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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미학 1, 소통의 장소로서 도시 공간

1.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의 제도 유입과 저항이라는 반목적인 과정에서 드러나는 희망과 비판, 즉 예술이 인간의 지각을 더욱 심오하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 혹은 현대예술가들은 어떤 혁신적인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았고 자본에 대한 타락이며 소통의 타락이라는 비판 속에서, 내가 ‘거리’에 주목하는 것은 거리가 그 자체로서 ‘공적인 공간’, 즉 전적으로 (공공 공간으로서의) ‘국가의 공간’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으로 표상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간 안에서 예술은 어떻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으면서 자신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프랑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장을 거리로 선택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전시 기관의 부족, 미술사적인 변화 및 사회(현실)에 대한 대응 등이었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은 심층적으로는 투철한 삶의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근원에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국제 상황주의자들이 도시 공간을 바라보는 주요 개념들, 1980년대 초 거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등장한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운동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로 인해 거리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점차 공공구매기금 액수가 늘어남으로써 장소에 맞춰 몇몇의 작가들이 일회적인 특별한 작품을 제작하고, 정치적 계산이 뒷받침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작가들이 국가적 추세에 따른 공간의 확장으로 다양한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열린 기회 역시 제공받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프랑스 도시 공간 속 예술의 특징이 크게 기관에 의해 선정된 작품들과 예술가들 스스로의 자율적 판단에 의해 도시 공간을 점유(개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의 상호 공존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들어서 프랑스는 후자의 예술적 활동을 보장해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가고 있다. 도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선보여 줬던 프랑스 예술가들의 다양한 활동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제약된 여건 속에서 ‘관’에 의한 ‘활발한’(?) 도시 미술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거리에서의 활동이 대부분 제약되어 있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또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한국의 도시 미술은 ‘공식 미술’의 활동으로만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더 나아가 예술가들이 다양한 활동을 제공받을 수 있는 여건은 무엇일까?

느리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서, 나는 비평지 『전달』의 제 2판(Vol. 2)부터 《거리의 미학》에 대한 소고를 연재한다.

2. 프랑스 도시 예술의 다양한 지표

프랑스 예술가들의 아방가르드 정신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문학가, 철학자, 그리고 비평가들과의 교류에 의해 상호 보완되어 왔다. 정도의 강약이 있겠지만, 그 중 ‘거리’는 시대의 사회적·역사적 고찰 및 예술적 영감을 길러오기 위한 중요한 원천이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거리의 저급한 산물들(les sauvages)에 대한 관심과 도시 공간의 벽에 드러나는 흔적들을 거리의 박물관으로 인식했다. 시를 통해 저항의 자아를 표출하고, 반항의 도시로서 파리의 분위기를 묘사했던 아르튀르 랭보를 비롯해,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루이 아라공 역시 파리의 벽과 거리에 대해 묘사했다. 파리 거리의 분위기와 벽에 쓰인 낙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던 브라사이(Brassaï) 역시 벽에 써지거나 그려진 낙서가 항상 반달리즘(le vandalisme)을 의미하지 않고, 때때로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인 조형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1) 일반적으로 낙서에서 반달리즘의 의미는 벽의 왜곡된 이미지들, 서투르고 조잡한 그림, 사적인 메시지, 공격적인 행위 등과 관계된다. 그러나 미술에서 ‘반달적인’ 행위는 정치적·사회적 표현, 예술적 형식에 대한 반항, 지배적인 사유 관념체계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이 거리에 대한 리얼리즘적 시각을 통해 거리를 다양한 내용이 거주하는 공간, 즉 박물관처럼 ‘묘사’한 반면, 1960년대 이후의 프랑스 예술가들은 직접 도시 공간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에르네스트 피뇽-에르네스트(Ernst Pignon-Ernst)는 장소에 대한 특별한 선정, 메시지의 표출, 시적이고 은유적인 작업을 통해 자신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의 행위는 도시 속 예술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그의 활발한 활동과 1980년 초 스트리트 아티스트들과의 만남으로 프랑스 도시 예술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거리에서 스스로 주체적인 행위와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을 맘껏 표출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작가 개인의 자율성 문제, 극단적인 실험을 통한 엘리트미술에 대한 고민, 예술의 상업화에 따른 수많은 위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중재, 일상적 삶을 표현하기 위한 유희적 표현 양식 등을 연구하면서 서로 협업(collaboration)을 하거나 ‘이주’(타 지역에서 작업)하고, 점차적으로 전문 포토그래퍼를 동반시키는 등 거리 전시의 흔적을 남겼다.2) 프랑스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국가와 대중의 관심을 유발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과 문화에 오랫동안 깊이 뿌리내린 아방가르드 정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실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예술적 혹은 실천적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상황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일상생활의 굴레 속에 참된 놀이의 형태로 나타난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 범위를 도시로, 다시 사회 전체로 넓혀갔으며, 변화의 주체를 개인에서 대중으로 확대했다.

