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에일 듯한 추위에 코끝의 시린 바람, 발아래 땅속으로부터 전해지는 떨어진 낙엽의 냄새와 메마른 나뭇가지의 정취 속에서도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는 꽤 운치 있다. 지붕 위 한편에 저물어가는 햇살이 못내 아쉬운 듯, 남은 빛을 내리 쬐는 곳에서 나는 임현채 작가가 건네는 따스한 차 한 잔을 마신다. 적셔오는 차 한 모금, 나근나근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지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모래성>(2016)(圖2)으로 인해 나의 유년시절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 작은 마들렌 과자를 통해 소년 시절을 환기시켰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7)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작품 속 사물들과 그것이 놓인 장소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제시한 장소와 실재적 대상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흐르는 초(超)시간적 감각을 토대로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러한 경험이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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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전경, 양림동 230-1,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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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임현채, <모래성>, 2016, 112.1x145cm, acrylic on canvas, Ⓒ 임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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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채 작가는 작품에 선택한 대상을 상상해서 작업하는 것보다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재현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녀는 마음에 비친 자연 세계, 추억이 담긴 장소,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진 미세하고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와 ‘관련된’ 사물들을 묘사한다. 그녀의 사물들은 마치 그녀의 섬세한 감정을 정교한 렌즈로 들여다 본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사물들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틈 속에서 조금씩 점이 찍히고, 차츰 복잡한 전체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그녀가 사물의 크기를 확대시키거나, 작게 묘사된 것들을 유심히 보게 하거나, 혹은 멀리 있는 한 점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작가는 현실 세계 혹은 소환된 추억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이라는 관찰 기제를 통해 이야기를 응축시켜 우리를 체험하게 한다. 특히 이러한 방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심리를 매우 정적이고 환기적(喚起的)인 방식을 사용해서 우리의 무의식적 기억을 표면으로 끌어내고 있다. 작가는 관객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관찰을 토대로 눈앞에 볼 수 없었던 자기 속의 무언가를 보게 해 주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이러한 의식과 기억의 흐름을 쫓는 임현채의 작업은 본격적으로 2010년 <Be present together!> 전시에서 나타난다. 각각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인간 형상, 아이스크림, 사과 찌꺼기, 열매가 맺은 나뭇가지, 연필, 주사위 퍼즐, 라디오 등을 볼 수 있다. 작지만 명확한 대상물들은 각각의 작품들에서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그러한 오브제가 놓인 공간 역시 구체적인 장소(담벼락, 운동장, 언덕 너머, 지붕 위, 놀이터 등)를 환기시킨다. 추억을 환기시키는 이러한 오브제들은 ‘공간’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간과 인간, 혹은 사물들의 관계 속에서 ‘공간’은 재해석되기 때문이다.1) 공간은 작가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동경의 방향을 상징하게 되는데, 작품 속 개인적 공간은 현재의 관객의 공간과 교차하며 융합해 가는 형태로 바뀐다.
2011년 그녀의 4번째 개인 전시 <If I go there>에서 ‘공간’에 대한 고민은 더욱 발전된다. 이 전시에서 그녀는 인간 형상이 사라지고, 장소와 낡은 물건들의 더욱 밀접한 관계를 선보임으로써, 관객에게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는 관객들에게 ‘되찾은 시간’을 부여하며 고독, 고통, 혼돈의 세계에서 비취는 한 가닥 빛으로 추억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그녀는 추억의 무의식적 내면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녀는 선택된 오브제와 인간 형상, 그리고 장소를 통해 의식 흐름의 발전 단계를 더듬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인간 심리의 내면 탐구와 경험의 보편성을 그려진 사물에 편입시키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묘사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시간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특히 그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이끼들은 시간의 흐름, 생성, 지나간 흔적들 등을 의도하며 제시된 오브제들과 함께 관객 각자의 이야기가 피어오를 수 있도록 한다. 더불어 자연의 색에 기반을 두지만, 현대적 감각으로 이루어진 색채는 추억과 현재의 넘나듦을 유도한다.
