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시대에
그곳에서도 노래가 불러질 것인가?
그곳에서도 노래는 불러질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대해.
베르톨트 브레히트, <어두운 시대>, 스펜보르 시편에서
이 글은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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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준 높은 상품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반면, 미술작품은 역설적으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자신의 저항 대상이었던 정치, 후원, 시장 등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하나의 상품이 되고자 한다. 그동안 시각 미술과 대중문화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요구되어왔지만, 사실 이 시대의 미술의 위기가 단순히 장르 및 대중 산물의 혼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미술은 미술사의 과거 모든 형태들을 재해석하면서 현 시대의 반영에 대한 타협적인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미술은 평범하게도 시대에 맞춰 그 자신을 영원히 반복 한다. 미술과 현실과의 타협이 이토록 적극적인 시대가 있었는가?
굶주림과 빈곤, 실업, 부당함 등이 창궐하는 세계에서 미술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본래적인 미술의 사회적 기능을 잃어버리고, 수세기 동안 누려온 예술적·문화적인 신뢰를 잃어버렸는데도 미술은 자신의 상태를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기존 제도에 저항하고, 그 자체로 창조적이면서 인간적 가치를 발현시키고자 했던 미술은 미술계의 자본주의와 엘리트주의, 속물근성 등에 예속되었다. 아니, 더 선두에 있다. 이 상업적 아방가르드는 오랜 기간의 학습으로 예술의 아방가르드 방식과 태도를 너무나도 흡사하게 모사한다.
과거 예술을 대표했던 미술이 그 본래적 힘을 상실한 것은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필요 없는 미술이 예술로 가장한 채 섞여 있고, 그러한 구분을 하기 힘든 현 상황으로 인해 미술이 죽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평범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대미술이 초미적이고 초정치적인 것이 되면서 스스로 현실 속에서 사라지게 됨을 지적했다. 이러한 미술의 운명은 미적 판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함 속에 잉태되어 있다. 현대미술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진실과 허위를 해석하는 담론으로서의 미학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술의 다양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미술은 자기유용성에 대한 맹목적이면서도 공허한 집착을 보여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미술이 고상한 척 온갖 바람직한 형태들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유용한 목적을 위해 진실을 노골적으로 은폐한다는 데 있다. 견고하고 공생적인 타협을 지향하는 이러한 미술은 우리가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도 표출할 수도 없게 한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으며, 그리고 진행되고 있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미술은 지각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우스꽝스럽게도 없는 현실을 재현한다. 즉, 이러한 미술은 현실의 정직한 증언을 토대로 새롭게 해석하는 창조적 힘에 자신의 존재근거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창조하고자 현실을 조작한다. 이러한 미술이 실제로 무가치하다고 말하기에는 모든 현상이 당연히 받아들여져서 실제 같다. 이러한 미술이 계속해서 찬양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허구와 실제가 복잡하게 뒤엉킨 이 현실이 우리에게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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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미술은 작품 그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칼 마르크스가 언급했듯, 화폐는 사회의 생산 관계 안에서 비로소 자본이 된다. 따라서 미술의 내적 상황(예술 작품 자체) 뿐만 아니라, 미술의 외적 상황, 즉 작가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적 상황과 관계된다. 학습되고 모사된 아방가르드 작품은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선별된 작품처럼 전시되고, 언론에 노출되면서 대중에게 각인된다. 그런데 예술이라고 하는 것들이 모두 예술이 아니다. 가짜일수록 자신의 몸값을 더 높일 수 있는 명성을 찾는다. 예술의 객관적 평가를 위해 구성되어야 할 미술계는 종종 형편없는 서로의 작업을 정당화시키고자 커넥션을 형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한다. 때로는 정말 모르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앙함으로써 형편없는 정당화에 기여한다.
물론 의미 있는 해석과 가치의 판단을 수행할 주체로 예술비평이 자연스럽게 거론된다. 비평이 미술가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미술작품의 내부로 잠입해 그것을 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입각한다면, 미술에서 비평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독자적인 대상으로서만 이해하기 힘들다. 작품 그 자체가 ‘순수하게’ 현실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평은 단순히 작품에 대한 일상적인 시선으로는 식별 불가능한 것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작품 배후에 놓여 있는 문화적·사회적 관계망을 기술하여 대중이 잃어버린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는 상황 또한 보여주어야 한다.
