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배경
퍼포먼스가 발생하는 장소와 시간은 그 퍼포먼스가 재매개해내는 장을 말한다. 여기서 인간(퍼포머)의 몸, 특정 시공간의 조건은 일종의 새로운 알레고리 작용을 한다. 물론 작가가 미리 계획하고 설정한 메시지가 있을 순 있지만 퍼포밍이 그것에만 그친다면 퍼포먼스는 잠시 흥미로운 쑈가 되거나 일종의 지루한 교육장치가 되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퍼포먼스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아가 예술행위에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가령 매번 무대에서 새롭게 발생하고 촉발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사실상 관객에게는 놀라움, 충격, 심지어 폭력적 제스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종의 신선함에의 목마름으로 기대한 것이 배반되기 일쑤다. 그것이 장르화된, 제도화된 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퍼포먼스’를 하나의 장르로 본다기보다는 어떤 증상적 행위들의 연속으로 본다면, 그것이‘폭력’과 ‘폭력적 제스쳐’를 가장 첨예하게 다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경계는 항상 진짜냐 가짜냐, 우연이냐 설정이냐, 그리고 현장에서 발생된 사고냐 아니면 사건의 차원이냐 등에 있으며, 그로부터 퍼포먼스는 그 사회의 문화적 검열과 강박 혹은 통제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싱가포르에서 오랫동안 퍼포먼스를 해온 두 작가 카이람과 유주루 마에다1)는 한국의 몇몇 작가들과 함께 광주와 제주를 오갔다. 퍼포먼스 장소는 광주 발산마을의 뽕뽕브릿지, 제주 거로마을의 문화공간 양이었다. 두 공간 모두 개발되기 이전의 오래된 단독주택을 빌려서 레지던시와 전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간들이 위치한 마을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 거주하기보다는 청장년들을 대도시로 보내려고 노력해온 노년층이 거주해온 곳이다.
광주와 제주 이 두 지역은, 몇몇 측면에서 인근 국가들의 몇몇 도시들과 유사한 점이 있어 보인다. 관료주의, 관광정책, 젠트리피케이션, 로컬 특유의 의심에 바탕하되 그 긴장을 바탕으로 시간과 함께 겪어나가는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는 커뮤니티, 그러면서 글로벌 도시 서울과 서구, 그리고 로컬리티 사이에서의 긴장의 유지 등이다. 알려졌다시피 제주와 광주는 근대 국가 수립과 폭력적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폭력, 즉 제주 4.3과 광주 5.18과 같은 국가 차원의 사건이 지금까지도 그 영향관계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점이 되고 있다. 광주의 발산마을은 다른 광주의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발전위주의 근대화로부터도 어쩌면 버려지고 정체된 장소였지만 최근 몇 년간 그곳은 예술마을처럼 꾸며졌고, 외국인들과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 되고 있다. 제주의 거로마을에 위치한 문화공간 양은 제주 4.3때 모두 불타고 없어진 터전에 다시 자리잡고 있다. 양은 다시 마을의 기억을 되살리고, 삶을 재생하고, 자료를 다시 모으고, 같이 연구하고 예술적으로, 문화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마을도 예외없이 모든 것이 자율적 자본에 의해서 착취되도록 놔두는 신자유주의적 개발과 이주에 대응하여 긴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신자유주의적으로 대중화한 관료제와 금융의 재편과정이 이미 잠재된 폭력으로 깃들어있는 현장으로써 이 두 지역과 장소가 제시되었고, 두 작가들은 단기간이지만 이곳에 '체류'하였다. 과연 이들 이방인에게 이 두 지역은 어떤 현대성을 담지하고 있는 곳이 되었고, 무엇이 공유되었을까. 카이람은 이번 한국 프로젝트에서, 홍오봉 프로젝트, 제주 문화공간 양 퍼포먼스, 광주 뽕뽕브릿지 퍼포먼스 이렇게 크게 세 묶음의 퍼포먼스를 하였다. 이 중에서 제주 문화공간 양의 퍼포먼스는 그간 그가 해온 퍼포먼스들을 나름 종합한 성격이 있었다. 유주루 마에다의 경우 제주 문화공간 양에서 간략하게 보여준 퍼포먼스의 결정판이자 이제껏 해온 퍼포먼스들을 종합하는 계기로 광주 뽕뽕 브릿지에서의 5시간 지속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카이람 Kai Lam, <K.L.S.B.T>, The Substation, 2015, Singapore
카이람2)의 경우, 우선 2015년 싱가포르 서브스테이션에서의 퍼포먼스로 이야기를 시작해볼만 하다. <K.L.S.B.T> 퍼포먼스3)는 스페인에서 2012년에 행한 The Unifield Fields 아티스트 레지던시 이후 보고회처럼 행한 퍼포먼스였는데, 2012년의 퍼포먼스 <Kai Lam Sucks Big Time>를 재연해보인 것이었다.
