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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피처의 《블루의 이면》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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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공간 뽕뽕브릿지의 프로젝트 비(Project B, 신호윤 대표)는 영국 작가 가브리엘 피처를 초청해 그의 첫 개인전을 선보였다.1) 오랜만에 찾은 뽕뽕브릿지는 살아온 삶의 시간과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곳곳에 쌓인 먼지들과 부서진 면들로 나이 먹음에 따라 자연스레 핀 공간의 주름을 숨기지 않은 채, 뽕뽕브릿지는 예술을 통해 자그마한 쉼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뚫려진 지붕위로 내리쬐는 맑은 햇살 속에 뽕뽕브릿지는 날것 그대로의 매력을 찾아낸 듯하다.
작은 집터를 그대로 살려낸 공간에서 우리는 가브리엘의 사유의 과정에 함께 동참하며 인간 존재(자아)에 대한 고민, 그에 따른 인간과 대상(사물, 타자, 세계)에 대한 지각의 문제에 대한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Underbelly 작품이 설치된 전시 장면>, ⓒ가브리엘 픽쳐, 뽕뽕브릿지 제공
1.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아래층: 잠재의식》의 장(場)
아래층과 위층으로 이루어진 뽕뽕브릿지에서 작가는 지각의 과정 및 지각의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작품들을 선보이기 위해 전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1층의 전시장, 《아래층: 잠재의식》은 16분의 비디오 <언더벨리 (Underbelly)>(2017)이 천장에 설치되었다. 자그마한 공간에 각각 두 개씩 놓인 매트리스와 의자, 그 곳에서 관객은 천장에 부착된 영상을 볼 수 있다. 매트리스에 누워 관객은 뜬 눈으로 영상을 보지만, 마치 잠을 자면서 꿈을 꾸듯 가브리엘의 ‘꿈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가브리엘의 단편영화 <언더벨리>(2017)에는 두 명의 여인(박세희, 문유미)이 등장한다.2) 작가는 현실의 애인 박세희, 그리고 자신의 꿈에 등장한 박세희, 꿈의 여정 안에 갑자기 등장한 또 다른 여인 문유미를 교차시키며 현실과 꿈의 세계를 넘나든다. 현실의 여인(박세희)은 가브리엘의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몽환적이고 어둠과 빛, 다채로운 색들 사이로 사라져가는 여인을 찾아가고자 하는 가브리엘의 꿈의 여정에 ‘의식적으로’ 집중했던 관객 또한 ‘작가의’ 혹은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와 교차된다.
이렇듯, 가브리엘은 자신의 영상에서 펼치고 있는 그의 꿈의 세계를 통해 관찰자의 입장에 있던 관객의 시선이 어느덧 그곳에 내재해 스스로의 꿈임을 깨닫는 과정을 담아내고자 한다. 즉, 관객에게 있어 의식의 과정은 곧 가브리엘의 무의식의 과정에 갇혀 어느 순간 관객 자신의 무의식과 중첩된다. 하염없이 사라져가고 나타나는 인물들, 말과 침묵,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등은 꿈속에 나타난 공간의 미로처럼 관객에게 반복된다. 이를 통해 가브리엘은 의식과 무의식, 꿈의 세계,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관객의 의식의 교차를 통해 자아 존재(실존), 그리고 ‘나’와 ‘대상’의 관계에 대한 지각의 문제를 탐구했다.
특히 그의 <언더벨리>(2017) 영상에서 주목할 부분은 ‘언어’이다. 알아듣거나 알아들 수 없는 말의 섞임, 그러나 ‘말한다는 행위’를 통해 물리적인 소리인 말 속에 작가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의미’를 생성해낸다. 퐁티가 언급한 ‘야생적 사유’(une pensée sauvage)는 문법으로서 정형화되기 이전의 사유이지만, 문명화된 사회의 ‘여백’이자, 토대이며 동시에 이 사회를 치료해주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언어의 애매함은 언어에 정신적인 힘을 불어넣음으로써 사물을 의미화 한다. 그러나 곧 언어가 사물을 ‘완벽히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가브리엘에게 언어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것, 즉 침묵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꿈에 빠져들 때, 무의식과 마주하게 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고 언급했던 가브리엘의 설명처럼, 이러한 꿈의 여정은 작가 자신이 ‘자아’의 질문에서 나아가 ‘어떤’ 신념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10여 년간 고민했던 그의 철학이 함축적으로 발현된다. 그의 영상에 나오는 하염없이 떠도는 미로 속 인물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꿈(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지각은 가브리엘이 언급했던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1945)을 통해 더욱 면밀히 살펴볼 수 있다.
