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Camus, Albert 1913~1960 -
2016년의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나는 작가 이인성의 전시를 마주했다. 몇 번의 만남으로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그 자신의 인생 여정이 작업 활동의 원동력이자 작품의 주제에 관한 주요한 방향을 잡아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의 10여 년간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자. 우리는 곧 그의 화면이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현실적인 풍경과 상상의 풍경, 환영의 성(城), 밝은 주황색 점(혹은 공), 상황과 다른 인물들의 피부색과 의상 등의 회화 장치들을 배치하면서 그는 새로운 생명력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인물의 형상 혹은 색채를 ‘가공시키고’, ‘변형시키는’ 장치들, 현실과 비현실적인(경험 속, 기억 속 혹은 심리적인) 공간의 구축, 화면 속 ‘점’ 등을 통해 보여 지는 이인성의 ‘부조리의 화면’은 화가 자신에게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조용한 반향을 일으킨다. ‘묘사되는 것들’과 ‘설명되는 것들’을 조화시켜 구축된 세계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그는 현대인들의 실존적 삶을 그려나간다.
거칠고 차가운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섬세하고 시적인 듯한 문학적 구성을 해나가는 그의 세계는 한 편의 소설을 보여주는 듯하다. 삶을 직시하고자 하는 의식 속에서, 세계 밖으로의 도피로 인도하는 유희의 과정 속에서, 연출된 혹은 필요에 의한 연극적인 상황들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순간을 포착하며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 인물들의 궤적을 그려나간다. 작가 스스로는 적게 말하며, 잔잔한 침묵을 느끼게끔 하는 인물들의 존재방식을 통해 보여 지는 ‘부조리’의 단면들은 우리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이인성의 작품 세계 속의 인간들과 대면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그의 미묘한 인물들이 갖는 갖가지 모습들을 예증하고 그들 스스로가 발현시키는 체험적인 상황들과 정신적인 공감을 이루게 될 것이다.
1. 부조리의 벽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의 감정
자신의 부조리를 직시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매일매일 그 순간을 살아가는 시지프의 모습을 통해 알베르 까뮈는 세계에 대해 반항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 그것은 갑자기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인간이 물음을 갖는 순간, 오히려 주변의 모든 것은 권태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일상의 판에 박힌 현실 속에서, 인간이 권태를 인식하는 순간, 곧 의식 운동이 시작된다. 의식을 차리는 순간, 인간의 정신은 깨어나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렇듯, 인간은 세계의 답답함과 애매함과 부조리를 설명해 줄 명쾌한 해답을 얻기 위해 사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문득, 푸른 하늘의 구름, 차가운 밤하늘의 별빛, 콧등 위로 스치는 바람의 흐름을 깨닫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몸 안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조차 낯설었던 그 순간 더 깊은 부조리가 시작된다. 우리 자신의 경우에도 이러한 거울과 같은 ‘또 다른 자아’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이러한 모순과 애매한 세계의 답답함에 몸부림치지만 실제 생활은 별반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인간은 한계가 있는 자유, 미래가 없는 반항,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안에서 괴로워한다. 세계가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인간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 스스로가 부조리한 상황이 되는 것은 ‘자아’에게도 해당된다. 부조리한 인간은 하루하루 ‘광채 없는’ 삶과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한편으로는 순응하는 두 개의 상황이 부조리한 인간에게 열려있다. 특히 인간은 의식적으로 삶을 이어가면서 반항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이 도전해 볼 만한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 존재는 현재와 현재의 연속 안에서 끊임없이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살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에게 계속되는 ‘창조’적인 태도는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 즉 자기의 존재 양식에 대한 집요한 반항을 시도하고 노력이 쓸모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끈기 있게 계속 노력하는 자세이다. 이 모든 과정이, 까뮈가 말했던 것처럼, 시지프의 모습에 투영된다. 이는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실존론적 대답이었다.
