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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의 깊이, 가족의 리얼리티

극단 청춘 「가족의 계단」

작/ 강석호 연출/ 오설균

일시 : 2017. 10. 17. ~ 10. 21.

장소 : 예술극장 통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족’이라는 주제는 늘 리얼리티의 진정성과 진부함 그 경계에 서서 곡예를 한다. B급 드라마의 값싼 감동과 적나라한 현실성의 소름 돋는 감동은 ‘가족’ 앞에서 한 끝 차이다. 드라마에서 흔한 문제가족의 가출과 엄마의 눈물은 공식처럼 따라붙지만 작품마다 감정의 결은 미세하게 다르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주제는 연출가들에게 참 익숙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연출자는 ‘가족’의 진부함을 충격적인 반전으로, 때로는 풍자와 블랙코미디로, 가끔은 따뜻한 감성과 눈물로서 극복하려고 한다.

「가족의 계단」은 ‘가족 드라마’의 이 운명적인 곡예를 무던한 제스처와 정지된 화면으로 털어낸다. 관객의 몰입은 책임지지 않고 단지 극이 가야할 길로 가겠다는 듯 무던한 이야기 진행방식이 이 고요한 가족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1. 정지된 시간

말을 하지 못하는 지체장애자 경아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은 어제와도 비슷한 나날을 보내는 경아는 미래를 찾아 헤매기 보다는 현재의 시간들에 충실하며, 그래서 그녀의 시간은 참 느리고 평온한 ‘고장난 시계’ 같다. 그녀에게는 1년 전부터 식물인간이 되어 휠체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아들이 있다. 그에게 웃음으로 말을 걸고, 시아버지와 아들의 밥을 차려내는 일상이 없었다면 그녀의 고장난 시계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날 그 날의 정지된 시간을 사는 경아의 하루는 그녀의 일생이고, 아들과의 한 끼는 그녀에겐 생명 자체이다.

2. 느린 걸음

사실 이 연극의 첫 장면은 너무 느려서 관객을 기막히게 한다. 넝마주이 노인이 어느 지하방에 등장해서는 종이박스나 폐품을 무대 이쪽에서 무대 저쪽으로 하나씩 옮기고, 반듯이 펴고, 차곡차곡 정리하느라 족히 5분은 소요해버리는 것 같다. 관객이 이야기 진행을 기다리다 못해 잠시 헛생각에 빠지거나 어느새 할배가 쌓은 폐품의 개수를 세고 있을 때쯤에야 다른 인물이 등장하니, 이쯤 되면 가족드라마의 진부함은 이미 깼다고 봐야겠다.

할배는 느리다. 지적장애가 있는 며느리를 도와 빨래를 개거나 혼자서 폐품을 정리할 때에도, 집을 나간 백수건달 아들을 기다리거나 휠체어에 늘어진 손주를 바라볼 때에도, 할배에게는 할배만의 일정한 속도가 있다. 그리고 관객은 반강제적으로 노인의 속도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제야 이 가족들의 생활 리듬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노인의 느린 탬포는 거침없는 손녀딸의 가출마저도 주춤하게 하고, 억척스러운 사돈처녀(며느리의 여동생)도 고개 숙이게 한다.

3. 텅 빈 휠체어

무대에서 가장 오랜 시간 등장하는 건 1년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손자의 휠체어다. 하지만 손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담요만이 놓인 휠체어를 보고 절망적인 상태의 손자를 상상한다. 엄마 경아가 밥을 먹여 줄 때에도 아빠가 생일 케이크를 아들에게 펼쳐보일 때에도 우리는 휠체어 주인을 상상해볼 뿐이다.

텅 빈 휠체어는 우리가 평소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던 결핍된 자들의 그늘이다. 거리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애인들의 모습, 어딘가로 숨어버린 듯 한 그들의 존재가 사실은 지하방 곳곳 어딘가에 있었노라고 경아의 가족들이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가 두려워 여기에 숨어있었던 것인데, 내 몸이 여기 있는데 보이지 않느냐고 필자를 자꾸만 다그친다.

텅 빈 휠체어는 동시에 가족의 희망이다. 가족들이 돈을 버는 것도 손주의 회복을 위해서고, 가족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것도 손주 생일이기 때문이다. 가출한 아빠와 딸이 가족에게 용서받은 것도 손주에 대한 사랑과 아픔을 서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중에 지하를 탈출할 것을 결심한 것도 손주의 건강을 위해서다. 휠체어는 경아 가족의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또 계속해서 살아가야할 이유를 보여준다.