1980년대 이래, 스트리트 아티스트들과 거리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미술을 도시 환경 속에 두루 퍼지게 했다면, 국가 또한 거리에 대한 이러한 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대미술 지역기금(FRAC : Fonds régionaux d’art contemporain) 위원회가 창설되고, 쟉크 랑이 문화부 예산을 대폭 늘리면서 국가가 발주한 광대한 예술프로그램은 프랑스 전체를 천장이 없는 거대한 미술관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3) 프랑스 도시 예술이 ‘관’에 의한 예술과 예술적 자율성에 의한 개인적 행위가 공존되어 온 양상과 달리, 한국에서는 예술가들이 대중적인 공간 안에서 자신의 표현을 실현하는데 수많은 제약들에 직면해 있다. 어떤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들은 우리 사회에 팽배하게 자리 잡은 수많은 문제들을 보지 못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대중은 때때로 이용당하거나,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권력 안에서 이루어진 소위 예술 제도권은 예술계를 선도하기도 했다. 기관이나 정부의 후원에 의해 설치되는 일반 조형물과 장식 미술이 보여주는 장소와의 적합성은 그다지 설득력을 지니지 않으며, 지역 산업과 관련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들은 일회성 프로젝트에 그치며 다양한 예술 활동과 사회적 반향을 양산해 내지 못하고 있다.

놀이 공간으로서 도시를 바라보는 예술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현실의 공간에는 불가피하게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미술계는 이 은밀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데 주목한다면, 뒤늦게 합류한 한국 도시 예술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공간에 대해 예술가들 스스로 성숙한 표현 양식을 발전시키며, 비판적 태도와 주체적인 창조성을 발현시킬 때, 미술계가 타당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번 소고에서는 먼저 ‘관’에 의해 주도적으로 결정되는 한국의 도시 예술·문화 프로젝트 안에서 예술가 스스로 주체적 위치를 가지며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시각장의 파괴와 재구성, 소통의 장소

광주 폴리(Folly) III에서 시민 공모전 진행으로 당선된 뻔뻔 폴리 프로젝트의 김찬중&진시영의 작품 《빛의 산책》 시리즈를 살펴보자. 이 작품들은 광주 동구 충장로 4, 5가 주변과 문화전당 주변에 설치되었다.4) 김찬중&진시영의 《빛의 산책》시리즈는 크게 네 개의 카테고리, 즉 <미디어 셀>(광주 사랑방), <무한의 빛>(충장로 커피 옆), <미디어 월>(다미가 옆), <소통의 문>(거북이 안경 옆)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찬중&진시영의 《빛의 산책》시리즈는 전문 심사위원이 선정한 8팀들이 시민 공모전에 선정된 3개의 아이디어를 참조·재해석해 제출한 제안서를 최종적으로 시민 심사를 통해 선정된 작품이다. 시민참여형 형태는 광주 폴리(Folly) III에서 크게 두 팀의 작품에 해당되는데, 김찬중&진시영의 《빛의 산책》시리즈와 네덜란드 건축가 위니마스의 <I LOVE YOUr street> 작품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결과를 발생 시켰다. 먼저, 사라질 위기에 놓인 서석 초등학교 보행자로에 주목한 위니마스의 <I LOVE YOUr street> 작품은 지역주민과 함께 결정되어 나온 최종 결과물이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안 수정을 통해 나온 이 결과물은 시민이 기획의 단계부터 개입하는 것이 반드시 소통의 결과로서 도출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한다. ‘소통’의 힘은 시민 참여뿐만 아니라, 작품 그 자체에서도 발현되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해 재현한 작품을 통해 대중과 교감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물론,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과정 속에 대중과의 논의, 즉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작품 제작 방식, 즉 미학적 코드에 대해 대중을 관여시키는 것은 좀 더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미적 코드는 작가 고유의 표현이며 작가가 대중과의 협업에서 제작방법과 판단의 주체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할 경우, 소통을 위한 대부분의 작품이 정작 진정한 ‘소통’에는 실패하게 될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찬중&진시영, <소통의 문> , 광주폴리 III, 충장로 5가 거북이 안경 옆.

