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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짜임관계로서의 예술

- 제11회 광주 비엔날레 <제 8기후대 ;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전시 -

2016년에 들어와 프랑스에서 크게 두 번의 국지적 테러가 일어났으며, 이례적으로 배고픔과 가난 때문에 자살한 한국인 부부의 소식이 들려왔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으며, 한 개인(백남기 농민)의 치료와 죽음에 개입하고자 했던 사람들, 뇌물과 성추행으로 얼룩져있는 기득권들, 잔혹한 아동폭행의 가해자들, 수많은 축제와 문화행사 속에서도 여전히 배고픔과 가난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 자살로 내몰리는 젊은이들, 그리고 이상기온으로 인한 자연재해들, 그리고 도무지 믿기 힘든, 아니 차라리 믿고 싶지 않는 최순실 국정농단 등, 근 몇 년 한국에서 자주 듣는 가슴 아픈 소식들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신)자본주의 사회, 소비사회, 소멸의 사회, 감시·소외의 사회 등으로 지칭되며 다양하게 지속 되어온 우리 사회에 대한 부정적 정의1)는 화려함과 속도에 감춰진 한국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빠른 경제 성장과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은 다양한 분야의 불평등을 야기하며 한국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빠른 속도의 결과물들은 우리의 윤리, 관용, 연대, 비판적 의식, 타인과의 소통과 배려를 결여시키고, 인간과 삶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파괴시키고 있다.

그 원인에는 정치·경제·사회의 복합적인 요소가 맞물려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역패권주의를 앞세우는 정치 행태 및 국정 운영 철학의 부재, 그리고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의 도덕의식이 있다. 한국 정치의 민주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계속적인 탄압, 억압, 폭력을 행사하고, 지속적으로 정치적 이념을 양산해오고 있다. 최근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러한 폐해가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으며, 그 폐해가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우리 앞에 여실히 드러난 사태이다. 이 사건을 통해 국민들이 겪고 있는 박탈감과 자괴감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우리의 깨어있음은 전부 사라졌을까?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물음과 비판적 사유, 그리고 실천의식은 소멸되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고 반응해야할까? 동시대의 현대 유럽 철학과 예술가들이 자신의 이론과 예술의 목적을 일상적인 삶으로 유입시키고, 사회의 변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우리 스스로 ‘비판적’으로 그리고 ‘냉혹하게’ 우리의 상황을 성찰해야 할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사회적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의 사회를 예상하며, 우리의 후세대의 삶을 조금씩 유추해 보며,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지식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하는지를 고민했다.

앞서 <예술, 역사를 해석하다. 예술적 실천, 역사를 만들다>라는 글에서, 나는 역사에 대한 해석의 층위를 확장시킬 수 있는 전시 패러다임의 전환, 그리고 해석자들의 역사 해석에 대한 인식을 언급했다.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풍부함이 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열린 관계 안에서 역사적 의식을 발현시킬 때, 반성과 비판의식이 우리의 전통을 풍부하게 하며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채워 비로소 미래의 지평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미술은 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 성격상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창조적인 미술은 어떻게 숨 막히는 사회에서 탈출구를 찾고 문화적 위기 속에서 새로운 의식을 성립시키는가? 그렇다고 우리는 1920년대 프랑스의 미술계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작품들 혹은 1930년대 미국적 상황 속에서 지나치게 정치적, 사회적 리얼리즘 속에서 발현된 예술의 고민들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이 시기의 미국 예술가들은 예술이 정치적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혁명적 이상을 추구하고, 동시에 예술적 조형 실험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회에서의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하게 고민했다. 예를 들어, 알프레드 바(alfred Barr)가 주장했던 ‘추상 미술이 사회와 격리된 독자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토대로 마이어 샤피로(Meyer Schapiro)와 같은 연구자는 모든 미술작품이 그 작품이 제작된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술을 마르크스주의에서도 그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도 벗어나게 하였다.2)

또한 프랑스 예술가들은 1910년부터 1939년 사이에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진 예술가들을 포용하며, 다양한 실험들을 진행하면서 아방가르드가 가져온 예술적 혁명을 경험했지만,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상황주의 예술가들이 사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방가르드의 전반적인 계획은 오늘날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미술가들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는 ‘다양한 실천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그러한 고민들 – 이러한 사유는 정보화시대의 예술의 고민과도 연결된다. 또한 작품의 연출 및 형식, 삶을 변형시키는 진정한 수단들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현실의 문제를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지 않고, 예술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수단 즉 미래를 꿈꾸게 하는 기억과 상상력의 문제를 작품 속에 시도한다 - 과 아방가르드 정신이 프랑스 특유의 현대미술을 지속시키고 있고, 사회에 맞춰 예술을 변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도권에 있는 예술가들과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 사이의 잠정적인 갈등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권의 틀을 넘어 미래로 향한 사유를 구축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진정한 시도이다.