당시 카이람은 의자를 두고 그것에 어떤 판넬을 끈으로 매달아 놓으려고 한참이나 애를 썼다. 그러고는 바지를 반쯤 벗고서 그 의자에 똥을 누는 자세로 앉아서(관객을 뒤로 한 채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뚝뚝 떨어뜨렸다. 누런 덩어리이기에, 누구나 그것은 똥을 누고 있는 것을 퍼포밍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후 카이람은 그 덩어리들을 일회용 음식 포장 용기에 담아서 관객에게 시식을 권했다. 아무도 함부로 그것을 짚지 않았으며 냄새가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고개를 뒤로 쑥 빼기도 하였다. 카이람은 아무도 그것을 먹지 않자 스스로 꾸역 꾸역 그 덩어리들을 먹었다. 몇몇 장면들이 지속되었고, 퍼포먼스가 다 끝나고 나자 관객 중 한사람이 아주 조심스럽게 작가에게 물었다.그거 정말 똥 아니었지?.
카이람의 퍼포먼스는 실제로 좀 웃겼고, 한편으로는 아슬아슬했다. 그가 끈과 테이프로 의자에 판넬(King of Bull Shit 吹水精 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여러 메모들이 너덜너덜한 판)을 매다는 제스쳐는 ‘제대로 되지 않는, 매우 어설픈 제스쳐’였기 때문에 다소 안타깝기까지 했다. 작가는 퍼포먼스 도중에 맥주를 마시면서 주정꾼처럼 농담도 하고 관객들에게 설명과 웃음을 선사했다. 현대판 파졸리니도 아닌데, 웬 똥? 사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우스꽝스러움을 가장하여 (폭력적)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금융식민주의 체제로부터 탈구된 존재로서의 베어라이프의 뭔가 애는 쓰지만 잘 못하는 미숙함을, 그러나 생명의 강렬도와 그것의 섹슈얼한 유비들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다소 폭력적 제스쳐들로써 그리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2015년 싱가포르의 서브스테이션에서의 그의 과거 퍼포먼스의 재연은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재연된 강렬도로서의 퍼포먼스. 그것이 상기시키는 맥락은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의 폭력성이다. 여기서 근대의 폭력성은 거대 폭력, 즉 법을 포함하여 국가의 폭력적 정권 쟁탈과 같은 통치의 정당화를 위한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은 일종의 희화화된 상태로 이 폭력은 등장한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함이 정치비판이 되는 이유는 근대적 폭력이 비판되고 반성되었다기보다는 보다 실제 사회에서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제도적 폭력의 차원이 다각화되었고 그로 인해 생명의 차원에서의 여타의 가능성이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4) 이제는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애초부터 그 어떤 폭력의 차원도 없었던 듯이, 그 여지 자체를 아예 싹부터 없애고자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거대 폭력의 효과를 전시하고 있다.5)
신자유주의에서는 주로 시민적 합의에 의해서 건설되고, 안전함과 깨끗함, 그리고 금융거래에 선두적이며 다문화주의를 평화롭게 이끄는 성공한 신사적인 이미지의 정부가 광고된다. 이런 사회에서의 ‘실질적 그리고 실재적 차원에서의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실 현실에서는 이미 다문화주의가 보인 여러 실패에서 보듯이 다양한 종교, 언어, 인종들이 얽혀 사는 것을 ‘화음’으로 광고함으로써 실재성을 획들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카이람은 다문화국가인 자신의 나라 싱가포르에 대해서 언급할때 냉소적이라기보다는 비판을 토대로 한 희망을 말한다. 카이람의 퍼포먼스에 있어서, 무엇인가에 ‘부합하지 못한’, ‘뒤떨어진’, ‘서툴고 미숙한’, ‘오작동으로 작동하는’제스쳐. 그리고 매우 빠르거나, 아니면 매우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그러한 제도적 삶에 있어서의 부적합성은 주요 특질이 된다. 합의에 의해 건국한 국가의 시민은, 항상 그 이상에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어떤 예외적 생명이 대두시키는 충동의 어떤 필연성의 차원을 긍정함으로써 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다양성의 조우를 희망한다고 할까. 오늘날의 죽음을 내버려두는 통치술을 상기해 봤을 때, 한 작가의 퍼포먼스가 이렇듯 이상주의적 진정성의 영역에서만 머문다는 점에서 보면 사실상 씁쓸하기까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아가 생명은 퍼폼을 하지 않는 다는 점, 즉 삶의 차원에서 봤을 때‘재연된 강렬도’라는 반복의 제스쳐는 다소 증상적인 것이 된다.