이에 반해 뻔뻔 폴리는 시작 전부터 시민에 의해 선정된 작품이었다. 설계안에 대해서는 수정이 요구되지 않고, 작가들 스스로의 고민, 즉 장소의 문제 및 건물주와의 관계에서 수정, 보완이 이루어졌다. 두 작가는 시민 공모안을 통해 선정된 제안서들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살펴보고, 우연한 곳, 숨겨진 곳, 닫힌 공간 등을 주목했다. 특히 <소통의 문>에서 진시영은 전시 작품 설치 중 지역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작품 설치 변경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건물주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마주보고 있는 두 벽 사이 위의 천장에 LED를 설치하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진시영은 들어오는 입구와 마주한 막힌 벽의 건물주와(자신의 벽을 뚫어서 연장된 천장위에 LED 설치하는 것) 상의해서 벽을 뚫게 된다. 따라서 원래 충장로 5가에서 마무리될 작품은 막힌 골목이 더 연장됨으로써 금남로까지 연결되었다. 세 명의 건물주는 작가의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고 전적으로 작가에게 더 넓은 공간을 내주는 데 이르렀다. 그리고 검은 벽과 흰색의 추상적 선 페인팅을 추가로 작업하기 위해 주민들이 기관에 예산을 재건의하기까지 했다. 애당초 두 벽과 막힌 벽을 사용해 닫힌 공간이 될 수 있었던 이 공간은 시민과 진시영의 토론 끝에 충장로 5가와 금남로를 연결하는 골목, 즉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이렇듯, 우리는 <소통의 문>을 통해 진시영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스스로 주체적 위치를 가지며 설치된 장소의 주민들을 설득시키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주민 역시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애착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피력하고, 그에 따른 반영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전적으로 작가를 믿으며 미적 표현에 수정을 요하지 않는 태도, 예산에 대한 작가의 고충을 이해하고 서로 도우며 더 나은 작품을 펼칠 수 있게끔 했다. 많은 작품들이 ‘관’과 시민과의 소통의 문제에서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제작 후 관리에 대한 부분은 여전히 ‘관’의 성숙한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21세기 문화예술을 사랑하고자 하는 국가 주도의 수많은 노력에 힘입어 시행되는 다양한 예술프로젝트가 설치되는 상황에서, 설치된 장소의 ‘관’과 광주 ‘시’, 그리고 프로젝트 운영 ‘재단’과의 정책 협업을 통해 성숙한 제작 후 관리 및 예술작품에 대한 애착이 들어날 수 있는 행정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탄생한 <소통의 문>이 도시 공간을 활용하며 우연한 장소를 재발견하면서 어떠한 미학적·비평적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은 천장에 설치된 LED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의 상호 작용 및 공간의 새로운 경험을 보여준다. 명주실에서 영감을 받은 LED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엮어주듯 배치되어 있다. 좁은 골목으로 끝날 이 작품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공간을 연장하게 되고, 검은 벽 위에 흰색의 추상적 선을 연결해 좁은 건물 사이의 현실적 공간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을 받게 한다.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빛의 움직임이 어두운 골목 사이를 새롭게 경험케 한다. 관람객은 그 곳에서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느낄 수 있다. 관찰자는 눈으로만 영상(빛)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 (빛의) 이미지를 새롭게 획득해 나간다. 관객은 이미지 ‘앞’에 서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세계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때 관객들의 움직임으로 자기 앞(위)에 있는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형태가 만들어지며 이미지가 변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몸은 단순히 그것의 토대가 되는 현상적 차원을 넘어서서 직접 움직이며 세계를 변형시키는 훨씬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고유한 몸(propre-corps)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자아의 현존은 물리적 경험으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몸성,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신에 대한 경험이다.

