge에서 파생된 독립적인 액티비스트 예술가 그룹)과 함께 NUS(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와 SHM(Singapore History Museum)에서 전시하고 워크샵을 실행하였습니다. 당시 P10의 핵심멤버였고 현재 Post Museum이라는 액티비스트 그룹의 Jenifer Te와 공동 기획자이기도 한 Woon Tien Wei는 본인의 학위논문(싱가포르의 현대미술 지원과 융성기의 액티비스트적인 자생적인 활동들에 대한 논문)에서, 그것의 문화, 사회적 진취성과 중요성을 지적하였는데요, 그때 코으앙화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액티비스트적인 역할에 주목하기도 하였습니다. 2012년 Singapore Art Museum에서의 싱가포르 비엔날레에서 코으앙화는 수만장의 신문을 가지고 공간 설치를 하였습니다. 물론 신문이라는 아카이브 자료를 사용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작가의 몸과 수십년의 어떤 웅성거리는 이야기들의 퍼포먼스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2014-15년에 걸처 레지던시로 있었던 NTU CCA는코으앙화의 아카이브가 보다 국제적인 의미를 갖게되는 계기였습니다. 당시 방문 리서처로 있었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의 노라 테일러는 이제 사라진 그의 테이프레코딩에 대해서 조사하였고, 싱가포르 현지에서의 많은 큐레이터들과 방문리서처들, 대학원생들이 이 아카이브에 접근하였고, 조사하고 연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에 그는 Explanade의 Jendela Gallery에서 그는 “Art Places”란 제목으로 사진전시를 하였습니다. 주로 TAV의 몇몇 게릴라성 프로젝트와 실험들, 공연들, 탕다우의 프로젝트 등에 관련한 사진들이었습니다. 그 사진중에는 독특한 그만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참여한 행사들 속에서 고유하게 그만의 것으로 남은 장면들입니다. 주로 잊혀지고 없어진 건물, 행위들, 장소, 오브제 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흔적들은 이 전시를 아카이브 전시이자, 그의 개인전시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가만 살펴보면 매번 그의 기획된 전시는 어떤 사적 영역과 역사적 오브제들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현대적으로 묘하게 교차하는 차원에서 이뤄졌 온 것을 미뤄볼 수 있습니다.
비공식적이지만 그가 평소에 하는 활동은 여전히 페이스북을 통한 사진들의 제시입니다. 그리고 그를 개인적으로 찾는 연구자들이나 큐레이터들에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 평소의 그의 활동입니다. 최근에 흥미로웠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코으앙화의 아카이브의 주축 중 하나인 서브스테이션 정원에서의 행사들을 페이스북에 업로드한 것입니다.
얼마전 서브스테이션은 25주년 기념 행사로, 싱가포르의 국립 도서관에서 작은 아카이브 전시를 했습니다. 수개월간 차후 디렉터를 찾지 못한 채 공백기에 있었고, 주요 대중공연과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공연장이었던 서브스테이션 정원에 대한 상실로 소위 위기상황에 처했었던 서브스테이션의 이 25주년 기념 행사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서브스테이션의 주요 프로그램별로 각 시기마다 해온 행사 사진들, 주요 전시, 퍼포먼스, 공연 사진들을 보여주고, 관련 작가, 기획자들의 인터뷰를 상영하였습니다.
인터뷰를 가만 보고 있으니 모두들 서브스테이션의 존속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원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에 잠겨있었습니다. 서브스테이션 건물의 뒷 마당엔 커다란 정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공연들이 이어졌습니다. 때로 밤새 젊은 작가들의 자유로운 공연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젊은 예술인들의 집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정원이 몇년전 문을 닫고 한 카페에게 세를 주게 되었습니다. 재정난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정원을 회상하고 그리워하며, 그곳에서의 활동이 지금의 동력이 되었다고 추억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브스테이션이 지금 그대로, 변치 말고 그 자리에 있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정원을 다시 되찾을 것을 기원하였습니다.