<Underbelly 작품 스틸영상> ⓒ가브리엘 픽쳐, 뽕뽕브릿지 제공
2. 지각, 몸, 세계;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3)
의식(consciousness)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대상)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의식은 감정, 언어, 움직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무의식(Unconscious)은 “사고 과정, 기억, 원인 없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그런데 무의식은 일반적으로 의식적 움직임을 통한 몸의 경험 혹은 운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 과정 속에서 의식의 단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우리가 의식하는 ‘대상(나, 타자, 사물, 혹은 세계)’은 어떻게 지각되는가?
예를 들어 물들여진 천의 그림은 바탕과 분리(단절)되어 있는가? 여기서 그림(혹은 색)은 ‘바탕’ 위에 놓여 있다. 그림(색)의 윤곽은 ‘바탕’이 아니라 ‘그림’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단순한 물리적인 경계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윤곽을 통해 ‘그림’과 ‘바탕’이 역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곽은 동시에 ‘이곳’, ‘저곳’에 위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림’과 ‘바탕’의 구별은 무의미하다.4) 일반적
으로 우리가 사물을 개별적인 것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바탕’ 위의 ‘그림’으로서 지각하는 것이며, 그와 같은 지각의 주체는 이 세계의 어느 한 점을 ‘자신의’ 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퐁티는 데카르트가 언급했던 “나는(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근본으로 하는 순수 정신이 아닌, 세계 ‘속에’ 서 있는 ‘몸’을 통해 인식한다.
의식이 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할 때, 대상은 항상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의식 바깥의 대상일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대상의 존재 양식이 별도로 있고, 그것이 의식에 주어지는 형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있음으로 해서 정신이 구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신체는 정신을 어떻게 연결시킬까?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감각을 담당하는 신체기관 하나하나에 대해 현상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몸과 정신을 연결한다. 유기체의 행동은 질료적인 요소들의 합이 아니라 관계들의 통일로서 이해된다. 즉, 안(순수의식, 주관)과 밖(순수자연, 대상)의 엄격한 구분이 상대화된다. 따라서 자극은 더 이상 순수하게 외적인 물리적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수용적인 자극도 아니다. 오히려 자극은 몸에 대해 내적인 관계에 의해서 고유하게 표상되는 관계적인 것으로 작용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몸은 더 이상 기계(사물)도 아니고 순수의식도 아니다. 몸은 더 이상 기계론적-인과적 법칙에 의해서 지배받거나 관념론적-목적론적 법칙에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다. 몸은 일종의 ‘육화된 의식’이다. 여기서 행위는 신체의 기계적인 활동도 순수 지성적 활동도 아니다. 이 신체적 행위주체가 실존이다. 즉, 몸이 자신의 주위 세계와 지속적으로 벌이는 투쟁이다. 몸을 통해 우리가 부딪히는 상황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응하며 그 세계와 더불어 살게 된다. 이런 근거에서 인간은 순수의식 존재(후설)도 아니고, 세계 속에 있는 ‘세계-내-존재’(하이데거)도 아니며, 오히려 ‘세계-에로의-존재’(Véhicule de l’être-au-monde)이다.