이미 명성을 얻은 작가라 해서 항상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처음 들어 본 작가라고 해서 작품이 형편없는 것도 아니다. 직위, 명성, 작품 가격 등이 당신의 가치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배후의 관계를 이해하지 않는 비평가의 글을 ‘절대적으로’ 믿지 말라. 종종 그들도 보이지 않는 커넥션에 연결되어 공정하지 못한 글을 쓰기도 한다. 우리는 화려한 외형만을 바라보고 전문가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세계의 미술과 좋은 작품들(평론, 철학서, 다른 장르의 예술들, 그리고 전시 등)이 다채롭고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 가능할 때, 당신의 지각은 새롭게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지각된 현실을 재현함으로써 비판 혹은 대항의 표현 매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미술이 그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생각된다면, 이는 미술이 자본의 권력자들에게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와도 밀접히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는 긍정적이고 열린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민주적 형태의 정치가 아니라, 기득권 유지 및 세속 정치와의 타협을 위해 연결되는 것이다. 미술은 예술 외부의 힘으로부터의 구속과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단절한 미술이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현실을 외면한 채 자기 자신(작가 혹은 작품)의 유용성만을 추구한다면, 미술 그 자체는 허상이 된다. 자기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적에 따른 행동의 정당화 근거에 기반 한다면, 스스로의 진정성을 기만하고, 현실의 문제를 은폐하거나 미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축소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자본이 인간을 괴롭히는가? 자본이 인간을 계속 핍박하는데도,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역설적으로 자본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당신의 지각에 의한 작품과 매 순간의 행동이 당신의 작품을 ‘진정한’ 작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당신의 예술 세계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삶이 곧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엄밀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개인의 삶에 요구되는 조건이지 예술의 필수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과 태도가 작품과 얼마나 진정성 있게 결합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진정성은 자신의 삶은 물론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작품과 대면하는 가운데 솟아 나온다. 이때 비로소 나와 세상, 작품이 유의미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개인의 윤리와 철학을 결여한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오래된 숙고와 성찰의 과정 속에서 미술은 반성적 사고와 예술적 상상력을 발현시켰다. 그러한 과정에서 미술이 발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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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그 자체로서, 작품 자체 내에서 현실과의 문제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행동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작가와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 짤막한 소견을 제시했다면, 예술가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지위 상승 및 시장의 형성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베르메르나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판매가 용이한 그림의 크기 및 장르를 선호하였다. 판매를 위한 선호된 작품을 생산하며 대량 생산에 몰두했던 작가들의 작업 방식은 오히려 가격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의 지위 역시 전통적인 수공업자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이 시기의 경제적, 문화적 황금기였던 네덜란드 사회는 현실과 자신 앞의 이익에 대한 추구로 이후의 미술의 발전에 제약을 남겼다. 이에 반해 인상주의 화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미술을 홍보하고 시장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아주 오래 전의 상황이지만, 이들은 19세기 파리 미술계의 사회적, 제도적 변화를 일으키며,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이 시기의 프랑스의 예술적, 사회적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프랑스 정부가 설립한 아카데미 체제 하에서 미술품을 전시하는 주된 제도는 연간 혹은 격년제로 열린 ‘살롱(Salon)’전시이다. 1674년 최초 전시 이래 이 백여 년 간 살롱이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연유는 작품 평가와 전시에 필요한 권위와 정통성을 갖춘 유일한 기관이라는 믿음에서였다. 대부분의 화상들은 살롱의 권위에 의존해 전시 작가를 선택했으며, 수집가들의 경우에는 그 의존도가 더욱 심했다. 1830년대부터 심사를 둘러싼 갖가지 논란과 체제의 보수성 등이 거론되며 살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미술가들에게 명성과 커리어를 구축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살롱의 권위는 지속되었다.