과거와 현재의 상호침투를 이루는 이러한 장치들은 우리를 과거 속으로 안내한다. 즉, 그녀의 작품을 통해 관객은 작가가 제시했던 과거 시골의 공간을 더듬어가며 특정한 장소를 찾아 나설 수 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장소는 성장해 버린 우리의 모습을 통해 비춰진다. 물론 과거와 현재는 다르며, 과거에 대한 간절한 추구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과정 속에서 추억은 우리 의식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15-20번이 넘게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하는 제소칠은 그려진 대상들(장소와 오브제들) 이외의 공간(화면의 여백)에 회벽의 느낌을 모색한다. 화면의 여백 역시 기억을 소환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응축이며, 그러한 기억은 그녀의 화폭 속에 사물들의 과거 회상 요소들을 통해 공간을 펼쳐나가기 때문이다. 특히 세밀한 붓 터치는 그녀 특유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녀가 집중한 시간만큼 우리는 추억의 시간으로 몰입한다. 작품 속 인물 형상은 사라졌지만, 계속해서 장소와 오브제, 그리고 인간의 관계 맺기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풍경과 장소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The Place>(2014) 전시에서 전시장은 하나의 캔버스가 되었다. 익숙한 공간에서의 낯선 것들과의 추억놀이는 흔적을 생성하며, 그녀의 화폭에 등장한 이끼들처럼 시간과 회상의 공간을 형성한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작업들을 통해 그녀는 작품을 그리는 행위로써, 그리고 경험함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 삶과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장 안의 감각적 체험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찰나 속에 불변하는 ‘그 무엇’을 느끼게 함으로써, 과거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 사소한 사물이나 단서로 시간여행을 떠났던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그녀는 예술을 경유해서 지나간 것들을 소환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더군다나 프루스트의 작품은 과거와 시간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장소에 관한 이야기도 하다. 프루스트는 사람과 장소의 관계를 놀라운 방식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장소가 사람들의 개성을 지니게 되고, 사람들도 장소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통해 개성이나 특징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사람과 장소가 서로 섞여 들어간다. 프루스트는 오직 자신의 삶을 형성했던 관련 장소들을 다시 찾아감으로써 자신의 삶과 지난 시간을 파악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양한 장소들과 그 장소들과 함께 등장했던 사람들을 환기하고 탐색하는 작업인 것이다. 2004년의 <낯선이와 빵을 먹어본 적 있는가> 전시 이래, 그녀는 계속해서 대중과의 소통과 공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녀는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장소의 삶으로 보고, 자아 정체성을 장소에서 발견되는 정체성의 문제로 본다. 즉, 그녀는 장소를 익명적 공간이 아닌, 각각의 개별적인 인간들과 의미 연관을 맺고 있는 의식적 공간으로 보는 듯하다.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마르셀의 삶은 과거를 구성하는 사람들, 장소, 사건들의 복원을 통해 현재와 긴밀히 결합되고 미래를 향해 열리면서 재발견된다. 마들렌의 경험 자체가 한 순간에 일어난 시간, 즉 일단 잃어버렸지만, 잠깐이라도 다시 얻은 시간의 경험이다. 그렇게 해서 일회적으로 ‘복원된 시간’은 단순히 과거(la passé)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le temps) 자체를 포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스트는 ‘지나간 시간’이 아닌 ‘잃어버린 시간’을 추적한다. 마찬가지로 임현채의 작품에서 일어난 일은 하나의 삶이나 삶의 구체적인 부분을 포괄하면서 중요한 모든 경험의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서 시간의 경험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의 체현(l’incarnation)’은 장소의 형태를 취하고, 그 안에서 하나의 삶이 형성되고 특정 장소와 사물들에 정체성과 형태가 부여된다. 장소 안에서의 과거를 포괄하는 시간의 종합을 통해 작가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인간)의 삶 또한 복원된다.
다양한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속에 여지를 만들고 그녀는 그 속에 모든 것을 포용하고자 한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그녀가 깨닫게 되는 것은 언제나 장소의 갑작스럽고 일회적일 수 있는 ‘회상’에서 경험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삶의 특성이다. 장소는 대체로 인간의 사고, 경험, 행위 등의 사실에서 도출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거대하거나 작은 형태로 드러난 사물들의 형태로 감정을 드러내고, 공간과 대상이 서로 연결된 이미지들은 서로가 서로를 부각시키며 스스로를 구성한다. 그녀의 작품이 완성되면서 그 총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그녀의 작품 속 시간은 멈춰있는 듯하다. 그 이미지들이 한데 모이면 하나의 장소를 장식하고 그려진 오브제들이 공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기억으로 가득한 그녀의 특정 장소들에서 시간은 공간의 형태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핵심은 장소 자체의 구조의 윤곽을 그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형성에서 장소의 역할에, 그리고 자아와 타자, 자아와 객체가 조우하는 세계를 확립하는 데 있다.