퐁티에게 인간의 의식은 감각적으로 실존하는 몸에서 체화(體化)된 것이므로 의식과 몸을 둘로 나눌 수 없고, 모든 인식과 행위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바로 각자의 몸에서 출발한다. 인간 존재는 몸을 통해 의미를 의식들 ‘사이에’ 위치시키고, 이러한 “상호세계(l’intermonde)”에 대해서는 의미의 교직(entrelacs)을 통해 반성에로 나아간다. 한마디로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몸으로서 존재하고 몸의 체험을 통해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몸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친밀함’을 내포하고, 세상의 의미는 개방적이고 발생적이라는 해석학적인 의미의 ‘애매성’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적 실존으로서 ‘세계-에로의-존재’, 이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를 ‘넘어서’ 새로운 의미세계를 만들어 내며 실존한다. 그렇기에 ‘세계-에로의-존재’는 세계와 나 사이에 어느 정도 긴장관계가 있고 이에 따른 나의 역동적인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나와 세계,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내가 대상을 지각할 때 나의 고유한 시각에 의해서 내가 대상을 보기보다는 나의 시각에 타자의 시각(세계관)이 나에게 들어와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므로 인간이 대상을 객관화하는 정신적인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나의 세계에도 타자가 동참한다.
퐁티 철학의 주된 사유 방식인 지각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세계 ‘내’에서 대상을 발견하고 또한 타인과 자기를 인식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지각 ‘내’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저서에서 퐁티는 이전의 관념론적 철학과 달리 지각된 세계의 현상에 주목하고, ‘지각’은 정신적인 주체가 아니라 몸과 대상과의 상호작용이므로 ‘보는 행위’와 ‘사유하는 행위’는 서로 분리된 활동이 아님을 주장했다.
<flesh on flesh> 설치 장면 ⓒ가브리엘 픽처, 뽕뽕브릿지 제공
3. 몸을 통한 세계와의 관계: 《위층: 의식》의 장
가브리엘은 <언더벨리>(2017) 영상에서 기억을 조작하며 두 여인(박세희와 문유미)의 이미지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탐구하고, 관객의 의식과 자신의 꿈을 교차시키고자 했다. 반면에 2층에 설치된 <현재 (present)>(2017) 영상에 등장하는 여인(박세희)은 아래층 <언더벨리>(2017)의 꿈속에서 가브리엘이 찾아 헤매던 그 여인이다. 가브리엘이 여인을 통해 그녀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즉 ‘그곳에’, 내 ‘안에’, 혹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지를 묻는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면, <현재>(2017)에서 여인(박세희)은 관객이 등장할 때 무(무채색)에서 유(유채색)로 변화한다. 이는 <아래층: 잠재의식>에서 <위층: 의식>의 단계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즉, 여인(박세희)이 들고 있는 꽃이 갑자기 ‘초록색’으로 바뀌는 것처럼, 작가는 대상을 관찰함에 있어 지각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대상의 본질(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장치로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또한 작가는 관객의 움직임을 포착한 모션센서에 의해 ‘변하는 그 순간’을 드러낸다. 작가는 영상 속 꽃의 색의 변화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대상의 ‘존재’를 경험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의 벽에 설치되어 있는 <Flesh on Flesh>(2017)은 신체(몸)과 정신(영혼),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교차하며 접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실험이다. 이 작품에서 가브리엘은 자신의 ‘신체’의 움직임(운동)을 통해 몸과 정신의 관계를 탐구한다. 더불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대상’으로 관찰하고, ‘바라보고’, 작업을 통한 자신의 ‘무의식의 영역’을 들춰내는 반복과정을 통해 자아 혹은 대상의 새로운 깊이를 느낀다.