<살롱전>으로 인해 촉발된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정치적·사회적 쟁점을 나폴레옹 3세는 문화에 대한 중립정책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1855년 국제미술 전시회(L’Exposition Universelle des Beaux-Arts)는 당시 현존하던 모든 화풍의 작가들을 초대하면서 의도적으로 각기 다른 화풍의 대표 작가 9인에게 ‘영예의 메달’을 수여했다. 특히 1863년 국가에 의해 개최된 <낙선전(salon des refusés)>에 나폴레옹 3세 자신이 직접 전시회를 참관하면서 <살롱전>과 대등하게 <낙선전>도 대중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의 중립적인 노력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더욱 자연스러운 창작활동을 보장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롱전>을 주관하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운영하는 심사위원 자격 및 통제권에 대한 지속적인 불만이 제기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부 예술가들은 <살롱전>과 <낙선전>의 제도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독자적인 전시를 선보이고자 했다. 클로드 모네가 주축이 되어 모인 이 그룹은 보불전쟁이 끝난 1874년 4월 파리 카푸친 거리의 나다르 사진관에서 <화가, 조각가, 판화가 및 무명 예술가 협회>라는 제 1회 <전람회>가 전시회 개최의 형태로 나타났다. 인상주의의 태동은 결코 순간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십여 년 전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 <낙선전>에 출품하면서 파리 화단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후, 후배의 작가들은 몽마르트 근처의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치열한 토론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길을 추구했다. 이 모임에는 에밀 졸라를 비롯한 샤를 보들레르, 루이스 에드몽 뒤랑, 테오도르 뒤레, 스테판 말라르메 등 주요 문인들과 비평가들이 계속 합류했다. 1870년대 보불전쟁의 여파로 많은 화가들이 징병대상이 되거나 런던으로 피신하면서 이 모임은 해체 되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파리로 돌아오면서 바로 1874년의 <전람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등단의 길로가 국가의 전시 공모전 밖에 없었던 젊은 작가들에게 <전람회>는 새로운 형태의 등단 수단을 마련해주었다. 이들의 전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인상주의 화가들과 문인 및 비평가들이 서로를 지지하면서 예술의 독립성과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는 점이다. 또한 비평가들의 글이 전시 홍보 효과를 선보이고, 당대의 언론에 힘입어 인상주의 전시는 살롱의 위협적인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 10년 동안 8회에 걸쳐 이루어진 인상주의 전시는 살롱 이외의 전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많은 양의 비평 기사가 소개되었다. 1874년의 첫 전시는 51개의 기사가 실렸고, 이후 전시들도 40회 미만인 적이 없었다. 물론 심사에 떨어진 전문 화가들과 취미 화가들이 뒤섞인 전시라는 한계로 인해 전시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발휘되지 못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계속해서 언론의 관심을 자아냈다. 젊은 미술가들을 중심으로 개최된 <전람회>는 살롱 심사위원들의 보수적 취향과 미적 양식, 그리고 권력 남용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단체라는 확고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 냈다.
살롱의 권력 남용에 분노한 예술가들의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국가가 살롱 전시의 일부로 기획하였던 <낙선전>과는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전람회> 회원으로 가입한 화가들이 살롱 전시에는 참여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만들었다. 따라서 마네는 제도권 내에서 <낙선전>을 통해 제도권 개혁을 하고자 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들만의 전시회를 만들어 비제도권에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면서 제도권에 저항했다. 당시의 문제에 직면하고, 돌파구를 찾았던 이들의 행동이 자신들 스스로를 자유롭게 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의 새로운 시도가 20세기에 다양하게 전개된 미술사조의 원동력이 되었고, 새롭게 형성된 미술시장의 초석을 마련하였다는 데 있다. 물론 오늘날의 미술계와 시장은 더욱 복잡한 형태로 형성되어 있고, 한국의 문화적·예술적 토양도 당시의 프랑스와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예술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이 속해있는 제도의 불합리한 상황 역시 파악하지 못한다면, 예술은 이후의 세대에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악폐를 계속해서 남겨주며 청산할 수 없는 어두운 유산을 이후 세대에 물려줄 것이다. 당신은 이후의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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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타락한 천사처럼 시장과 기득권에 연합해 순진한 인간들을 호도하는 것에 반대한 또 다른 흐름, 다양한 예술의 움직임이 있었다. 새로운 미술 형식의 개척과 아방가르드 정신, 그리고 상업적인 제도에서 오랜 기간 획득하고자 했던 미술의 자율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예술의 특징이 되었다. 미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실의 구성 원리로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재현하고, 정신의 외화로서 현실을 묘사하는 데 있다. 이는 작품 그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지만, 예술가들과 현실과의 관계 또한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진정한 예술은 합리적 생산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 삶의 흉측한 몰골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간이든 예술이든 무기력한 존재가 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미래가 사라진 상황에 우리의 상태를 직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예술이 세계를 바라보는 용인된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 시각을 새롭게 한다는 사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예술을 찾을 수 있도록 미술계의 다양한 영역이 올바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예술은 자신들이 이룩한 다양한 형식과 진보들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예술은 자신의 미래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들 스스로도 예술의 메커니즘을 올바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오류와 모순된 과정을 직면할 수 있도록 우리는 개개인에게 지속되고 있는 억압에 대한 자각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결단이 필요하다. 예술은 단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길 원하는지, 아니면 진정한 예술의 형태들과 그것을 이루는 올바른 관계망을 통해 예술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기울이기를 원하는지 자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