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페스트>와 소설 <페스트>-
※ 뮤지컬 <페스트>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서태지의 음악과 결합한 쥬크박스 형태의 뮤지컬. 7.22.~9.30. LG아트센터에서 현재 공연 중
참으로 위험한 동침이었다. 대중성은커녕 오히려 대중을 잔뜩 불편하게 만드는 서태지의 음악과 알베르 카뮈 소설의 결합이라니! 음악이 불편하면 소설이 쉽거나 소설이 어려우면 음악이 편안하거나 할 것 아닌가. 한국 대중들에겐 다소 무거운 록 베이스에 비판적이고 거친 표현들이 가득한 음악. 그리고 400여 페이지 내내 페스트와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독하리만치 늘어놓는 소설. 서태지와 알베르 카뮈라는 두 독설을 이 시대에 가장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예술양식인 뮤지컬로 각색한 것은 필시 위험한 만찬 같았다.
하지만 이 만찬이 위험천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두 작품의 조우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를 바라는 필자의 오지랖(또는 팬심)에서 오는 것일 뿐, 사실 내용만을 따진다면 서태지 음악에 소설 <페스트>는 매우 그럴듯한 조합이 틀림없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가 무대에서 극화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추상화하기’를 극도로 경계하는 작가의 방식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이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추상화’ 과정이 영웅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소설 <페스트> 중)
유행성 열병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곧 그 환자를 당장 끌려가도록 만드는 일이 되었다. 그럴 때면 정말 추상과 난관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병자의 가족들은 환자가 완치되거나 죽기 전에는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설 <페스트> 중)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의사 리유가 영웅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이고 흥미롭다. 카뮈는 페스트가 “무엇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빈틈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 사무였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서술자는 “아무것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객관성이라는 것을 고집해왔다”는 것이다. 저항과 선동의 저의로 가득한 이 소설이 전혀 감정적이지 않으면서 관조적이고 냉소적으로 페스트를 설명할 수 있었던 이유다.
카뮈의 방식대로라면 어떤 현상을 ‘사건’으로 규정한 이후에 이것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데, 뭔가 개념화 하고 추상성을 부여하여 해석을 시도하는가 하면, 일련의 서사를 만들어 그 속에서 영웅을 등장시키는 일은 세상의 변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변혁이란 ‘사건’보다는 ‘일상’에서 이루어지며, 영웅이 아닌 개인들의 집합체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건에 대해 자꾸 감정적인 몇 개의 단어들로 일반화하여 추상화의 함정에 스스로 빠지곤 한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유가족과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사소한 도움과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꾸준히 실천하기보다는, 사건을 표현하는 언어들에 집중하고 감정에 호소하는가 하면 감정이 일치하지 않는 자들과의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데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급기야는 피해자들은 박제된 성상처럼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만다. 우리는 이렇게 망각을 반복한다.
서술자는 여기서 예컨대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용기를 북돋아주는 영웅이든가 빛나는 행동과 같은, 아주 굉장한 구경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소개할 것이 없으니 얼마나 유감된 일인지 모르겠다.
(중략)
그렇다, 인간이 소위 영웅이라는 것의 전례와 본보기를 세워놓고 싶어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반드시 이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어야 한다면, 서술자는 바로 이 보잘것없고 존재도 없는 영웅, 가진 것이라고는 약간의 선량한 마음과 아무리 봐도 우스꽝스럽기만 한 이상밖에는 없는 이 영웅(하급 서기관 조제프 그랑을 뜻함)을 여기에 제시하고자 한다.
(소설 <페스트> 중)
작가는 소설의 초반(1부)에서 곧 페스트에 점령될 오랑이라는 도시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을 늘어놓는다. 도시의 기후와 주요 시설들, 사람들의 생활패턴과 직업…. 그 중 ‘조제프 그랑’이라는 인물 묘사는 주인공에 대한 설명보다 더 장황한데, 하급 서기관에 지극히 소시민적인 생활습관과 평범한 이 인물에 대해 작가 스스로 ‘하찮다’라고 하면서도 굳이 정성을 들여 수시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아무런 사건도 만들지 않는 이 ‘하찮은’ 인물을 주인공 ‘리유’만큼이나 자세히 설명하는 작가의 집요함에 지루해질 무렵이 되면, 그제야 소설은 ‘그랑’의 진가를 천천히 보여준다. 그랑의 진가란 ‘평범함’와 ‘성실성’이다.