저는 서브스테이션의 정원 공연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 외국인입니다. 아마도 저와 마찬가지로 요즘의 젊은 세대들, 그곳에 가본적이 없는 세대들이나 학생들은 이들이 마치 그들만의 잔치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한 비영리 기관으로 회고하겠지요. 이것만으로는 이들의 회고에 묻어있는 어떤 진한 아쉬움의 농도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싱가포르라는 맥락속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중요할 것이라는 심증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심증을 갖고, 이 간략한 회고전시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코으앙화의 아카이브를 찾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코으앙화는 그의 페이스북에 서브스테이션 정원에서 있었던 공연 사진들을 수백장 올렸습니다. 그것을 한장 한장 넘겨보면서 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보았습니다. 서브스테이션 뒷 마당에 있던 그 커다란 반얀 나무(<Ban Yan> 지금은 제거되었는데, 매우 지난한 애도를 통해서 서브스테이션은 그 나무를 보냈습니다. 관련 작가들이 이 나무 줄기 각자 화분에 나눠 갖고 쓴 에피소드들이 자료집에 실렸고, 나무의 제거와 함께 실시된 Robert Zao Renhui 의 오랜 시간에 걸친 프로젝트가 25주년 기념과 함께 서브스테이션 갤러리에 전시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그곳에 있었는지 보았습니다. 공연 후 뒷 마당에서 빗질을 하며 청소하던 초대 관장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모두들 그 사진을 잊지 못하여 댓글을 달았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서 시연하는 장면들, 일이십년전의 그들의 패션도 보았습니다. 서브스테이션 담장에 걸터 앉아 무료 관람하는 청년들, 그들이 성장하여 지금의 작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서야 좀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쉬워하는 것, 그리고 아직까지도 남아있고, 어쩌면 앞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밑도 끝도 없는 정서적인 교감의 현재성같은 것을요. 그리고 코으앙화는 그 자신도 서브스테이션의 수많은 공연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고 기록하고 즐기고 감동하였던 한 사람으로서 인터뷰를 거절할 채로 단지 조용히 페이스북에 사진들을 올렸습니다. 서브스테이션의 25주년 행사에 대해서 그는 침묵하였지만 그의 사진들은 매우 크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진들은 마치 착잡한 커밍아웃, 어쩌면 양심선언과도 같은 장면이 되었습니다. 사진들은 하나같이 매우 신나는 장면이었고, 매우 정서적으로 애착이 있는 사진들이었습니다. 무엇인가 그곳을 이어왔고, 항상 변화를 추동해왔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현재에 이렇게 조용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때 아마도 코으앙화의 아카이브에 대한 좀 색다른, 삐딱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확장된 시간, 상실의 반복, 산발적인 조우
상실. 그것은 제도화와 상징화, 재맥락화에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상실은 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확실한 정서적 증거물로써의 상실된 것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구체적인 흔적으로서의 실재차원을 구성하는 것임을 반증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상실의 과정 속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산발적인 어떤 정서적 경험속에서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항상 트라우마적으로 현재에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확실성 속에서의 불안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증거과 그 어떤 세련된 역사쓰기보다도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말입니다.
구스반산트(Gus Van Sant)의 <Promised Land>(2012)라는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상실’을 반복해왔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놓쳐버렸는지 보여줍니다. 한 농촌 지역에, 글로벌이라는 천연자원개발 회사의 직원들이 들어가면서 영화는 시작합니다. 주인공인 맷 데이먼이 한 역할은 이 마을 주민들로부터 개발에 대한 동의서를 받아내는 것이었지요. 글로벌이란 회사는 이들이 앞으로 갖게 될 수 있는 엄청난 돈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의 마치 양심선언, 그리고 커밍아웃과 같은 오픈 연설이 있습니다. 그가 약속할 수 있는 미래는 없고, 그 또한 농촌 출신이었으며, 그 자신이 농촌에서 이어받은 것은 농촌과 고향의 상실이지만, 어떤 살아나가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영화의 중간에 많은 것들이 보여집니다. 개발때문에 희생되는 농가, 축산물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삶의 터전의 상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 단지 당장 ‘돈’이 약속되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살아온 방식과 그것의 메뉴얼 없는 몸에서 몸으로의 전수’, 즉 고유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발전과 새로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우리는 ‘과거’를 ‘미래’와 교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눈 앞의 이익과 삶의 터전을 교환했고, 그 삶의 터전에서 일궈온 어떤 역사와 미래에 전수해줄 노하우 마저 버려버렸습니다. 근대화와 전지구화, 신자유주의적 교환 속에서 ‘상품’이란 것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려야하는 ‘가치’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수도없이 겪어온 이 교체와 상실의 반복으로부터 우리는 마치 과거에 흔적으로 남은 상실된 미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착잡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묻어나는 어떤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이 확실성은 트라우마적 기억, 그리고 그것의 현재적 교감 즉 어떤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이성적인 판단, 과학적인 판단, 경제적인 판단과는 좀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그것을 내리게 하는 동력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일종의 단절들이 계기가 되어 추동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단절의 현장마다 지극한 어떤 슬픔, 고통, 절박함, 즉 ‘이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해답이라고 할 수 는 없지만, 분명히 이것은 아니다’ 라는 확실성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 확실성은 자명한 착잡함의 현실을 딛을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반복되어온 폭력적인 교체속에서, 시뮬라크르적의 스펙타클함 속에서, ‘삶’이라는 것의 어떤 중핵차원이 계속 산발적으로 튀어나옴을, 그 운동을 고집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확실성은 지극히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서적인 확실성은 매우 구체적인 어떤 것이고, 오히려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아마도 전범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아야하는 시점에서는 이러한 정서적인 확실성만이 유일하고 위험한 동기일 것입니다.