매 시기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한 예술의 성찰은 예술 그 자체를 다양하게 만들고,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 11회 광주비엔날레의 <제 8기후대 ;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의 주제는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3)아마도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바라 본 예술의 모습 너머를 상상하게 하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기대와 함께 말이다.

텍스트, 벽, 주제 없는 카오스(khaos ; sans textes, sans murs, sans thèmes)

국제 비엔날레는 일반적으로 실험적인 예술가들에게 전시를 통해 창작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교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광주 비엔날레는 이러한 목표를 위해 주제전을 중심으로 한 전시를 선보이며, 현대미술의 흐름과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6년 제 11회 비엔날레 역시 마리아 린드의 총감독 아래 <제8기후대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의 전시를 보여준다. 그녀는 전시 주제에 대해 “제8기후대는 12세기 페르시아 철학자에 의해 착안되고 20세기 철학자 앙리 코르뱅에 의해 체계를 갖추게 된 이론이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자들이 찾아낸 지구 위의 일곱 개의 물리적 기후대에 더해진 개념으로 제 8기후대는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일상적 방식을 넘어서 오직 상상력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러한 제8기후대를 통해 미술이 현재와 미래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미술의 역량을 탐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역량은 “미술을 삶의 영역과 정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던 전통적인 구성주의 개념을 보완하고 증강시키면서, 세계 각지의 미술 영역, 그리고 현존하는 공적, 사적 시스템이 지닌 기만적인 영역에서의 하부구조에 초점을 맞출 때 일어난다. 미술의 수행성에 관한 이와 같은 관심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 지닌 상상적이고 투사(投射)적인 가치, 즉 미술이 미래와 맺는 능동적인 관계이다.” 그렇기에 미술은 먼저 “주변의 현실 세계와 능동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광주비엔날레의 예술 프로젝트는 다양한 방법으로 모두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와 연관된다. 땅과 자연 자원을 지키기 위한 갖은 노력에 대해 말하는 ‘땅 위와 땅 밑’을 포함한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그녀는 예술을 매개로 정치, 경제, 환경, 사회의 문제를 관통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즉, 그녀는 “(그녀가 도록에서 언급하길)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불구화되거나 미래주의, 공상 과학, 테크노회의주의, 유토피아주의, 그 외 기존에 인정된 예측 기술들에 천착하면서” 미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미술의 역량을 탐구한다. 이러한 의도는 그녀가 선정한 작품들과 배치 방법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를 은밀히 교우해보겠다는 그녀의 야심작은 예술이 현실의 문제를 통해 미래에 대한 능동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를 공상(空想)한다.

주 전시관은 총 5개로 구성되었지만, 그녀는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이외에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그 외 작가들의 작업 장소를 선정했다. 25명의 초청작가와 4명의 광주 작가들의 참여로 지역의 소재와 역사를 고려하면서 비엔날레에 전시되는 신작도 제작했다. ‘상상의 세계’를 의미하는 제 8지대, 지진계가 기후 변화를 예측하듯이 예술가들이 사회 변화를 먼저 예측·진단하고 예술에 대한 잠재력, 미래에 대한 투시와 상상력을 끌어내어 제작했던 예술작품들을 재구성하고자 했던 그녀만의 전시공간은 한계에 봉착한다. 기후, 사회, 미래 등의 카테고리를 분류하고자 했던 전시장의 공간은 작품들 자체의 배치문제로 인해 카오스 - 물론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혼합되어 있다는 의도에서 맥락을 깨트리는 작업을 할 수 있지만 – 그 자체였다.