눈을 통해 그 곳을 바라보며, 몸은 그렇게 구성된 공간을 경험한다. 여기서 시각행위의 중심은 더 이상 보이는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호소하고 반응하는 시선의 상호 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는 시선의 동적인 기능에 있다. 인간이 한갓 ‘수동적인 수용자’로 전락할 수 있는 ‘추상적인’ 이미지 앞에 진시영은 공간의 이해와 상황 속 라이트의 움직임을 통해 몸 그 자체의 지각의 문제를 제기한다. 인식 주체를 자기 성찰로 안내하고, 상호 작용으로 이끌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유희의 공간을 확보한 진시영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변적인 눈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구체적인 몸과 결합된 현상학적 눈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몸의 지각,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시영의 고민은 2000년 초부터 활발히 이루어져왔다. 특히 인공 빛(라이트)의 움직임에 인간의 선(무용수의 춤)을 가미하고, LED 빛을 발현시키며 자연(일출 일몰 등)의 변화를 재현시키고자 함으로써 그는 화면에 회화적 감성과 색채를 구현해냈다. 따라서 그가 보여주는 ‘추상적인 선’은 기계에 의해 이성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무용수의 움직임, 인간 그 자체가 가상공간에서 몸을 통한 유기체적 선으로 구성된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인간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진시영의 이러한 시도는 그의 다양한 작업에서 드러나는데, 최근 나주 금성홀에서 개최된 미디어 파사드에서 또한 느낄 수 있다.

미디어 아트와 발레가 결합된 융복합 미디어 퍼포먼스 <금성관, 천년의 빛을 입다>

Media Facade, 3 channel video projection, 15분 21초, Sound

총감독 미디어 아티스트 진시영, 안무 조가영, 음악감독 박웅서

사진제공 (유)시온미디어

4. 경계를 넘는 미디어 파사드, 새로운 지각의 파노라마

관객의 실제적인 경험, 즉 관객의 참여에 의해 예술작품의 의미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디지털 예술의 특성을 잘 설명하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질 들뢰즈는 영화의 ‘클로즈업’이 관객의 몸에 직접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기제라고 주장한다. 이는 서사에 몰입하거나 일탈해 어떤 긴장감이나 초조함을 느끼게 하는 장치이다. 다시 말해 클로즈업은 영화에서 서사의 연결을 방해하는 정지와 ‘간격’의 역할이다. 이를 통해 영화적 서사 안에서 질적인 도약이 가능해진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상의 컷(편집) 장면과 클로즈업 등을 통해 관객은 제시된 영상(영화 속)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정서적 반응에 대해 앙리 베르그송은 ‘정념(afffection)’이라고 부르는데, 그에게 ‘정념(affection)’은 ‘지각(perception)’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베르그송의 지각 이론에서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l’ensemble des images)’이다. 이러한 물질(이미지들의 총체)을 지각하는 인간의 몸 또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몸의 이미지는 다른 외부 물질의 이미지와 달리 어떤 특권적 지위를 갖는다.5) 즉, 나의 신체는 외부에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부에서도 알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이미지다. 밖에서 들어오는 자극은 내 안에서 감각이나 감정과 같은 정념적 상태를 야기하는 데, 이것은 이미지들간의 기계적 작용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움이다. 또 한편으로 외부에서 볼 때도 내 신체는 다른 이미지들과는 달리 받은 자극을 반응으로 되돌려 주는 방식을 어느 정도는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러한 신체의 신경계의 발달은 생명체의 행동 속에서 생명체의 선택 앞에 남겨진 비결정성의 몫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지각이 풍부해진다는 것은 곧 비결정성의 정도(la zone de l’indérmination)가 증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나 디지털 기계는 비결정성을 증대시키는 풍부한 지각을 제공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지각을 협소하게 만들 것인가? 베르그송은 이에 관해 사유의 영화적 기제는 기계론적 환상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사상을 더 멀리 밀고 나감으로써 영화나 디지털 기술이 비결정성의 지대를 증가시켜 지각을 확장시킨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이미지의 총체로서의 물질을 하나의 관념이나 표상의 형태로 마음속에서 형성하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미지들을 물질이라고 한다면, 내 신체와 관련된 이미지들만 선별되어 내 가능적 행동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바로 이 가능적 행동에 관련된 이미지들이 물질에 대한 나의 지각이 되는 것이다. 즉, 사물이 지닌 무한한 이미지들 중 일부를 걸러내 하나의 이미지로 표상할 수 있도록 필터링이 필요한데, 이러한 필터링의 행위가 신체의 ‘정념’의 활동이며, 이 정념의 활동은 전적으로 신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6)