이러한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 세계 속에서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어떻게 서든지 반응하며 삶을 창조해 나간다. 이러한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혼미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이인성은 자신의 삶을 교차시킨다. <표출>(2009)과 <해소>(2009)의 작품에서처럼, 그는 부조리의 벽을 마주하는 순간의 인간의 감정, 즉 부조리의 세계에서 버티면서 울부짖고 호소하는 인간을 묘사한다. 특히 2000년 후반의 작품들에 드러나는 ‘개인’ – 남성 혹은 여성 – 은 자기 반영의 한 형태로 ‘거칠게’ 묘사되었다. 이인성 작가가 20대 중반 이후에 그리기 시작한 이러한 인물들은 자신의 청춘의 시대를 대변하는 듯하다.1)
청춘은 ‘의식적으로’ 세상과 처음 대면하는 동시에 자
기 자신과도 만나는 시기이다. 비합리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청춘들은 경쟁에 대한 불안감, 기회에 대한 박탈, 정해진 삶에 대한 사회적 강요, 강요를 이행함에도 불구하고 확실치 않은 보상 등으로 인한 상대적 허탈감을 느낀다. 인식이 불가능할 정도로 반복되는 생활, 허무와 절망만이 유일한 현실로 보이는 듯한 이러한 황폐한 현실 속에서 청춘들은 ‘질문’을 갖는다. ‘사회가 이러는데 우리(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이러한 질문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사회’에게도 던져진다. 황폐한 사막 속의 경험들 속에서도 청춘들은 적어도 행복과 합리의 욕구를 찾는다.
세계의 비합리성에 대한 침묵의 대면 속에서 인간 감정의 호소가 꿈틀댄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세계 안에서 인간은 노력한다. 인간들은 이러한 불균형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 ‘부조리’의 순환에 끊임없이 매달린다. 끊임없는 의식과 반항, 그리고 삶에 직면하는 자유를 통해 인간은 황폐한 현실을 삶의 법칙으로 바꿔놓는다. 즉, 인간은 삶의 가치를 회복하며 삶의 의미, 즉 자유를 찾는다. 그리고 다시 반항한다. 이 부조리한 세계의 장치들 – 아이러니 상황 – 은 작가 이인성의 고민 속에 드러난다.
<아지트-G>(2008)(그림1)는 붉은 피부색을 띠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의 얼굴은 박수치는 손과 달리 무표정이거나 심리를 알 수 없도록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았다. 얼굴의 섬세한 표정묘사가 배제된 채, 흐리고, 모호하고, 혹은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는 얼굴을 통해 작가는 다수의 불안한 심리와 허무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특히 현실적인 색을 묘사하지 않고, 작가가 ‘선택한’ 색과 단순화된 터치, 그리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장치들은(예를 들어 텐트 속 인물 혹은 나무 심는 사람의 검은색 정장) 상징성이 배가된 화면 연출로 나아간다. 이렇듯, 실제적인 방법을 통해 아무런 환상도 주지 않지만, 불필요한 감정의 폭력은 배제시키고, 열정적이지만 절제된 묘사를 통해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고민들을 묘사하고자 했던 이인성의 고민은 2013년의 <Hisdy> 개인전에서 폭발적으로 두드러졌다.
작가 개인의 삶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이인성은 점차 ‘가공되고’, ‘변형된’ 인물들을 창조하면서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그의 인물들은 점차 ‘특정한’ 세대나 ‘규정된’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초기 작품 시기의 <아지트> 시리즈와 <나무 심는 사람들> 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장치들’이 추가되면서 더욱 은유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이 직면하는 상황을 연출한 이인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바라보는 ‘자신의 삶’과 그러한 관객 스스로가 직면하는 ‘사회(세계)’에 대한 의식을 교차시키는 다양한 ‘의문’을 갖게끔 한다. 이인성의 인물들은 사막 같은 황폐한 폐허의 한 복판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그림1 이인성, <아지트-G>, 2008, 53x43cm, Oil on canvas, Ⓒ이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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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재를 깨닫는 순간, 실존적인 인간에 대한 묘사 방법
이인성은 그의 세계 속 인물들을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묘사한다. 전자의 방법과 달리 후자의 방식은 우리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러한 솟구치는 감정 속에서 우리를 그의 화면(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소설의 창조 방식처럼, 그의 작품 역시 부조리의 징후들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교묘한 방식으로 구성된 인물 그 자체의 애매함,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어둡지만 순수한 작품을 형성한다. 그의 세계가 확실하거나 명료하다면, 어쩌면 오히려 그러한 인물들과 세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설명적 사고가 끝나는 곳에서 그의 표현이 시작된다. 그의 작품 속 공간은 또 하나의 세계이다.