카이람, Washing Machine concert no.3(After Hwang Yong Ping, 대안공간 루프, 2016, 서울
2016년 겨울 카이람은 서울의 대안공간 루프에서 또 다른 퍼포먼스를 하였다. 세탁기와 오브제가 등장하였고, 과거 다른 현대미술 작가의 퍼포먼스와 그로부터 남겨진 잔여물에 대한 에피소드를 이끌어왔다. 당시 기획자였던 나는 작가들에게 일종의 '퍼포먼스의 잔여'로서의 전시와 작업을 요청하였던 터였고 카이람은 현장에서 찌꺼기들을 생산하였고 전시하였다.
카이람은 이미 싱가포르에서 한 퍼포먼스에서 세탁기를 사용하여 지폐를 세탁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오래전 중국 작가인 황용핑의 서적 세탁 작업을 떠올리고, 서적(한국 미술서적들과 싱가포르의 미술서적)을 세탁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지폐를 세탁한 것은 일종의 ‘돈세탁’을 암시하는 측면이 있었다면, 한국에서 미술서적을 세탁한 것은 ‘제도화된 컨템퍼러리’의 반복을 암시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세탁시간과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라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 사운드 루핑과 더불어 그가 행한 여러 행위들이 퍼포먼스의 주요한 사항들이었다고 하겠다. 큐레이팅, 전시도록 만들기, 초대하여 와인마시기, 다 아는 이야기들을 반복하기, 흔한 파운드 오브제로 대충 놀이하기,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끄러운 노이즈와 엄청난 지루함이 퍼포먼스의 주요 네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화이트 큐브에서의 현대미술전시에 대한 희화화된 퍼포먼스였는데 다소 현대미술의 관습화된 행위들이 갖는 아이러니함을 고지식하게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는‘지루함’을 전시하게 되었다.
‘지루함’은 사실 한때는 발데사리가 그리하였듯이 창작을 촉발하는 원천이기도 하고, 퍼포먼스에 있어서는‘예술성’의 기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도화된 반복이 주는 지루함이란, 이와는 달리, 어떤 생동하는 것이 촉발을 차단하는 매뉴얼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유연한 정부의 관료주의와도 쌍을 같이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의 관료주의는 모더니즘에 있어서의 관료주의에 비해서 한층 복합적이며 유연하게 작동한다. 이는 젠트리피케이션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관광과 같은 끝도 없는 소비를 반복하며, 시민을 위한다는 대중추수적인 정치가 비정치화되는 것을 방조하고, 이주를 눈에 띄지 않게 차별적으로 선별하는 장치를 고안해내며, 새로운 기술을 재빠르게 여기저기 도입하면서 계속 실험만 한다. 관료주의가 행하는 무능을 가장한 정치술의 효과는 한편으로는 티비를 보는 지루한 인간의 이미지에서 제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그러하기에 이러한 유연한 정치술이 사실상 지켜온 법을 동원한 폭력이라든가 역사이래로 지속되어온 정부 관료의 합법적 부패, 그리고 그것의 인과관계로서의 오늘날의 교착상태에 거주하는 소수적인 것의 방치 등은 지속된다.
