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리채 갤러리는 정광희(1971~ ) 작가의 《성찰 reflection》 展에서 수묵작품 7점을 한 달여 동안 선보였다. 박은지 큐레이터는 “성찰(省察)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 한국화 기초 재료를 작품의 오브제로 활용하는 수묵 추상의 실험적 작업을 지속해 온 정광희 작가의 새로운 단색화를 기획했다”1)고 언급했다. 그러나 8번의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끊임없이 형성해 가고 있는 정광희 작가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묵(墨)’의 세계를 다시 실험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갤러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맨 처음 마주하는 벽에 덩그러니 걸어져 있는 ‘작품’이 나를 불러 세운다. 고요하고 정적한 전시장에서 ‘작품’은 나를 잠시 머뭇거리게 한다. 정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작품’은 나를 끌어당겨 멈춰 서게 한다. 흰 벽에 걸려 있는 그 ‘작품’ 에서 나는 희미한 안개처럼 뿌옇게 피어오르며 자리 잡은 형상들을 발견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나를 잡아 끌어당긴 것이 바로 겹겹이 쌓인 텍스트 위에 ‘흘러가는’ 흔적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직감하게 된다. 겹겹이 쌓여 있는 장지, 그 위에 흘러가는 묵의 흔적들, 이러한 형상과 시간의 응축을 나는 어떻게 언어를 통해 발현시키고 구체화하며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이미지는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영역 너머로 우리의 사유를 이끈다. 이미지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 감동일수도 있고, 그 자체로 기다림일 수도 있으며, 그냥 그 자체로 매력일 수도 있다.
깊은 사유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감동이다. ‘작품’ 자체의 강한 울림, ‘그 다음’의 내용은 이미 그곳, 즉 ‘작품’에 있었고, 그 또한 매력이었다. 나는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 1863)가 정의한 바 있고,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 1944~2003) 역시 깨달았던 “그림의 침묵의 힘”을 본 것일까? 이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뒤흔든 묵(墨)의 흔적들, 그리고 작업의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그의 사유 방식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이미지의 한 면이 들춰지고 이어 또 다른 면이 들춰지면서 서서히 내밀함이 생긴다. 작품 속의 내밀함은 작가와의 이야기를 통한 그의 삶에서, 그리고 그의 사유의 과정에 대한 표현 방식을 통해 층층이 쌓여 있다.
우리는 그가 사유하는 과정을 표출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긴 어떤 내밀성에 근접함으로써, 그렇지만 결코 완전히 닿을 수 없는 어떤 지평선과 만나게 될 것이다. 깨달은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글로 표현하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에게 제작 시간은 곧 사유의 과정이며, 사유의 과정과 사유의 결과 사이의 시간차는 작품을 눕히고, 세우고, 거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지된 화면(이미지)은 곧 움직임, 즉, 생(生)이며, 시간의 추이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러한 시간의 추이를 살펴보며, 은은한 먹의 번짐을 통해 삶의 약동을 느낄 것이다.
2. 먹의 번짐을 통한 상생(相生)의 세계
작가의 경험과 삶에 대한 성찰이 글로 쓰여 쌓이고(積書), 쌓여진 글은 공간을 형성하면서 ‘면(面)’을 이룩한다. 그러한 ‘면’ 위에 작가는 ‘그리는 행위(墨畵)를 통해 삶을 재-고찰한다. 선과 면, 쓰기와 그리기의 화합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나는 작가가 먹의 ‘번짐’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작가는 ‘번짐’의 효과를 통해 공간의 경계를 무효화시킴으로써 서로 이어져 있는 조화로운 상태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번짐’은 먹물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면서 텍스트가 이미지로 변화되고, 이미지가 공간(面)과 조화되는 순환을 통해 화합된다. 즉, 수묵(水墨)의 효과를 통해 텍스트는 형상화되고, 형상화된 이미지들은 자유롭게 연결된다. 이러한 방식이 목적으로 삼는 것은 모든 존재와 관념들이 차이와 경계를 넘어서 조화와 순환을 이루는 통일된 세계의 구축이다. 마치 장석남 시인의 연작시 《수묵정원 9–번짐》처럼 ‘번짐’을 통해 경계와 차이가 사라지며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시인의 바람처럼 말이다.