특히 <Hisdy>전시에서 그의 작품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물이 겪는 심리적 굴곡과 경험 - 고독, 욕망, 시기, 질투, 절망, 불안, 혼란, 외로움 등 - 이 주요 주제로 등장했다. 그의 인간들은 혼자라는 고독 속에서, 시기와 질투, 미움의 복잡한 심리 속에서 자신들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성장을 보여줬다. 문학적인 구성을 자아내는 이인성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초기 작품부터 계속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역설들을 하나씩 열거하고 모순적인 시각들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감정의 묘사는 인물의 형상 – 특히 얼굴 – 을 무너뜨리는 방법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2차원적인 화면에 얼굴을 짓누르거나, 절반만 묘사하거나, 점차 사라지는 면들을 구성한다. 그의 미완성되고 짓눌린 얼굴은 이러한 부조리의 인간들을 묘사한다. 그의 세계 속 인간들은 무표정 혹은 ‘텅 빈’ 얼굴의 묘사를 통해, 그리고 외롭게 서 있는 인물 ‘하나’를 통해, 그리고 ‘무리’ 속 개인을 통해 묘사된다. 그의 인간들은 자아 속(內), 군중 속, 세상 속 인간들이다. 감정의 ‘직접적인’ 표현은 점차 ‘절제’되고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됨으로써, 그 자체로 ‘애매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이인성은 인물들을 필요한 만큼 묘사하며, 그러한 인물의 완성을 위해 오히려 삭제하고 방치한다. 인물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지만, 육체의 간결한 형태 속 불안한 형상들은 강한 울림을 내포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형상과 더불어 이인성에게 있어 ‘색’ 또한 심리적인 것이다. 그의 색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묘사된다. 즉, 무관심한 듯 섬세한 표현, 거칠고 차가운 색과 대비되게 이인성은 밝고 튀는 형광색을 사용한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그리고 군중 들 속의 자신, 더 나아가 세계 속에서 느끼는 소외라는 인간의 낯선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그러한 부조리에 반항하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 더 나아가 사회 속 개인의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살아 있다는 존재의 깨달음과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식과 반항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러니컬한 색은 주요 기제로 작동한다.
또한 이인성은 부조리한 색들의 대비처럼 현실과 상상의 공간 역시 중첩시킨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의 장면처럼, 작가는 현실과 꿈의 이중성, 꿈과 같은 공간의 현실성을 재현한다. 이러한 세계는 특히 2015년의 롯데갤러리에서 선보였던 개인전 <공(空)[:empty]>의 작품들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신기루>(2015)나 <숲>(2015)에 나타나는 흐물흐물한 성(chateau)은 인간 개개인의 ‘이루고자’ 하는 목표이자 욕망과 같은 존재이다. 황폐한 사막과 같은 설경(雪景), 붉은 색, 검은색, 흰색과 하늘색 등으로 채색된 인간들이 곧 사라질 듯 하지만 축제를 즐기는 듯한 모습, 쏟아져 나와 있는 주황색 점들(혹은 공),2) 차가운 푸른색의 기운 등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비현실적인 대상이지만 현실적일 수 있고, 가능할 것 같은 대상이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인물의 자연스러움과 기이함, 일상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경험된 이야기와 상상의 이야기, 실제 색과 가공된 색, 삶과 현실, 부조리와 논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의 작품 세계의 특유의 울림과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그의 ‘부조리한’ 화면은 2012년부터 드러나고 있는 ‘공’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 그가 그려 놓은 주황색 공들은 존재하지만 동시에 ‘빈’, ‘상상의’, ‘허구적인’ 것이다. 또한 ‘공’은 곧 ‘의문’이다. 공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며 불완전한 존재라고 인식하게끔 해주며, 세계 ‘내’ 존재 할 수도 있고, 세계 너머(상상의 공간)로 나아갈 수 있게끔 해주는 매개 장치이다. 어쩌면 이러한 공은 관객 스스로가 투영할 수 있는 ‘시지프’와 같은 것일 것이다.
3. 부조리의 간극을 메꾸는 매개적 장치, 공
<장님과 징검다리>, <신기루>, <보물찾기>, <숲> 등에 보여 지는 풍경은 일종의 환영 혹은 유토피아/디스토피아의 공간이자 실재하는 삶을 역설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 놓여 있는 공은 상징과 은유의 매개적 장치이다. 공은 “현실과 가상을 이어주는 역할이며 우리가 삶 속에서 추구하는 어떤 것을 상징”한다고 이인성은 언급했다.