끝도 없이 소비하고 빚을 투자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거품들 속에서 해체된 주체상이 아마도 오늘날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초상이란 소비하는 자의 지루한 풍경일 것이다. 이토록 비폭력적인 제도적 폭력은 생명에게 그 어떠한 예외성도 상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갈수록 지루해지는 개인에게 기술적, 미디어적 고안물들과 가상의 만족을 끝도 없이 제공한다.
사실상 카이람의 퍼포먼스에서도 사운드 루핑을 통해 노이즈를 양산해내는 것은 다소 디스토피아적 암울함에 가깝다고 하겠다. 게다가 희화화된 그리하여 더욱 암울한 풍경과 정서는 현대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나오듯이 상상한 대로 모든 것이 만족되는 세상에서 개인은 (지루하게도) ‘고독과 같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여타의 상상적 만족을 기술적, 인공적으로 제공하는 사회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이 어떤 해방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끝없는 루핑이며 방치된 소멸에 대한 노이즈일 뿐이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으로는 유효하지 않는 이러한 정서는 그 그리움의 대상이 ‘이미 발명되었다가 해체된 인간 존재성’이라는 점 때문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 그리워하고 참조하는 대상은 이전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던져졌던 인간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다. 그런데 이미 그 인간존재성을 형성한다고 여겨진 고유성은 해체되어버리고 만 지금, 그러한 존재성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은 해답없는 루핑의 찌꺼기이자 노이즈가 된다. 물론, 이러한 노이즈의 존재는 일종의 증상에 가깝다. 그것이 얼마나 우연찮게 촉발되는 강렬도를 지녔느냐는 유보된다.
카이람, Art is the weapon used to diminish tyranny, 문화공간 양, 2017, 제주
제주 문화공간 양의 공간 중에서 플라스틱 병들을 모아놓은 방이 하나 있었다. 양에서는 여기에 다음 전시 작가가 사용할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 방 자체가 재활용품수거공간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이 장소에서 카이람은 퍼포먼스를 시작하였다. 그는 플라스틱 쓰레기들 속에서 잠을 자다가 나온 어떤 부랑자처럼 출발한다. 그는 그 공간에 놓여진 폐기물들과 장난감들 등을 갖고 한참을 휘젓는다. 그리고 그는 한 짐을 끌어 모아 마당으로 나아간다. 퍼포머는 관객중 바지를 입은 여성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여 다소 거슬리는 행위를 한다. 여기에는 카이람이 자주 쓰는 수박이 사용되었다. 작가는 갑자기 주위 관객들과 육중한 수박을 던져 받기를 하다가 그것을 여성의 무릎위에 올려놓고 그로부터 수박즙을 파 마신다. 같은 제목으로 수년전에 했었던 퍼포먼스들이었기에 관객들이 준비된 수박을 보고나서는 무엇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관객이라면 다소 충격적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 퍼포먼스는 사실 예전에 했던 퍼포먼스들을 종합해서 보여주는 성격도 있었지만, 이번 한국 방문에 있어서 키워드 중 하나인 ‘노숙’과 ‘단기 거주’라는 측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와 제주를 가기 전에 카이람이 인상적으로 들렀던 곳은 서울역 광장이며 그곳에서 두런두런 앉아서 술을 마시거나 자고 있던 노숙자들 사이를 지나 곧바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의 크지쉬토프의 전시를 보러 갔다. 당시 나눴던 대화에서 카이람은 그 자신의 거주와 작업에 있어서도 관주도의 ‘공공성’영역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공공성과 커뮤니티’에 대한 언급을 한 바가 있다.
퍼포먼스에 쓰인 재료들을 보면, 우선 광주 레지던시에서 발견한 포대자루에, “만약 하늘이 무너진다면 나는 그것을 이불삼아 잠을 잘 것이다”라는 문구로써 떠도는 자의 무기력하지만 버텨야하는 생명의 존재를 암시한다. 제주 알뜨르 비행장의 제주 4.3 암매장 웅덩이를 보고나서 주변에서 수거한 잘려진 나뭇가지 등, 사실상 퍼포먼스에 쓰인 재료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재료들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죽거나 버려지는 이름없는 존재들에 대한 암시가 된다. 그러나 나아가 카이람은 여기에서 연대함을 강조한다.