여기서 ‘묵(墨)’은 작품 전체에서 드러나는 작가 개인의 사유와 연결되면서 대상과 자신이 한 몸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작가는 자신의 사유와 연결되는 ‘번짐’을 사용함으로써, 존재의 경계와 구분이 사라진 일체감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즉, 먹의 농담(명암)을 이용하여 작가는 자신이 기다리는 우연성의 효과를 얻게 된다. 그러한 ‘우연성’은 삶 자체를 끊임없이 성찰하지만, 삶의 방향까지 의도적으로 ‘계획’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물 흐르듯이’ 나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다. 이렇듯 작가는 인간의 성장과 결실의 과정을 내보이며, 상생(相生)이라고 하는 인간의 관계를 통해 삶의 가치 실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를 먹의 ‘번짐’을 통해 은유적으로 비춰준다.
그림1. 정광희, <무제>, 2017, 130x171cm, 한지에 수묵, ⓒ 정광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무제>(2017)(그림 1)) 먼저 작가는 한지에 텍스트를 기입한다. 한 달 여 가까이 지속된 그의 글쓰기는 차곡차곡 수많은 한지에 기록되며 합죽선 모양으로 접힌다. 그러한 한지는 장지 종이 막대에 배접하며, 과묵히 화폭을 메워나간다. 일반적으로, 심상심학(心相心學)의 특성을 지닌 서예는 고도의 숙련된 기술에 의한 점과 선의 표현 속에서 나온 일필일획을 보여주며, 그러한 결과물 속에서 행위자의 감정과 사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광희 작가는 먼저 그의 일필일획의 ‘우연성’과 ‘즉흥성’의 결과를 제시하기 전에 ‘수련’의 심오한 과정을 드러낸다. 한지 혹은 장지 속의 끊임없는 글쓰기(노자의 도덕경이나 옛 글귀, 혹은 작가의 일기)와 겹겹이 쌓아 올리는 행위를 통해 시간의 층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그렇게 모여진 텍스트들은 일정한 형상, 즉 조형성(造形性)을 이루며 모여진 ‘화폭’은 하나의 ‘장(場, 나는 이러한 공간을 ‘세계’라 지칭한다)’이 된다. 그곳에서 작가는 먹물의 농담(濃淡)과 붓을 움직이는 힘이나 속도에 따라 선과 점의 질감을 통해 일점일획의 결합을 이루어낸다. 따라서 작품은 텍스트의 행간을 통해 이미지를 사유하게 하며, 형상화된 대상은 우리를 이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선(線)이 면(面)을 구성하며, ‘쓰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가 화합(化合)되는 행위, 이러한 흔적은 “백묵(白墨)”으로 이루어진다.