여기서 우리는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눈과 정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에서 ‘지각된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교차하며 얽혀 있는 관계라고 정의한 것을 상기시켜 볼 수 있다. 퐁티는 ‘보이는 외관’과 ‘보이지 않는 깊이’를 지닌 양면적인 존재에 ‘살char’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사물도 이와 같은 ‘살’의 양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살’로 이루어진 실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퐁티에게 있어서 ‘현상’이란 보이는 외관과 보이지 않는 깊이를 모두 잠재적 지평으로 지닌 실재(la réalité)이다. 그는 현상과 본질은 나눌 수 없으며, ‘지각’이란 현상적인 몸이 피부를 열고 대상으로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대상이 몸의 ‘살’로 변하는 존재론적 조화이기 때문에, 사물을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인 동시에 사물에 의해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시장 위층에서 보이는 몸과 정신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묘사하고자 했던 가브리엘의 작업은 특히 <성찰 (Reflection)>(2017)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영상에서 가브리엘은 성경의 말씀(logos)을 읽는다. 땅과 하늘 사이‘에’ 존재하는 ‘나’, 즉 세계 안의 몸과 뒤섞여 있는 의식이 주체가 된다. 세계가 비신체적인 명증한 의식(데카르트의 코기토)이나 사르트르의 익명적 의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부의 조직처럼 갈라낼 수 없이 서로 얽혀 있는 의식이 “세계의 조직(tissu du monde)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를로 퐁티의 철학 세계에 심취한 가브리엘 역시 자신의 철학이 탐구하는 합리성의 모델을 영상을 통해 드러나고자 했으며, 인간의 몸과 세계가 교차하면서 얽혀 있는 ‘살’의 구조에서 우리의 지각과 해석, 그리고 이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메를로 퐁티의 인간과 세계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살’의 문제, 즉, ‘살’이라는 야생적 존재의 비결정적이고 모호한 의미, 가브리엘이 언급한 대상(그가 언급한 파란색의 이면)을 지각하고, 지각 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질문은 영상 매체를 통해 출현한다. 즉, 가브리엘은 ‘몸과 정신’, ‘주체와 대상’, ‘나타나는 것과 존재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과 같은 이분법의 ‘사이’ 혹은 ‘관계’를 통해 그로부터 벗어나는 점을 포착했다. 이와 같은 예술의 표현적 특징이 언어의 표현적 특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혀내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는 영상 매체를 이용했던 것이다.
가브리엘은 반성(反省) 이전의 영역인 지각 체험을 통해 주객이 분리되기 전의 불투명한 세계에 침묵으로 접근한 뒤 존재의 신비와 깊이를 개념 없이 펼쳐내는 그의 영상예술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현상학적 태도의 근거를 찾은 것이다. 결국, 가브리엘이 언급한 세계, 여행, ‘파란색(blue)’, 시간 등은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파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분별력’을 야기한다. 즉, 대상이 단순히 ‘왜곡된 것’에서도 그대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전혀 야기치 않는 현실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삶을 둘러싼 여러 대상의 이면들과 교차하며 이끌어낸 지각의 여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태도와 관점 역시 바꾸어 나가면서 결국 실천적인 행위를 하게끔 몰아친다. 이러한 그의 오랜 고민이 <언더벨리>(2017)를 시작으로 <성찰>(2017)까지 7점의 작품들에 응축되어 표현되었다.
< reflection >설치 장면 ⓒ가브리엘 픽처, 뽕뽕브릿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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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abriel Pitcher, Another Shade of Blue, Project B: Space Ppong, Gwangju, 30.05.2017~11.06.2017.
2) 가브리엘은 자신의 동료들(박세희, 문유미)을 작품 속 배우로 등장시켰다. 더불어 작가는 꿈의 공간을 적절히 드러낼 수 있는 장소로 권승찬 작가의 미디어 설치 작품이 전시되었던 광주 가톨릭대학교 평생교육원 지하창고를 선정했다. 이 단편 영화에서 권승찬 역시 카메오로 출현하면서 이들은 가브리엘의 시나리오와 시퀀스, 그리고 작가의 요구에 맞춰 연기했다. 이 영상에서 사진&영상 작가 박세희, 퍼포먼스 작가 문유미, 설치미디어 작가 권승찬은 가브리엘의 시나리오에 의해 ‘지도된’ 대로 연기를 하는 배우로서의 역할이지, 등장한 예술가들 각자의 철학을 함께 공유하며 협업한 결과물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에 나온 권승찬 작가의 작품 역시 가브리엘 꿈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배경’일 뿐이다. 특히 가브리엘은 장면 속 몽환적이고, 빛과 어둠, 환영과 현실의 중첩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권승찬 작가의 설치작품에 표현된 ‘빛’을 사용했다.
3) 모리스 메를로 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년에 번역된 저서 참조.
4) 이러한 그림, 배경, 윤곽의 과정에 대한 표현이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메를로 퐁티가 『눈과 정신』에서 언급했던 세잔의 풍경화이다. <생 빅투와르 산 (Mont Sainte-Victoire)(1902~1904)>에서 세잔은 형태의 면과 색채, 그리고 공간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통해 ‘공간감’과 구도를 표현했다. 세잔은 색채를 통해 형태를 구현하고, 그에 따른 원근감과 자연의 ‘깊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