한편으로는 떠도는 퍼포머로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샌드위치샵이라든가 양어장등에서 일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젊은 작가들의 멘토등을 하면서 지내는 카이람에게는 순식간에 발전해온 싱가포르라는 국가와 친구들의 나라에 대한 오래된 염원이 있다. 그것이 화음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노이즈 차원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련의 행위들이 이어지는 듯하다.
폭력에의 대응
퍼포먼스 아트는 특히 1960년대 이래로 훨씬 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예술의 형태가 되면서 그것은 특정 국가장치와 그 정치와 폭력에 대한 스트러글을 보여줘 왔다고 할 수 있다.6) 이제는 삶의 차원 자체가 예술화, 퍼포먼스화되는 것에 있어서인지 ‘예술’과 ‘퍼포먼스’라 하였을때에는 물론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고 꺼림칙한 지점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담담하게 그리고 광범위한 차원에서 예술을 아우르는 삶이라는 맥락에 대해 운을 먼저 띄어봤다. 사실 삶의 조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하우징여부라든가 복지, 생산성 등과 같이 삶을 안전하고 윤택하게 영위할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떠올린 것은 아니다. 삶이라하면 아마도 그 어떤 '생명'이라 할지라도 그 여정에서 고유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느냐, 즉 그 생명의 탄생과 ‘잘 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배제되고 소멸되는 것 대해서 그것을‘법’과 ‘의료’와 ‘생명과학’등에 떠넘길 것이 아니라, 윤리적 책임을 갖고 대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관건일 것이다.
근대 국가의 탄생과 지속,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변모에 있어서는 우선 거시적인 차원에서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예외상태를 통해 어떻게 국가 권력이 재창출되어왔느냐의 문제가 있다. 이후 연속된 과정에서 시스템을 둘러싼 폭력적 작동 방식, 예를 들면 관료주의의 스투피더티라든가, 자본주의의 착취가 가져온 개인주의의 폐혜로써의 공동체의 와해라던가, 제도화가 가져온 인간 삶의 메뉴얼화(길들여짐)과 같은 문제들은 이어졌다. 사실 후자의 경우를 시스템적 폭력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이제는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증식하고 일상적으로 소비되며 그 양상이 (무관심과 체념적 냉소의 한 쌍으로서의) 잔인함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 ‘생명’이 삶을 일궈가는 데 있어서, 고유한 가치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그것을 이후 나눠 가는데 있어서 절망적인 정서가 확산되는 이유가 되었다.
근대를 통해 주목된 '예술'장치의 기능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면, 여타의 장치들이 작동하는 방식 중에서 특히 '폭력적 방식'에 대한 '저항 혹은 대응 혹은 왜상'으로서의 기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무관심과 체념적 냉소라는 잔인성과 그를 둘러싼 절망적 정서들의 확산 속에서 예술, 특히 제도적으로 길들여진 예술은 그 역할이 다소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확장 혹은 분산된 차원에서의 퍼포먼스는 가령 충동이 소비되는 과정에서 소멸되는 충동의 고유한 특질, 즉 폭력적 촉발이라는 특질을 가장 잘 무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포함된 예술이란 언어는 기호가 상징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삭제, 배제, 늬앙스의 탈락 등을 가장 잘 보완해오기도 했다. 생명이란 것은 그것의 통치, 즉 주체화 혹은 주권을 획득하는 과정과 관리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촉발되는 소멸상태와 예외들, 소수적인 것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권력의 장이라기보다는 예술의 장에서 오히려 이러한 소멸의 상태라든가 소수적인 것이 가장 생동감있게 거주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죽음과 소멸에 대한 무관심과 무능을 가장한 통치술에 대응하는 그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을 예술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1) 이 글에서는 애초에 유주루 마에다Yuzuru Maeda(일본출신으로 싱가포르에서 거주하며 작업해옴)와 카이람 Kai Lam(싱가포르 거주 및 작업)의 몇몇 작업들과 광주 뽕뽕 브릿지에서의 전시 <POW!>를 다루고자했다. 그런데 두 작가의 경력이나 무게상 한 지면에 다루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이 글에서는 카이람의 작업에 대해서 먼저 다루고, 유주루 마에다의 경우 다른 지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유주루 마에다의 젠타이 프로젝트 Zentai Project의 연장선에 있는 <Those who are the last> (뽕뽕브릿지에서 행한 5시간 듀레이션 퍼포먼스)의 경우, 싱가포르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리웬Lee Wen의 작업과의 연관성과 더불어 인디비주얼과 다문화주의의 이주와 연관성 속에서 다뤄볼까 한다.