작가 정광희의 글(書)이 ‘한 글자’를 통해 그의 됨됨이를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유의 방식과 표현의 과정이 작품 속에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서예는 은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 서예의 일회성은 다시 덧칠하지 않은 획 그 자체이며, 오랜 수련 끝에 행위자는 골몰히 생각해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써 내려가는 순간성과 즉흥성을 지닌다. 그러나 정광희는 삶의 시간을 보여주는 끊임없는 쓰기의 과정을 오랫동안 거치고, 그러한 시간을 말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행위를 통해 이 모든 과정을 그의 작품에 담는다. 이러한 정광희의 작업에서 우리는 현재의 삶과 사회, 시간의 경험을 응축시키는 작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에 놓인 한 획(書)은 ‘일회성’을 통한 생명의 형식이 되었다. 붓을 움직이는 방향, 속도, 압력에 의하여 표현된 그의 일점일획에는 먹의 윤갈(潤渴)이나 농담, 선의 굵기와 방향이 있을 뿐 어떤 화려한 자태나 입체감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모양은 지극히 간단하고 소박하다. 그러나 그는 표현의 과정과 사유의 방식을 드러내면서 이 형상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먹의 번짐을 통해 이룩해 낸 조화의 세계는 또한 비움-채움의 과정을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인 호흡(呼吸)과도 관련된다. 채움 혹은 소유와 관련된 ‘흡’과 비움과 관련된 ‘호’는 전후관계를 구분하기 힘들고, 이 둘의 상관관계를 통해 비로소 삶이 영속된다. <성찰(reflection)>(2017)(그림 2)에서 정광희는 비우고 채우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는 물음을 던지며 ‘존재’를 실현시킨다. 이 이상적인 과정은 작가가 ‘철저히’ 쓰고, 생각하고, 성찰했던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성장(깨달음)을 방해하는 다양한 원인들 - 인간의 얄팍한 지혜, 그러한 지혜를 통해 끝없이 비대해지는 욕망 - 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과정은 <아는 겆 잊어버리기>(2009)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랜 시간 지속되어 왔다.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그림 2. 정광희, <성찰>, 2017, 126x160cm, 한지에 수묵, ⓒ 정광희
정광희 작가는 “성찰은 완전한 침묵에 이르는 길이며 침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성이 아닌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할 때 들리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능동성이다”며 “또한 들리지 않는 소리, 침묵의 소리를 듣기 위해 멈춰 서는 의지이며 고요한 어둠속에서 맑은 심연(心淵)의 거울에 자신을 온전히 비춰보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나의 작품 그 자체에서 보여지는 먹의 번짐을 통해 세계를 ‘조화’의 이미지로 그려내고자 하는 작가의 사유는 비움의 과정이라는 삶의 태도에 관한 ‘철저한’ 자각을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먹의 실험과 백묵으로 그려내는 철학은 한 작품(<무제, 2017>(그림1)) 그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성찰>(2017)을 출발로 4개의 작품을 연결하는 방식에서 또한 엿볼 수 있다. 즉, “먹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백묵”의 단계를 통한 비움의 미학은 ‘하나의’ 작품 그 자체에서도, 그리고 ‘일련의’ 시리즈에서도 드러난다.
3. 성찰(省察), 백묵(白墨)으로 ‘그려내는’ 비움 ; 소유론적 실존에서 관계론적 존재론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작업을 위해 철저한 성찰로부터 시작한 숙고의 과정은 인간관계, 즉 삶의 과정에서 인간의 태도 및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한 파도는 다른 파도와 일렁이며 또 ‘다른’ 거대한 파도의 물결을 만들어내며 바다를 이룬다. 이처럼 정광희 작가의 선과 면의 어울림,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이룩하기 위한 철저한 사유(글쓰기와 명상)는 이러한 ‘상관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공간’은 하나의 장(場)이 되며, 땅과 하늘의 이치를 형상화하는 ‘백묵’의 세계로 진입한다. 작가는 “백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백(白)의 세계는 시원(始原)을 암시한다. 시원의 세계는 비움으로써 다가갈 수 있다.
먹(墨)은 문자이자, 학문 그 자체로 지식의 탑을 쌓는다.
이 거대한 탑을 백지(白紙)로 덮는다. 이제 나는 백묵(白墨)으로 다시 쓴다.”
(작업노트 중에서)
시원의 세계인 백(白)의 세계를 위해 그는 먹(墨)으로 시작한다. 작가의 특유의 역설(paradox)적 표현과 정신은 노자(老子)의 철학2)에서 비롯된다. 역설적 표현이나 모순관계 즉, 부정과 중복부정에 의한 이중부정의 형태로 이루어진 표현의 형식들이 노자의 철학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삶, 인간관계,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배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모순 관계를 적극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사고의 조화와 균형을 모색하고자 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조화의 방식에 대한 정광희 작가의 철학은 특히 그가 먹을 쓰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물은 그릇의 둥글고 모난 것에 따라 모양 지어지어지며, 어떤 것에도 섞인다. 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방법과 사고의 문제이지, 물은 항상 그대로다. ‘유약겸양부쟁(柔弱謙讓不爭)’의 덕을 설파했던 노자는 ‘부드러움’, ‘버드나무 가지의 유연함’을 생명의 상징으로 보며 유연함의 극치를 추구하여 자연스러운 흐름과 모든 고정된 형태를 부정하는 경지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의 덕(德)을 정광희 작가는 물의 본성을 이용한 백묵의 실험에서 실현한다.