페스트와 고립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며 연대하고 저항하는가를 제시하고자 했던 소설이, 마지막까지 단 한명의 영웅도 만들지 않고 이야기를 마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훌륭한 의사의 소명을 마지막까지 다하는 주인공 리유,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자원보건대’에 합류하는 기자 랑베르, 저항과 연대를 외치고 몸소 실천하는 지식인 타루. 이러한 기라성 같은 주연들을 밀쳐내고 카뮈의 칭송을 받는 자는 다름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그랑이었던 것. 그랑은 하급 서기의 일을 마치고 와서는 매일 저녁 꾸준히 자원보건대가 필요로 하는 합산과 통계 일을 해나고, 진료 카드를 정리하면서 격정적이지 않게 마치 원래 자신의 일상이었다는 듯이 보건대의 일을 해나간다.
‘일상성’의 위대함을 강조한 소설이 뮤지컬 무대로 옮겨지면 어떨까.
뮤지컬 <페스트>는 이렇게 지독하게 객관적인 소설을 극화하기 위해 몇 가지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하나는 ‘미래도시’라는 가상의 시간 설정, 두 번째는 오랑시장을 인상적인 악역으로 등장시킨 점, 세 번째는 지식인 타루(소설에서는 남성인)를 여성 캐릭터로 각색한 점이다. 그리고 서태지 가사의 은유적이고 자극적인 표현들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켜 극의 스토리와 절묘하게 매치한 점도 뮤지컬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특히 두 번째의 시도, 즉 악역으로서의 오랑 시장의 캐릭터 설정은 성공적이다. 페스트 병균의 확산을 부정하고 은폐하며 거짓 언론을 조장하고, 위험한 순간에는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탈출만 시도하는 시장 리샤르. 사실 소설에서는 첫 부분에 잠깐 배경처럼 등장하는 자이지만, 리샤르에 대한 단 몇 줄의 설명만으로 우리 독자들은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의 군상을 떠올리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현실에선 흔해빠진 캐릭터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이 엑스트라를 주연급 악역으로 격상시켜 우리가 싸우고 있는 눈에 안보이는 적을 시각화하고 구체화시킨다. 악역 리샤르 주변에는 리샤르의 손과 발이 되어주면서 기생하는 자들이 있고, 항체 바이러스와 약품을 팔며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기업이 있으며, 또 그 자본아래 기생하면서 페스트의 시대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다. 소설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오랑시 시민들의 민낯을 뮤지컬에서는 클로즈업 하여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알베르 카뮈의 메시지를 더욱 현실감 있게 자신의 주변과 연관시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는 자신을, 진실을 마주하는 불편함을 추모의 눈물 한줌으로 씻어버리던 자신을, 그리고 이내 망각하는 자신을 떠올리게 된 건 필자 뿐은 아니었으리.
무. 력. 함.
저 TV가 내게 약속할 때 어차피 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웃지.
높게 올려 쌓은 담, 이 단절 속에 난 나의 꿈에 거짓을 고한 이후
그 향긋했던 약속에 이 도피처로 돌아온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는걸.
오랜 시간이 지나가버렸지.
어떻게 난 아무런 기억들이 나질 않는걸까.
수많던 저 인파들 속에서 본 적 없는 저 낯선 풍경이 나를 노려보네.
(서태지 <COMA> 중/ 리유 외 배우들 합창)
물론 우리 개인들이 모두 일상 속에서 투쟁을 해왔어도 세월호는 어김없이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리유와 같은 의사들이 매일 같이 치료해도 페스트 환자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이 지독한 질병은 사람들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일정한 때가 되어야 사라지는 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 하루 학교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공장소에서 관습에 저항했지만 내일 아침 그 싸움은 반복될지도 모른다. 사회적 편견과, 불공정과, 가난과, 수많은 속임수와, 차별과, 혹은 부당한 권위와 매일 직면하고 아주 가끔씩은 승리를 경험할지라도 그 승리는 일시적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반복적으로 패배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의 지적처럼 우리는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매일 직시하면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피할 수도 초월할 수도 없는 이 생의 한가운데서 싸움을 멈출 수도 없다.
의사 리유는 죽음이 확실시되는 페스트 환자를 매일 수 십 명씩 ‘치료(?)’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그들은 리유의 환자다. 또 치료한다고 하여 다음날 페스트 환자나 사망자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을 것도 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그리고 여기에서 패배의 미학이 시작된다. 속절없는 싸움과 패배를 반복하면서 서태지와 알베르 카뮈 식의 ‘저항’이 어느덧 우리의 일상 속에 단단한 알을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명절연휴의 끝이 아쉬워 남편과 보았던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역)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가야합니다. 그 실패가 쌓여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이 글을 읽은 분께 자기 안의 페스트와 싸움을 응원하며, 서태지의 <COMA>와 <LIVE WIRE> 원곡을 권해드린다.
(위정선)
*사진출처: 뮤지컬<페스트>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