2) 뽕뽕 브릿지 전시<POW!>와 <어노잉 브레인>워크샵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소개했듯이 카이람(1974- , 싱가포르 거주)은 애초 싱가포르 라살 칼리지와 호주 멜번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였고 페인팅 작업도 병행하지만 무엇보다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알려져있다. 그의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서의 출발은 싱가포르에서 The Artists Village의 2세대로 참여하게 되면서였다. 예술에 있어서의 공공성, 대중과의 호흡, 사회적 역할 등에 대한 문제의식들은 2000년 초반 싱가포르라는 다문화국가에 있어서의 ‘컨템퍼러리’와 ‘실험성’, ‘멀티디스플리너리’ 방식 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아마도 <post-ulu show>(1999 마지막날부터 2000년 새해 첫날 이틀간 벌인 듀레이션 퍼포먼스 행사)이후일 것이다. 이후 그는 <p-10>(2004-2008)에서의 공동 활동, <AIM> 기획(2004, 2005), <F.o.I>(2003-)라든가 <R.I.T.E.S>(2009-)등을 공동 조직하였다. 공공장소에서의 퍼포먼스에 있어서 검열기준이 명확하고 절차가 까다로운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면서 카이람은 그러한 어떠한 사회에서도 검열기제가 있으며 작업에 있어서의 특수한 맥락이 됨을, 그리고 그에 항상 도전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해오고 있다.
3) https://vimeo.com/123810117
4) 잘 알려졌다시피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한다>의 1976년 3월 17일 강은 바이오 폴리틱스, 즉 “생명관리 정치”가 어찌하여 잔인한 신자유주의적 통치 비판인지를 역설한다. 근대 이래의 권력이 ‘생명’이 삶을 구성해가는 것에 관여해오면서, 즉 생명만을 관리하면서 사실상 ‘죽음’은 지극히 개인영역화 되버린다. 이리하여 권력은 ‘죽음’을 더 이상 신경쓰지 않으며 무시하게 되었고, 일례로 독재가 통치권을 갖게 되었을 때 사실상 무자비한 ‘죽음들’을 방치하는 것이 통치권력의 필수가 되게 된다. 이로부터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권력 또한 지속적으로 비판되는 데, 그것이 개개인의 몸뚱아리의 죽음, 즉 (불필요한) 생명이 스스로 소멸하게 내버려두는 통치술이라는 점 때문이다. 나아가 오늘날에 보듯이 이러한 배제의 대상이 되는데 있어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점 또한 자명하다. 현대의 비판 지성들이 행하는 바, 첨단의 기술비판이라든가, 포스트 휴머니즘에 바탕한 예술비평이라든가 미디어 비판들에서 보듯이 이러한 배제당함에 있어서의 예외없음은 기술의 회전, 미디어 매개 그리고 정서적 전이를 그 작동방식으로 하고 있다.
5) ‘폭력’에 대해서는 주로 벤야민의 소논문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든가 <목적없는 수단>등을 통해 경유해 다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어떻게 국가 권력이 폭력사태(테러, 폭동, 전쟁 등)를 제압해가느냐에 따라서 통치권력을 재편해 왔으며, 국가가 시민의 안전이라든가 국가의 안보와 지속 등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법적 권력은 그 자체로 계속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오늘날의 안보상태는 일종의 근대를 통해 재편해온 통치권력의 폭력의 효과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며, 광고하려는 컨텐츠가 됨을 알 수 있다. 현실에서는 사실상 이러한 안보조차 국내외로 위협받음에도 불구하고 통치권력은 ‘거래’에만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미 국지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의 폭력들에 의해서 불필요한 생명이 무방비로 죽게되거나 배제되는 것을 내버려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나 마찬가지다.
6) Rose Lee Goldberg, performance live art since the 60s, Thames&Hudson, 2004(1998년에 처음 출간되고 2004년에 재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