코으앙화의 아카이브와 그의 개인적 이미지로서의 사진은 분명 정서적 유대감의 흔적과 그 덩어리입니다. 여기서 사진 이미지는 그 매체 특성으로 인하여 그의 아카이브가 다층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그가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는 행위나 일일이 수많은 자료들을 들고 설명하는 행위는, 제도화에서 걸러지는 어떤 역사적 사건들의 실재적인 차원들, 그 속에 묻혀버린 가능성들, 강렬함 등이 있음을 이미지들로 하여금 웅성거리게 하는게 됩니다. 제대로 해석되지 않은 사료들이 불쑥 불쑥 두서없이 튀어나옵니다. 이 제시들은 남겨짐에 대한, 완벽하지 않음에 대한, 상징화되지 않고 웅성거림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가지수 있는 불안한 확실성을 상기시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산만한 아카이브의 존재는 과거의 이미지가 어떻게 현재에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 혹은 오작동하는지, 혹은 절묘하게 상징화되는 지 등, 현재적 해석에 있어서 다른 여지들이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가 됩니다. 그리하여 역사가 소유가능한 상품이 되건, 민족주의와 권위주의의 프로퍼갠다가 되건, 아니면 서술될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정서적인 영역으로 남아서 현재의 트라우마가 되건, 그리하여 어떤 다른 차원에서의 실천과 행위를 요청하는 장소가 되건간에,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정리’, ‘스펙타클화’라는 상실의 구조 자체를 보게 됩니다.
작년 코으앙화가 광주 레지던시로 떠나기 전날, 그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여러 박스들이 거실, 부엌, 방 모두를 천정까지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카이브 덩어리. 이것이 어떻게 ‘공식적으로 정리’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매번 겪었듯이 몇몇 자료들이 취사선택되어 전시되고, 기관들에 의해 정리, 요약, 광고 되겠지요.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서 지극히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고 권위적인 프로퍼갠다의 충실한 증거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 와중에 물론 많은 부분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처분, 폐기처분되거나 무시될 것이고요, 그 속에서의 실험들과 가능성들이 또한 사장되겠지요. 제 기대는 코으앙화는 여느때처럼 어떤 누락된 것들, 선택되지 않은 것들, 그리고 선택불가능한 것들을 ‘이미지’로 제시해나갈 것이란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쓰기로부터 타자화되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재발견되는 ‘확실성’의 영역, 절대 내놓을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음’을 증명하듯이요.
개별성이란 것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산만하게, 그리고 산발적으로 튀어나오고 있는 현재성이 담지된 장소가 아닐까요. 불만족스럽지만 무엇인가 관람객, 혹은 타자 혹은 미래에 스스로 각자의 관점을 반성해보게 말입니다. 코으앙화의 아카이브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라기보다, 이것이 이렇게 산만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 아카이브가 살아나가는 방식이고, 그래서 특별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내놓게 할 수 없는 ‘무엇’이니까요.
이것은 참으로 긴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태껏 배제를 통해 써온 역사쓰기에 대한 착잡한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평가, 애도되기는 커녕, 무관심하게 묻혀버리는 ‘삶’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만나는 제대로된 방법은, 잘 정리된 스펙타클 속에서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가능성과의 조우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이 조우는 약속된 서술이나 프로퍼갠다적인 모토, 혹은 아카데미적인 정의와의 만남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속되는 삶 그자체와의 우발적인 만남이기때문에 이 조우는 항상 현재적이고, 정의불가능하며, 트라우마적인 것입니다. 이 조우는 그것이 어떤 확실성을 배태하고 있고, 마치 양심선언이나 커밍아웃과 같은 지속적인 ‘행위’가 산발적으로 튀어져 나오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계기가 역사일 것입니다. 물론 역사를 소재로 한 많은 재현들이 있습니다. 영화, 교과서, 책, 전시 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누구도 역사자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펙타클한 재현’은 근대사가 그래왔듯이, ‘상실’의 한 에피소드이기때문입니다. 근대기를 통해 우리는 먹을 것을 일궈온 터전을 내놓았습니다. 즉 장소의 상실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노동과 노력과 인간이 인간으로 거듭나온 도약들로 일궈온 역사를 내놓을 차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안타까움은 필사적입니다.
이병희, 한국의 1세대 대안공간 큐레이터를 거쳐서, 현재는 독립큐레이팅(시의부적절한 만남 시리즈)과 비평활동을 하고 있다.
* 사진 자료 artist "Koh Nguang How'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