“만물을 기르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며 다투지 않는다.”라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본성에 주목한 정광희는 먹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관계를 사유한다. 성찰을 통한 작가 자신에게 철저히 적용되었던 이러한 물음은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즉 우리 삶의 괴로움과 끊이지 않는 안과 밖의 분쟁을 큰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특히 현대 사회가 당면한 경쟁 사회의 정신적 피폐와 기술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한층 격렬해지는 생존 경쟁의 장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확립할 수 있을까? 노자는 현세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자기가 자기임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때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닌 인간은 지혜의 빛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현동(玄同, 현묘한 어울림)”에 이른 사람, 즉 자신이 뿜어내는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하며 풍진 세상(어지러움, 먼지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존재(和其光, 同其塵)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상이지만 ‘이상적인’ 사람으로 여겨버리는 현상에 대해 정광희 작가는 그러한 단계를 위해 차곡차곡 낳아가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따라서 그가 자각하는 인간의 실존은 ‘소유론적’인 단계에서 ‘관계론적’ 사유로 나아간다. 여기서 ‘존재’ 혹은 ‘존재하다(실존)’는 정태적인 명사가 아니라, 동사적인 ‘행위 하는’ 것이다.
그림 3. 비움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전시 배치: 작품은 전시장 바닥과 가깝게 걸려 있다.
작품에 비춰진 빛, 바닥에 은은히 반사된 흔적들, 그리고 작품 자체의 고요함 등을 통해 작품의 울림이 아련히 가슴으로 ‘들려온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는 먹의 번짐을 통한 조화와 관계의 미학, 먹과 글쓰기를 통한 채움과 비움의 상응, 그리고 백묵을 통한 비움의 과정을 선보이며 ‘존재’의 물음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이는 전시장 입구 오른쪽에 걸려있는 <성찰>(2017)을 시작으로 왼편으로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움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그림 3)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비움으로써 채우는 인간의 지혜를 설파했던 노자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채우려 하지 말고 빈 그릇처럼 남겨두어라”, “자기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노자의 가르침대로 정광희는 차곡차곡 쌓여 있는 ‘채움’의 과정을 통해 보이는 모든 지식과 인격 생성의 과정을 한지로 덮어버린다 : ‘백묵(白墨)’. 백묵은 비움의 단계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채움이다. 그곳, 즉 백묵의 세계에서 우리는 그가 언급했던 “보이지 않는 서예”, “쓰지 않는 서예”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작가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보인 작품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인간학에 대한 그의 성찰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실존 양식의 변화, 즉 우리 스스로 관계적 맥락을 파괴하고 존재기반을 무너뜨리는 존재론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생성과 생명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을 통해 무한대의 공간과 시간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반복 없는 ‘일획’의 서예의 특성처럼 삶의 후퇴는 없을 것이다. 삶의 여정 안에서 조화,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묵의 번짐을 통해 조화로운 세계를 구축한 그의 장(場, 세계)에서 우리는 일필(一筆)과 백묵의 흐름 속에서 약동하는 생명력을 느낄 것이다.(그림 4) 그의 작업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 변화의 주체이며, 대상임을 자각하는 것이 그것을 이루는 세계 역시도 변화할 수 있는 주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작가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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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실존 양식에서 드러나는 현대인의 존재 망각에 대해 우리는 정광희 작가의 작품의 채움과 비움의 반복적인 활동을 통해 나아가는 비움의 과정을 주목해보자. 현 세대가 비로소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빛을 발하기 위해 이 세계의 생명력을 과연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다음 세대, 즉 잠재론적 존재자들을 위해 시원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가?3)