감독은 제1전시장의 도나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을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재조명하며 광주비엔날레의 지역성과 정체성을 강조했다.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는 <녹두서점>의 신작을 통해 1980년대 광주 민주화 운동이 거점이었던 상징적 상점을 재방문하면서 스케치한다. 다양한 워크숍과 발표 행사, 그리고 잡지와 포스터들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의 분위기를 통해 작가는 지속적인 자료수집에 기반을 둔다. 작가는 이 시대의 인물들의 행보를 되짚어보며 그들의 일생, 철학, 삶의 방법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인물을 통해 관계를 맺었던 가르시아는 보다 폭넓은 대중과의 만남 방식을 위해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의 거점이었던 녹두서점을 비엔날레 공간 안에서 임시적으로 재현하였다. 작가는 재현된 녹두서점 안에서 당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힘이 되었던 서적들을 전시하고, 서점 중앙에 놓인 관, 그리고 서점의 설립자인 김상윤의 토크 등을 진행하면서, 광주의 역사를 현재로 다시 소환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새롭게 구성된 나무결의 이질감처럼, 작가와 5·18, 그리고 광주와의 관계는 거칠게 생략되어 있다. 녹두서점의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 정신, 공간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해 작가는 모던한 책장 사이로 ‘역사’를 박제시켰다. 녹두서점에서 포스터를 제작하는 미술 워크숍을 열고, 대자보를 써서 전시하는 퍼포먼스, 북소사이어티 서점에서의 미술 관련 서적들을 전시, 판매하는 그의 작업은 역사적 맥락이 결박된 채, 박제된 형상으로만 남아 있다. 작가는 광주 - 5·18항쟁의 토대가 된 연대의 역할 혹은 민주 정신, 그리고 시대의 역사적 문제 등 - 를 자신의 경험으로 전환시키면서 소통하기 보다는 단지 외부자로서의 시각만을 보여준다.

반면, 멕시코 코페라티바 크라테르 인베르티도 그룹이 재현하는 광주는 좀 더 신선하다. 이들은 5·18 기록관의 3층을 일시적인 갤러리로 전환시켰다. 이들은 부패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멕시코 아요치나파 학생 대학살 사건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투쟁을 탐구하고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현재와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러한 멕시코의 역사적 상황과 한국의 5·18 광주민주항쟁을 나란히 배열하면서 두 나라의 미래를 환기시키는 가상의 이미지를 전시한다. 이들은 자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해석을 토대로 현재의 경험을 넘어서는 확장된 상상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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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회 광주비엔날레 주 전시장 – 1전시실 전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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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에 의해 제1전시장의 주요 거점으로 선정된 도나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을 지나갈 때, 우리는 또한 전시장 자체의 카오스에 직면한다. 200점이 넘는 작품들을 통해 복잡하고 야심찬 주제 아래 환상의 세계와 현재의 현대 미술을 동시에 반영하고자 하는 감독의 포부는 그녀의 전시 방법에 의해 무너졌다. 박인선의 <뿌리>, 토미 스토켈의 <광주돌>, 줄리아 사리세티아티의 안산에 있는 인도네시아 노동자 커뮤니티를 다룬 작품 등이 있었지만, 전시의 배치의 과정 속에서 이러한 작품들의 효과는 드러나지 않았다. 어쩌면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다양성, 복잡성, 그리고 ‘미시적’ 작품들을 구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재현 방식, 더 나아가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실천의 과정으로 합류시키고자 했던 예술의 ‘매개’ 개념을 토대로 진행 과정과 지역 현장, 더 나아가 국제적 네트워크를 연결하고자 하는 그녀의 별자리들은 어떤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카오스로 빠져버렸다.

그녀의 철학적 깊이에도 불구하고, 전시 재현의 문제는 난관에 봉착했다. 전시 공간은 여백과 상상력, 성찰이 감도는 공간으로 재현되었는가? 다양성과 공존을 이야기하고자 수많은 작품들을 재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선택한 ‘무-경계’와 ‘무-텍스트’를 넘어 그녀는 ‘무-주제’까지 의도하였는가? 인간의 상상력은 무(無)에서 발현되었던 것일까? 현재를 진단하며, 성찰을 통해 미래를 상상하기에는 기획자의 전시 구성은 혼돈 그 자체였다. 미래는 공상의 공간으로 넘어갔다. 특히 그녀는 제1전시장을 통해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였는가?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깨트리는 방식이라는 그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작품들 간의 관계를 무시한 채 ‘그냥’ 작품들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사유의 확장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텍스트 또한 지워버렸다.