“화면에 나타나는 주황색 점은 그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용적으로 주황색 점은 개개인이 추구 하고자 하는 가치관이나 욕망과 같은 삶의 포인트나 목표로서 이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지길 바란다. 형식적으로는 화면 안에서 집중하게 할 수 있는(의문점을 유발하는) 장치이자 한편으로 화면을 읽을 때 시선의 방향을 유도하게 하며 각기 달라 보일 수 있는 작업과 작업사이의 연결고리로서 사용되어진다. 그렇기에 화면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대부분 주황색 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 작가노트 중에서-
부조리한 세계의 매개물로서 묘사된 공은 우리의 시선이나 내용을 분리시킴과 동시에 다른 면들(보여 지지 않는 것들, 즉 의식 혹은 의문 등을 유발시키는)을 연결해 주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혼자 하는 테니스> 시리즈는 이러한 ‘공’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혼자 하는 테니스>(2012)(그림2)의 인물은 무반성한 삶의 관성, 즉 ‘습관’처럼 공을 친다. 우리는 광채 없는 무의미한 삶 속에서 반복적인 행위를 한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인의 시선에 의한 삶을 살아가던 수동적인 삶의 주인들은 단지 ‘현실을 걷는 것’ 뿐이다. 이러한 일의 반복의 과정 속에서 문득 ‘반성’의 ‘순간’이 온다. 즉, 자신의 일상적 삶을 되비춰 보는 ‘의식’이 개입한다.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3)의 깨달음이 바로 의식이 촉발되는 순간이다. 권태로움과 낯설음에 대한 감정, 의문, 의식이 바로 방향 전환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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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이인성, <혼자 하는 테니스>, 2012, 60x50cm, acrylic on canvas, Ⓒ이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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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혼자 하는 테니스>에서 홀로 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반복적인 공을 친다. 그러나 그가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유’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만 했던 인간은 드디어 ‘공’ 하나를 벽 너머로 넘긴다. <소통>(2015)처럼, 공 하나를 ‘던진’ 인간은 벽 너머의 공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공’을 던지는 행위를 통해 자기의 공간 너머 속 인물들과 혹은 자기 자신과 소통을 시도한다. 반복적인 습관적인 현실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의식은 자기 스스로에게서도,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도 시작된다. ‘공’ 하나를 던짐으로써 나타나는 ‘반항’은 그 너머의 공간 속 다른 타자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맞은편에서 던져진 공>(2013, 그림3). 참된 삶의 기준을 정하고 개척할 수 있는 고민은 ‘공’을 통해(던짐으로써) 의식의 단계를 넘어서 행동의 표출이자, ‘반항’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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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이인성, <맞은편에서 던져진 공>, 2013, 162x260 Acrylic on canvas, Ⓒ이인성
이렇듯, 이인성은 인간이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을 설정한다.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나타나는 개인적인 행동은 ‘자아 내 자아’의 고민에서 뿐만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있는 상황 혹은 세계 속에서의 자아를 발견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삶보다 현실을 택한 타자들이 정해놓은 시선 위를 ‘불안하게’ 걷고 있는 징검다리 위의 인간처럼, 이인성의 인물들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며, 재-현된다. 이에 이인성은 그의 화면에 복수의 인물들을 제시한다. 여전히 그의 화면 속에는 자아의 낯섦, 타자의 낯섦, 세계의 낯섦이 묘사된다. 그의 인물들은 ‘부조리의 공간’에 항상 공존한다. 빠져나오는 것과 그곳에 버티고자 하는 것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까뮈가 ‘자살’과 ‘희망’의 관계를 통해 논의했다면, 이인성은 ‘희망’, 즉 현실세계 속에서의 ‘진정한 삶’과 ‘현실적인 것들’ 속에 직면해 있다.5) 삶과 현실의 공간은 이인성의 세계에서 실제적인 공간과 상상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관객은 ‘하나의’ 공 혹은 ‘수많은’ 공들로 인해, 그리고 비현실적인 풍경을 통해 자신의 세계 속으로 잠입한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부조리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아이러니한 상황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드러나는 세계에 직면한 관객은 각자의 요동치는 폭발음과 같은 감정과 냉철한 사유를 통해 이러한 상황들에 저항한다. 이러한 저항과 의식을 통해 우리는 부조리의 세계에 대면하여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12월, 리채 갤러리에서 열린 이인성의 <Histopia>(2016) 개인전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의 부조리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이인성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저마다의 삶을 그려나간다. 그가 건네는 이야기, 새로운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묘사된 장치들, 부조리한 세계 속 인간들, 그리고 그들을 마주하게끔 하는 공들의 매개 속에서 우리들 역시 삶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대표적으로 <나무 심는 사람들>(2016)(그림4)은 복합적인 플롯(plot)을 형성하는 듯하다. 작가는 작품 속 인물들에 본인 자신을 대비시키며 ‘새롭게’ 구성된 인물들로 나아간다. 파생된 인물들은 다른 사건들을 조합하며 재구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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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이인성, <나무 심는 사람들>, 2016,162x130cm, 캔버스 위 아크릴, Ⓒ이인성