베르그송의 지각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바로 몸이 프레임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프레임 활동을 구동하는 몸의 기제가 바로 정념이고, 우리가 현실세계를 지각한다는 것은 무한한 이미지의 일부를 걸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몸은 프레임된 이미지를 수용하는 기관이 아니라 이미지를 프레임하는 능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가 언급한 것은 이미 기계에 의해 프레임화 된 이미지이며, 대부분 디지털 예술은 디지털 미디어에 의해 프레임화된 이미지를 몸으로 수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디어 파사드 역시, 영상의 경우처럼, 미디어라는 프레임에 의해 이미지가 이미 만들어졌고, 이때 우리의 몸은 프레임하는 주체가 아닌 프레임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수용체에 불과하다. 관객은 무대를 감시하는 권력자의 시선을 지닐 수도 있지만, 동시에 파사드의 담론이 빠른 속도로 투사되면서 지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에서 공간 속 몸의 개입이 중요하다. 칠흑 같은 암흑이다. 공간은 검은 도화지가 되었다. 관객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무채색(흰색)의 천을 입은 무용수들이 한 줄기의 빛과 함께 관객의 공간에서 건축물 앞으로 걸어온다. 천의 부드럽고 나풀거리는, 차가운 공기 속으로 걸어오는 무용수들의 발걸음과 빛의 움직임, 그 속에 거주하는 관객 역시 그 빛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어둠도 그들을 내려다본다. 파사드는 점차적으로 나주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연의 갖가지 색으로 채색되어 간다. 무용수들의 몸에 입혀진 색은 건물의 파사드와 연결되며, 과거의 시간은 현재, 그리고 미래로의 도약을 제시한다.

관객의 공간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따라 관객의 시선을 파사드로 옮긴다. 이를 통해 진시영에게 있어서 화면(파사드)과 실제 공간(밖, 어둠)의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이곳에서 파사드와 실제공간은 미디어에 의해 프레임화된 공간이 아닌 몸 자체가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재창출된다.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진 기존의 객석 공간과 무대는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창조된다. 그 속에 관객은 ‘거주한다.’ 그리고 진시영의 미디어 파사드는 관객에게 새로운 지각의 파노라마를 선사한다.

5.

‘관’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되는 예술프로젝트에서 예술가 스스로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들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대중 역시 더욱 성숙하고 배려 있는 행동으로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고 작가의 창작 행위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서구 현대예술가들이 기존의 방법으로 진행되었던 예술 제도와 공공미술의 주문 방식에 도전하고, 도시 공간 안에 조형 예술을 설치하는 데 관여했던 수많은 결정권자들의 간섭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왔음을 주목해보자. 이들은 도시 공간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개입하며, 공공 공간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중재적이며 실천적으로 행동한다. 도시는 그들에게 공간을 제공할 뿐이며, 이들의 반항적이고 저항적인 태도는 거리의 예술전시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며, 도시를 놀이 공간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활동은 도시 안에 존재 하는 다른 예술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도시에 대한 기존 방식과는 다른 이해와 지각을 우리에게 제안했다는 점에서 한국 예술가들 역시 더욱 적극적으로 ‘창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의 긴 여정이 시작될 《거리의 미학》은 보들레르가 언급했던 산보객(flâneur)처럼 도시에 대해 성찰적 자세를 유지하는 것, 즉 우리의 성찰적 거리감을 요한다. 지시대상 없는 기호, 이미지의 파편, 외양으로만 존재하는 이미지들이 실재를 미혹하고 현실을 구성하면서 미래를 무방향성으로 이끌어간다는 허무주의에 빠져있기 보다는, 구성원들이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자각을 통해 예술적 실천을 이루어갈 때 이러한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의 빛이 솟아날 수 있다.