인간과 환경, 인간의 정체성과 장소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 작가는 이면에 특정한 목적이 있는 오브제들로 전략적인 개념들을 다뤘다. 불안정한 공간을 ‘고정’시키지만, 개개인의 추억을 흔들며 기억을 소환하는 방법은 더욱 철학적으로 변모된다. 특히 갤러리 숨에서 전시했던 <The Place-memories>(2016.03.28.~04.09)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전시한 <The Place-기억의 이면(裏面)>(2016.12.05.12.11)이 이러한 고민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언급했던 것처럼, 공간은 “생명력을 잃은 곳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된 공간은 화면으로 옮겨져 새로운 공간으로 재구성된다.”2) 이전의 단일하고 정적인 공간들과 사물들은 점차 불안정하고 복합적인 메타포를 구성한다. 사물들과 장소를 통해 그녀는 장소와 인간의 관계를 더욱 끄집어낸다.
자아가 살고 있는 장소들을 탐사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공간의 시학 (La Poétique de l’espace』(1958)에서도 엿보인다. 바슐라르는 장소에 대한 애착(토포필리아, topophilia)과 장소에 대한 분석(토포어낼리시스, topoanalysis)을 이야기한다. 바슐라르의 경우, 정신적인 삶은 인류가 살아가는 장소와 공간들 안에서 모습을 갖추고 그런 장소들은 인간의 기억, 감정, 사고를 형성하며 영향을 끼친다. 내적 공간이 외면화되고 외적 공간이 내부로 들어오면서, 내부와 외부의 공간들 혹은 정신과 세계는 서로의 모습으로 변해간다.3) 우리 ‘안’의 삶의 요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외적 공간이나 장소에서 발견되는 반면, 바로 그 공간과 장소들 자체가 우리 ‘안으로’ 통합된다. 그녀의 <장소-기억>과 <장소-기억의 이면> 전시는 장소에 대한 그러한 탐색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바슐라르가 인간의 삶과 정신을 이해하는 데에서 장소와 공간이 담당하는 역할을 폭넓게 연구했던 것처럼, 장소의 이해를 통해 그녀는 인간의 존재, 특히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이해하는 데 이른다. 그녀는 넓은 의미로서 ‘경험’의 가능성에, 그리고 경험을 이해해야 할 틀로서 장소에 집중하면서 장소의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일에 집중한다.
작가가 세심하게 다루었던 장소의 이러한 정체성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있어 장소가 언제나 어떤 장소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저 시공간적 위치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 장소 그 자체에 부여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내용이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장소의 정체성과 자아의 관계에서 관객에게 장소가 지니는 의의를 새롭게 내비치는 관심은 물론이고 장소의 개념을 재고하게 한다. 그녀에게 장소는 자아의 물질적 구현이다. 그러나 장소가 공간과 시간에 연결되는 방식에 관한 것 너머의 물질성은 그러한 시간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따라서 그녀가 장소에 주목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세계 안에 자리 잡는다는 것의 근본적 복잡성, 불확정성, 의문성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허약성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떤 형태이든 삶의 가능성에 반드시 필요한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The Place>(2016)(圖3)에서 라디오에 서린 이끼, 그리고
밥상에 앉아 맛있게 밥을 먹는 어린 소녀가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회백색의 공간 속 거대한 라디오, 상대적으로 작은 소녀의 해맑은 표정, 시간의 흔적을 나타내는 듯하지만, 동시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이끼가 있다. 이 화면에서 우리는 ‘특정’ 장소를 상기시킬 수 없다. 그러나 오브제들의 상대적 크기, 이끼의 메타포 혹은 공간 속 오브제들이 야기한 어떤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장소와 사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떠올린다. 즉, 어린 시절 그녀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처럼, 인간의 삶이 작품 속 공간(세계)에 결합된 것이다.