그림 중앙의 두 인물은 동일한 듯 다른 형태들 – 한 사람은 양복을 입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작업복을 입고 있다 – 로 묘사되어 있다. 이 두 인물에 대해 작가는 “삶의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갈등하는 작가의 내면에서 출발”하였다고 설명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공을 심도록 유도하고 있고, 작업복을 입은 사람은 공을 삽으로 심고 있지만, 부자연스러우면서 수동적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L’Angelus>(1857~59)에서처럼 오른쪽 화면의 두 인물들은 그러한 결과물(수확물)들에 기도를 하는 듯 표현되었다. 그리고 왼쪽의 인물은 끊임없이 공들을 퍼다 나르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검은 개와 함께 이들을 어두운 숲 속에 배치했다. 화면을 ‘재’구성하고, ‘재’생산 하는 방식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우리의 삶 역시 끊임없이 ‘재’성찰하기를 요구한다.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억이나 심리상태가 반영된 현실에서 마주하는 가시적인 풍경을 토대로 이인성의 ‘내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현대의 삶에 깃든 당면한 문제들을 통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아’의 갈등을 언급한다. 동시에 작가는 작가 자신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만난’ 인물(자아를 포함한) 뿐만 아니라, ‘부조리의 세계’에 직면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거친’ 색채를 통해 감정의 표현을 전개시켰던 초기의 작품들과 달리 ‘재구성된’ 공간 및 색채, 인물들의 상황을 통해 연출되면서 발전되었다.
우리를 짓누름과 동시에 공허하고 출구 없는 듯한 신기루의 세계 속에서도 희망이 생기게 되는 기묘한 묘약과 같은 분위기는 무엇인가? 마치 까뮈가 20대 후반에 집필했던 『이방인』에서 강렬한 불안과 냉소적인 어조, 그리고 사막과 같은 황폐한 분위기를 유발시켰다면, 『최초의 인간』에서는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삶 자체에 대한 사랑과 온화함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된 것처럼, 이인성은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도 삶에 대한 애착을 내비친다. 푸른색의 차가운 공기 안에서 긴장감 있게 절제된 인물의 표현과 비틀거리는 형체들을 통해 이인성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3인칭의 인물들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나’를 대변할 수 있는 1인칭의 언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의식을 일깨우는 강인한 정신력의 의지와 반항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자유를 느낀다. 그리하여 인간은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방향 지워 나간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과정을 이인성의 작품들 속에서 대면한다.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옮겨진 그의 작품은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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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주제는 계속해서 <Self Camera>(2009), <Terrorist>(2010), <Pain>(2013), <In the Room>(2015), 그리고 <Agit>(2007), <Agit-mask>(2011), <Agit-Bed>(2011)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아지트> 시리즈는 점차 새로운 구성 요소들을 추가하며 변화, 발전한다.
2)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인 밝은 주황색 형상들은 형태면에서 ‘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의미론의 측면에서 ‘공’이라 지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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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 p. 19.
4) <신기루와 공>(2015)에서의 ‘공’은 두 세계 – 현실의 세계와 물속에 비쳐진 상상의 세계 – 속에서 움틀 대는 인간의 ‘호기심’, ‘의문’ 혹은 ‘매개적 장치’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균형 잡기>(2012)나 <장님과 징검다리>(2015) 등에서 보여 지는 이러한 공들은 근본적인 재반성을 유추시키고, 삶과 경험을 쌓아가는 관객 각자의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온다. 타협의 거부와 삶에 대한 진실을 통해 내일이 없는 현재의 가득함 속에서도 우리들은 삶을 창조한다. 이러한 ‘공’의 특성들은 이번 <Histopia> 전시에서 다양하게 제시된다. 예를 들어, 고정적인 인물(동상)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공’을 ‘던진다.’ 무반성적인 습관 혹은 매번 동일한 상황 속에서도 명철한 의식을 통해 부조리를 발견한 인간은 부조리의 세계에 대면하여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삶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까뮈는 반항, 자유, 열정을 통해 부조리에 도전한다.
5) 알베르 까뮈, op. cit., p.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