4. 계단 밖으로 탈출하기

느리고 고요하고 정지된 시간을 살아가는 가족의 보금자리는 곰팡이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반지하다. 가족들이 한 명씩 등장할 때마다 지하 계단으로 내려오는 발자국의 울림이 객석에 펴진다. 누군가 내려와서 현관문을 열 때마다 크게 들리는 축축한 빗소리가 이 집 구석구석에 피었을 곰팡이를 떠올리게 하고 무대바닥이 눅눅한 장판처럼 느껴지게 한다.

가족들은 지하방을 탈출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속절없는 메아리처럼 계단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고, 또 올라갔다고 다시 내려온다. 신들의 노여움을 산 죄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올리고 굴러떨어지면 다시 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의 비극적인 운명처럼 경아의 가족은 한없이 계단을 내려온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통장을 훔치려던 딸도, 집을 나간 철부지 아빠도 결국 계단을 내려와 눅눅한 지하방으로 되돌아온다.

계단을 숙명으로 안고 사는 경아 가족은 계단을 내려오면 다시 올라가야한다. 가족의 계단은 그들에게 가난과 상처와 역경과도 같고, 그 계단을 오르는 일은 고난의 행군이나 다름없다. 딸의 소망처럼 이들은 계단 밖으로 탈출하기를 바란다. 습하지 않는 양지바른 지상의 보금자리에서 미래의 시간을 살고 싶다. 그래서 가족의 계단은 고통이면서 또 희망이다.

할배는 가족들의 희망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신만의 느린 리듬을 깨버리는 반전의 삶을 기획함으로써 희망에 일조하고자 한다. 할배가 멀리 있는 농장에서 숙박을 하며 남의집살이로 삶을 마감하기로 한 자신의 계획을 공표한가 동시에 가족들은 지하방을 탈출할 꿈을 꾼다. 할배의 바닥으로 치닫는 황혼의 인생이 아이러니하게 가족들의 희망을 암시하며, 지상으로 이사할 것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현실 속의 가족이라면 할배의 희생으로도 지하계단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노인이 폐품을 주워 모든 돈으로 다섯식구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만큼 우리사회가 만만하지도 않다. 오히려 사회는 오랫동안 그들을 희망이 없는 자로 명명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언어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진 자신과 식물인간이 된 아들, 폐지 줍는 시아버지, 가출한 남편과 가출을 결심한 딸.... 사실 이쯤이면 연극은 참 잔인할 정도다.

하지만 할배의 출가 결심으로 끝날 것 같던 연극은 ‘가족의 새로운 탄생’을 예고라도 하듯 딸의 임신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경아의 가족은 밥을 먹는다. 연극의 첫 장면에서 할배가 한없이 천천히 폐품을 정리하던 것처럼, 작품의 막바지에서 배우들은 오래도록 맛있게 밥을 먹는다. 너무 크지 않게 그릇 소리를 내며, 묵은지를 찢어먹고 미역국을 나누어 먹는다. 가족 간에 극적인 다툼과 화해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밥상을 차리듯이, 경아가족의 삶은 연극이 끝나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아직은 서툰 화해가 빚어낸 어색한 공기는 ‘가족’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또 얼마나 사랑스러우며 아픈 존재인가를 깨닫게 한다.

진부한 것은 가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아니라, 가족의 지긋지긋하게 유구한 역사다.

가을, 축제의 계절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광주에 가을만 되면 문화행사가 넘쳐난다. 주요 문화기관에서 대형 축제와 이벤트를 하루가 멀다하고 열고, 아트체험이나 공연・전시・먹거리와 볼거리는 으레 따라오는 흔한 풍경이 되었다. 전통공연부터 추억을 자극하는 퍼포먼스와 메가 전시가 성시를 이루는 요즘 문화축제를 다 따라가기에는 몸이 모자랄 정도다.

진수성찬이다. 문화의 진수성찬이 차려졌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즐겨야할지 선뜻 마음 가는 찬이 없어 필자는 오랜만에 소극장으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재밌는 것도 많은데 왜 하필 연극이냐는 주변의 말에 잠시 고민했던 필자지만, 연극이 끝난 후 소공연장의 지하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문화예술에 시끄럽고 화려한 축제판만 있었더냐. 선택하길 차암 잘했다고. 모처럼 조용하고 깊은 시간이었다고.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고.

「사진제공 _ 극단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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