그러한 정체성은 그녀가 선보인 <모래성>(2016)(圖2)처럼, 앙상한 뼈대만 남은 비닐하우스 안에 상대적으로 커진 오브제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비닐하우스는 연약한 비닐과 가느다란 대에 의지해 지어졌다. 그곳은 잡다한 장난감이나 사물들로 엮어 만든 보금자리이다. 비닐하우스 안의 대상들은 보금자리에 둥지를 트는 새들처럼 바깥으로부터 떨어져 그 속에서 안락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한 연약한 골대와 ‘비닐’이라는 재질은 시간이 지나 찢기고, 얼어붙을 듯한 매서운 바람이 불기라고 한다면 그 곳의 대상들의 따뜻했던 안락함은 황폐해진다. 시간이 지나 찢기고, 황량한 곳으로 변해버린 그 공간은 바깥공기 탓에 냉랭한 기운이 맴돈다. 찢
겨진 비닐의 움직임 때문에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흔적으로 테두리가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폐허의 공간 속 밝은 이끼들의 따스함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냉대한 분위기와 삭막한 감정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 흘러내리는 색채와 일렁이며 찢겨진 이러한 비닐하우스의 공간은 더욱 복합적이고 심리적인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기억이 장소에 구속된다는 것은 개인의 주관성 자체가 필연적으로 장소 안에 놓이고, 공간화되고 체현된 활동 안에 놓이는 방식의 기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들을 발견하는 장소들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을 자기 정체성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사람들 혹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과 조우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가 살았거나 강한 기억이나 애착을 가진 특정 장소들을 언급함으로써 규정되는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의미가 장소의 의미와 묶여 있는 것처럼, 기억 역시 그렇다. 특히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기억은 마찬가지로 장소와 위치에 묶여 있다. 더욱이, 기억이 중요한 측면에서 서사성과 묶여 있기 때문에, 기억 과 장소의 연결은 장소와 서사의 평행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래서 과거와 연결된 과거의 장소와 사물 역시 더 중요해진다. 일단 주관성이 체현되고 능동적인 공간성 및 특정 장소들과 묶이는 방식을 이해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프루스트의 말, 즉 “장소에는 개인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Il y a quelques choses d’individuel dans le lieux.)”4)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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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
그림4 <The place>, 2016,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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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현채는 양림동의 나무와 자연의 공간, 울퉁불퉁한 길을 걸으며 갑자기 말할 수 없는 본인이 살았던 고향을 떠오르며 작업했을 것이다. 작업이 한창일 때, 그녀는 바스락 거리는 낙엽 잎, 공사가 한창인 골목, 풀잎이 왕성한 나뭇가지들 등이 있는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창작소에 거주하였다. 지난 8개월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드로잉 40점을 통해 나는 그녀가 포근한 자연과 함께 살아왔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이 무너져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 있는 곳, 변두리의 후미진 곳, 골목길, 무의미해 보이는 장소들을 관찰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체험한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즉,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경험이 녹아든 화폭 속 변형된 공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형성한다. 공간 속 사물들은 각각의 기억을 불러오는 도구가 된다. 낙엽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잎들 사이의 울림은 가까이에 있지만, 새삼 거리를 느끼게 하며 내 마음 속에 적막하고 넓은 들판을 그려낸다. 새로운 공간, 익숙지 않은 시간, 그리고 여전히 밤의 고요처럼 적막한 그 시간 속에 그녀와 나눈 이야기가 마음속에 또렷하게 떠오른다. 작품 속 펼쳐지는 공간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멀어지고, 나의 기억과 의식이 들어간다.
작가 임현채는 장소라는 단일한 구조 안에서 공간과 시간이 결합되는 여러 방식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우리는 그녀가 장소와 인간의 정체성, 그리고 감수성의 문제에 집중하는 <장소-기억의 이면>의 전시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장소,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언어는 물리적 과정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과정들을 묘사하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 작용과 태도의 가능성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한다. 자아가 등장할 때면 언제나 다른 이의 경험을 수반한다. 자아의 경험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녀의 작품 속에 있는 ‘하나의’ 오브제들은 역설적으로 자아와 타자의 경험을 동반한다. 오브제를 대면하는 경험은 내 밖에 놓인, 그리고 공간적인 것의 영역 안/밖에 놓인 것과의 조우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든 것이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그녀의 공간과 그 속의 오브제들과 더불어 그녀의 작품 속으로 나왔다.
1) 근대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공간 인식도 어떤 의미를 갖는, 즉 공간과 구체적 사실이나 의미가 연관을 맺는 ‘장소’의 의미로 이해됐다. 그러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모든 공간이 표준적인 단위로 척도화 됨으로서 공간마다의 특별한 의미가 사라지고 넓이로만 획일화 된다. 이는 곧 시간의 공간화(선분화)와도 연결됨으로써 구체성은 사라지고 추상성만 남게 된다.
2) <The Place-기억의 이면(裏面)> 展, 2016 레지던스프로그램 지원사업 개인전, 양림동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2016.12.05.~2016.12.11., 전시 카탈로그의 작가노트 참조.
3) Gaston Bachelard, La Poétique de l'espace, Paris :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12, 참조.
4)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2』, 김희영 옮김, 20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