흩어져 있는 수많은 별들로부터 떠오르는 별자리를 읽어내기 힘든 전시 구성은 모니르 샤루디 팔만팔마이안(Monir Shahroudy Farmanfarmaian) 작품 배치에서 종종 목격된다. 작가의 작품 <그룹 9 [컨버터블 시리즈] : 십각형(두 번째 분류), 육각형(다섯 번째 분류), 사각형(다섯 번째 분류)>은 벽에 걸린 거울의 표면과 그곳으로부터 전개되는 공간 사이에서 펼쳐지는 자유로운 유희의 과정이다. “공간을 반사하는 접점을 연출하는 거울 작업은 주변의 공간적 차원을 미장아빔(mise en abyme)으로 오므려 거울이 잡아낸 우주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세계 안에 재배열한다.” 이러한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해석을 자아내는 기하학적인 거울 조각들을 배열한 작가의 작품을 마리아 린드는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작품들 사이에 가둬버렸다.

모니르 샤루디 팔만팔마이안, <그룹 9[컨버터블 시리즈]> 배치 풍경

또한 비엔날레의 역할을 고려하여 총감독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비엔날레 오픈 전부터 준비해왔던 포럼, 월례회, 인프라스쿨 프로젝트는 광주, 더 나아가 아시아의 성장, 해체, 정체를 탐구하기 위한 계획에 비춰볼 때, 그 결과가 미비했다. 지역 연계와 현대미술 담론 생산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자 했지만,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관계자들이었으며, 남은 것은 전시 기간 내내, 그리고 전시 후에 식어버린 공간뿐이었다.

이에 반해 2007년 리옹 비엔날레에서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개최된 베두타(VEDUTA) 프로그램은 부대 행사가 아니라, 비엔날레의 핵심 행사가 되었다. 이는 현대 예술의 흐름을 짚어내며, 예술 작품을 관람하는 것에만 국한되기보다 지역민과의 교류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다. 베두타는 관객이 참여하는 작품으로 구성되며 리옹시를 넘어 론-알프스 지역민과 현대 예술의 소통을 위한 공공예술 관련 세미나와 컨퍼런스, 현대 예술 창작 방법에 대한 다양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며 지역과 소통하는 하나의 창이 되면서 도시가 하나의 예술적 목적이 되었다. 비엔날레를 계기로 관람객은 국제적 규모의 창작물을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일상 속 예술을 체험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2007년에만 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면서, 각각이 흩어져 빛나고 있는 별들을 연결한다.4) 베두타는 리옹 근방의 소도시들을 규합하면서 6개시의 예술 단체와 사회단체, 기관들과 협력하여 이루어졌다. <예술 만들기>, <예술을 먹다>, <예술에 살다>, <예술을 말하다>, <예술을 생각하다>의 5개의 카테고리5)로 나뉘어 일상 속으로 들어오는 현대미술을 경험한다. 리옹 비엔날레는 전시공간을 크게 ‘국제전’과 아티스트 레지던스 기반의 아마추어 프로젝트인 베두타, 그리고 예술가 컬렉티브와 신진갤러리, 대안 공간 등이 참여하는 ‘레조낭스(Résonance)’로 구성하며 계속적인 모습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러한 지속적인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리옹비엔날레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미술 영역 혹은 미술 대상을 짜임관계로 포착하려는 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짜임관계를 통해 미술은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 삶을 엮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고 이 계기를 통해 미술의 목적도 드러날 것이다.

복잡하고 야심찬 주제 아래 환상의 세계와 현재의 현대 미술을 동시에 반영하고자 하는 감독의 포부는 그녀의 전시 방법에 의해 무너졌다. 그녀의 전시 구성 역시 다양하고 복잡한 별들을 늘어뜨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별자리를 구성할 수 있게끔, 더불어 그녀가 굉장히 주요시 여겼던 지역연계프로그램 역시 계속해서 확장시켜서, 새로운 성좌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했어야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는 별들은 끝없는 탈주를 하며 하나의 별자리를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별자리는 계속해서 또 다른 별자리를 형성 할 것이다. 변화와 새로움, 그리고 제도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 왔던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어 아래 현실을 외면하기도 했던 예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적 함의를 보여주는 예술(비정치적 회화의 정치학6)), 여하튼 예술은 사회에 대해 다양하게 반응해왔다. 이 모든 조짐들이 하나의 희망의 신호이다. 이는 초시간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냉정한 비판, 정체된 현상들에 만족하지 않는 정신, 중요한 문제에 있어 적극적인 논쟁, 새로움과 혁신을 추구하고자 하는 창조성과 상상력 등으로 비롯되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예술의 이러한 반응을 통해서 예술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미래의 세계까지 조우하게 한다. 이처럼 창조적 예술의 근원은 ‘상상력’의 공간에 있다.