부재와 현존의 관계를 묵의 번짐을 통해 균형 잡힌 세계를 구축하며, 그러한 세계를 다시 백묵으로 덮음으로 새롭게 쓰여진 일획을 창출했던 정광희의 작업에서 그물처럼 얽히고설킨 생(生)의 약동이 느껴진다. 이러한 은은한 감동은 우리 역시 창조적 사유를 발현시키며 생명력이 영속되는 존재론적 실존양식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서서히 번져 나간다. 유(有)와 무(無)가 서로 존재의 근거로 얽혀 있듯이, 세계 속 존재자로서 인간이 그 내재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 요구된다. 한스 요나스가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갈 토대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열심히 탐구하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언급했듯이, 현대인들은 풍요 속 궁핍한 유랑민 같다. 우리 시대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진정한 존재를 실현하는 길이 무엇인지, ‘유무’, ‘비움과 채움’이 동사(le verbe)처럼 혹은 물 흐르듯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행위 하는’ 것으로 작동할 때, ‘관계’가 생명력을 얻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도 새롭게 전향되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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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flection ; 성찰》, 정광희 개인전, 박은지 큐레이터 기획, 리채(Riche) 갤러리, 2017. 03. 01 ~2017. 03. 31.
디지털 시대의 속도의 흐름은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까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몰아치고 있다. 한국작가들 역시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급변화의 기로에 있으며, 나의 작업 역시 실험적이다. 따라서 2017년, 『전달』 잡지에 쓰이는 나의 일련의 글은 일차적으로 매체 본연의 속성을 탐구하며 작업의 방향을 지속시켜나가는 작가들에 관한 연구를 시발점으로 지역작가들의 다양한 장르를 분석하고 지역의 전시 기획의 변별력을 탐구하는 데 있다.
새로운 매체들은 예술 그 자체의 장르를 확장시켜주기도 했지만, 환상적이고 심미적인 방식으로만 주변을 담아내거나 사회적 현상들을 피해가기도 했다. 물론 서양미술에서 표현 매체가 다양화된 요인은 외부적인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표현 매체의 내적 변화에도 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회화 매체를 벗어난 파블로 피카소의 ‘파피에 꼴레(papier collé)’의 시도 이후 종이 콜라주의 변용, 그에 따른 오브제의 유입(Assemblage), 설치의 형태 등은 하나의 궤적을 형성하였다. 사물과 주변의 것들을 수용하며 기존 표현 매체 내에 다른 매체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터놓았던 20세기 초 서양화가들의 다양한 실험은 이후 자신의 자리를 잊어버린 듯 새로운 명칭들에 의해 통합되기도 하고 분화되었다. 이제는 ‘이즘 –ism’에서 ‘아트 –art’라는 명칭을 갖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형성한다. 어떤 이념이나 관련된 기치로 맺어진 관계가 표현 방식과 재료, 그리고 개념이 확연이 다른 현상들로 섞이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매체’의 내부적 변화는 ‘미디어 아트’와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미디어 아트는 외부적 변화, 즉 현대 사회의 기술로 인한 새로운 ‘영역’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아트 역시 21세기 현(現) 사회에서 등장하는 자신만의 매체 본연의 속성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이후의 작가 연구를 통해 시도될 것이다.
2) 이 글에서 인용된 노자 철학은 2500년 전에 노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덕경』의 구절을 참조함 : 특히 제 8장, 43-45, 48, 56, 67 등을 참조.
3)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설정에 심각한 논의를 제기하고 있는 한스 요나스나 에리히 프롬 등과 같은 서양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동양의 노자 철학에서 그러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노자의 유무상생의 사상 혹은 불교의 연기론 사상은 세계의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생명력을 발휘하는 관계적 맥락을 통해 보여 진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옮김, 까치, 2013 ; 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이진우 옮김, 서광사, 1994 ; 임수무, 『도덕경』, 계명대학교출판부, 200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