 

1) Guillaume Apollinaire, “Le Flâneur des deux rives” (1918), Michel Décaudin et Pierre Caizergues (éd.), Œuvre en prose complètes, 3 vol., Paris : Pléiade, 1977, p. 6. : Gauillaume Apollinaire, “À la santé”, Alcools, 1913, 5e édition, Paris : la Nouvelle Revue Française, 1920, pp. 150-153: Louis Aragon, Écrits sur l’art modern, op. cit., pp. 29-30: Brassaï, “Poeme sur les graffiti”, Graffiti, Paris : Flammarion, 1993, p. 151: Brassaï, “du mur des cavernes au mur d’usine”, Minotaure, no. 3, Paris, Décembre, 1933.

2) 미국과 프랑스의 스트리트 아트 운동에 대한 차이 및 스트리트 아트의 정의에 대해서는 양초롱, 「스트리트 아트 운동의 등장과 전개에 대한 역사적 고찰 : 198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현대미술학회, 제19권 1호, 2015을 참조할 것.

3) 카트린느 미예는 ‘관’에 의해 주도된 공식미술은 미술의 껍질을 깨고 환경의 총체로서의 미술에 전념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즉, “건축, 조경, 사적지 안에 현대미술을 통합시키는 작업을 꾸미기 위해 수많은 행정 계통 기관들이 이용되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사회는 미학과 도덕적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의 조정을 받는 신문의 몇몇 관계자들, 프랑스의 예술계에서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여러 명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들 등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고 비판했다. 카트린느 미예, 『프랑스 현대미술』, 염명순 옮김, 시각과 언어, 1993, p. 330.

4) 광주 폴리I은 광주 옛 읍성터 복원, 역사와 현재를 잇는 광주 폴리(2010-2011), 광주 폴리II는 인권과 공공 공간(2012-2013), 그리고 광주 폴리III의 주제는 도시의 일상성-맛과 멋(2014-2017)이다. 광주 폴리 III과 관련된 범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뷰 폴리: 리얼리티즈 유나이티드 & 문 훈의 <자율건축 Architecture of Autonomy>은 광주영상문화복합관 옥상위에 설치되었다. 삼각형의 트리비전 공작물(높이 5.2m, 폭 0.6m)이 33개로 이루어져서 구성된 “CHANGE”라는 단어는 무등산(해발 1185m)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형성한다.둘째, 광주-네덜란드 폴리: 조병수, 위니 마스(MVRDV)의 작품 <꿈 집 Dream House>와 <I LOVE YOUr street>은 광주 동구 산수동, 서석초 보행자로에 설치되어 있다. 이 두 작품은 광주비엔날레재단과 네덜란드창조산업기금, 그리고 광주시의 양국 건축가의 리서치를 통해 제작된 작품이다. 도시의 일상을 체험하고자 의도된 작품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서석 초등학교 보행자로에 주목한 <I LOVE YOUr street> 작품은 지역주민과 함께 결정되어 나온 최종 결과물이다.셋째, 쿡 폴리: 카페&바 형태의 유리온실 ‘콩집’과 한식을 제공하는 한옥 ‘청미장’을 장진우 건축가가 재건축 했다. 이 작업은 구도심 재생, 청년실업, 청년창업, 지역균형발전 등과 같은 화두에 접근하기 위한 일환으로 제시되었다. 넷째, 뻔뻔(Fun pun) 폴리: 참여형 폴리로 시민 공모전 진행으로 당선된 김찬중&진시영이 동구 충장로 4, 5가 주변에 설치했다. 다섯째, 미니 폴리 : 국형걸 & 신수경과 라이프 한센이 설치한 <인피니트 엘리먼츠>와 <스펙트럼>이 광주비엔날레재단 광장에 설치되었다. 《광주광역시 광주 비엔날레 제공》

5) “모든 이미지들은 내가 자연의 법칙이라 부르는 항구적인 법칙에 따라, 그것들의 모든 요소적 부분들 속에서 서로에게 작용하고 반작용한다. (...) 그러나 내가 지각들에 의해 밖으로부터 알 뿐만 아니라, 정념들에 의해서 내부로부터도 안다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나의 신체이다.”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가넷, 2005, pp.37-38.

6) 앙리 베르그송과 질 들뢰즈의 철학적 논의는 다음의 저서를 참조할 것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가넷, 2005: 질 들뢰즈, 『시네마 I: 운동-이미지』, 유진상 옮김, 시각과 언어, 2002; 『시네마 II: 시간-이미지』, 이정하 옮김, 시각과 언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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