어두운 밤하늘에 제멋대로 흩어진 별들 사이에 끝없이 선을 그어 별자리를 찾아내듯 예술은 현실 속에 파편처럼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고 허물고 또 조합하기를 멈추지를 않는다. 그 지루하고 집요한 반복된 버티기의 헛된 노동 끝에서도 예기치 않게, 그러나 필연적인 우연처럼, 예술은 불가능성 속으로 가능성을 찾으러 들어선다.

 

1) 한국사회의 저변을 감싸고 있는 결핍 양상, 현대인들의 위험에 대해 비판적 진단하며, 현실 구조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 관해서는 정수복, 강양구, 김민웅, 김용민, 김경집, 문소영 외, 『사회를 말하는 사회 : 한국사회를 읽은 30개 키워드』, 북바이북, 2014, 참조.

2)1936년 “미술의 사회적 토대(social Basis of Art)”이라는 글에서 미술가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에 대한 샤피로의 주장은 1937년에 “추상미술의 본질(Nature of Abstract Art)” 글에서 변화되었다. 미술과 정치의 문제에 대한 많은 논의를 해왔던 Partisan Review 지는 그의 추상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의존해 미술이 이념적인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한 해결책으로 순수 추상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의 지식인들은 정치적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Terry A. Cooney, The Rise of the New York Intellectuals: The Partisan Review and It’s Circle, 1934-1945, Madison & London: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6, 참조.

3) 텍스트, 벽, 주제 없는 카오스(khaos ; sans murs, sans textes, sans thèmes)”의 글에서 인용된 부분은 비엔날레 전시도록을 참조했다. 필자의 개인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새로운 해안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 거라는 전시의 기대감은 컸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듯한 전시 주제와는 달리, 도록의 구성 방식(배경의 색, 지면, 읽어나가는 방식, 디자인 등), 도록의 정형화된 카테고리(특히 기후에 집착하지만, 도록 편성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는 ‘큰’ 화살표와 페이지 번호, 그리고 몇몇 이해하기 힘든 번역 문장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필자는 여전히 궁금하다. 두 권의 도록 중 첫 번째 권의 전시도록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뉘어져 있다.

1) 홍수의 징후(Sign Flood) ; 목차

2) 회귀 통화(Tropic Currency) : 인사말과 서문, 참여 작가 리스트

3) 사고의 허리케인(Thought Hurricane) : 예술 감독의 글

4) 빙하의 시간(Time Glacier) : 매개(mediation) 개념 대한 설명, 월례회, 인프라-스쿨, 포럼, 개막행사에 대한 설명

5) 기후 대공황(Climate Depression) : 외부 전시장, 전시 도면

6) 온실 감정(Greenhouse Affect) : 참여 작가 및 작품 소개

7) 오-존(Oh Zone) : 작가와의 대화

8) 예술 사이클론(Art Cyclone) : 비엔날레 펠로우

9) 천상의 비(Celestial Rain) : 2016 광주 비엔날레 큐레이터 팀

10) 은하계의 파면(Galactic Wavefront) ; 작품리스트, 후원 및 작품 대여

4)아도르노는 ‘짜임관계’ 혹은 ‘성좌’를 의미하는 konstellation 개념을 통해 자신이 해명하곶 하는 개념이 마치 금고의 자물쇠처럼 열리기를 희망한다. 이때 아도르노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이다. 즉 “대상이 처해 있는 짜임관계 속에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자체 내에 있는 과정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T.W. 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p. 242.

5) Sous la direction de Veduta Biennale de Lyon, L’Art, le territoire : art, espace public, urbain, Lyon : CERTU, 2008.

6) David and Cecile Schapiro, “Abstract Expressionism: The politics of Apolitical painting”, Fracis Frascina (ed.), Pollock and After: The Critical Debate, Routedge, 2001, pp. 181-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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