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를 써야 할 때가 오면, 그 단어 대신에 적절한 단어가 뭐가 있을까 신중하게 고민한 다음에 쓰곤 한다. 그 단어뿐만이 아니다. 여자와 남자, 혹은 성노동자의 경우에도 그렇다. 직업이나 생물학적 성별, 태어난 고향에 따라서 사람을 구별짓는 것은 폭력적이다. 모든 단어들이 그럴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가진 특별한 것으로 그 사람을 구별지어서는 안된다. 한국 사회에서 존재조차 인지 못하는 성소수자라면 특히 그렇다.
서울에 있는 활동가에게 연락이 온 것은 지난 9월이었다. 원래부터 일때문에 자주 연락을 했었어서 또 무슨 일이 생겼나보다 했다. 일은 일이었지만 활동가에게 연락이 온 건 무척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었다.
‘대만에서 온, 광주에서 한 달을 머물 작가의 보필’
광주에서 심심하게 살고 있는 나에게 그 ‘보필’이라는 단어는 마음에 들었다.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것만 같았다. 그래서 영어도, 중국어도 못하면서 덥석 올란도를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광주같은 도시에서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건 참 심심한 일이다. 어린시절 친구들은 모두 서울로 떠났고, 그나마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조차 선뜻 커밍아웃하기란 힘들다. 커밍아웃은 성소수자에게는 최악의 경우 상대와 관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더 최악의 경우, 나의 밥줄이 끊길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 한 사람만 건너도 모두 다 아는 도시인 광주에서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광주 시민 모두에게 “자 나는 성소수자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광주에 온 뒤로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지냈다. 그 말은 만나는 사람들도 한정돼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심심한 나에게 올란도가 온다니,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한창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구도청 앞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길을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신나는 사람들을 뚫고 우리는 올란도가 먹고 싶다는 한국식 치킨을 먹으러 갔다.
치킨집은 축제 무대의 길 건너편에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소리는 전부 들렸다. 사회자는 “무대에 나와서 뽀뽀를 하면 상품을 드려요!”라고 말했다. 내가 올란도에게 작품을 보여달라고 하고 있을 때, 이런 말소리가 들렸다. “어? 여자 아냐? 여자끼리 뽀뽀하는 건 무효야~ 상품 안줘~”
나는 1920년대를 살았다는 한 레즈비언의 삶이 모두 담긴 올란도의 작품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방금 들은 말을 올란도에게 알려줬다. 올란도는 신기하다며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짧은 영어를 가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본 올란도의 사진작품은 독특했다. 사진 안에 담긴 레즈비언, 그녀의 애인과 가족, 그녀가 키우는 강아지가 함께 있는 사진의 빨간 벽지, 벽에 걸린 사진들과 병풍은 모두 일본식이었다. 올란도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가 대만이 일본에게 점령을 당한 시기라서 그랬다고 했다. 우리도 그 당시에 일본에게 점령을 당했었으니까 나에게도 친숙한 배경이었다.
친숙하지만 대만과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일본에 대한 생각도 모두 달랐다. 올란도도 그 이유를 나에게 물어보고, 나도 올란도에게 물어봤지만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다.
만약 축제에 무대에 올라가서 뽀뽀를 한 여자 두 명이 정말 커플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광주에서 가장 큰 축제 중의 하나인 그곳에서도 성소수자는 없는 존재였다.
올란도는 나에게 “당신의 압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면서 인권활동가로 살아가는 나에게 부모님께 말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거였다. 올란도가 물은 것이 정말 ‘그’ 압박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우리의 언어를 번역해 주는 번역어플은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했었을까?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 질문 때문에 한참동안 고민을 했었다.
대만보다도 먼저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한국, 대만의 젊은 친구들이 일본과 더불어 동경하는 나라 한국. 더 깊게는 민주화의 도시, 제1회 광주퀴어문화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통성기도를 하는 혐오세력이 있는 사회에서 무슨 ‘압박’을 받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올란도는 나에게 광주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정확히는 시스젠더 동성애자인 여성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 부탁이 무척이나 난감했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광주라는 지역에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특히 여성인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시스젠더 동성애자인 여성은 아니었지만, 올란도의 작업에 맞는 친구들을 소개했다. 올란도는 한국의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힘든 이유에 대해서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에게 듣고, 나의 친구에게 직장에서 성희롱 당했던 이야기를 인터뷰해 갔다. 마침 광주퀴어문화축제가 얼마 안 남은 시점이어서 적절하게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도 다룰 수 있었다.
나도 작업에 참여했다. 올란도가 나에게 운동을 해보라고 하자, 인터뷰에 참여한 친구가 추억의 국민체조 음악을 틀어줬다. 그 즈음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그 국민체조에 맞춰서 나와 친구, 활동가와 매니저까지 네 명은 번갈아 가면서 국민체조를 했다. 얼마만의 국민체조인지 ‘헷갈리는데 못추는거 아닐까? 다시 찍어야 할까?’하는 시점에 몸이 알아서 움직여줬다. 노를 젓고 목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랐다. 그래서 올란도와 함께 작업하는 내내 우리는 너무 즐거웠다.
국민체조를 하면서 나는 올란도가 질문했던 ‘압박’에 대한 고민을 해결했다. ‘압박’은 단어였고, 내가 가진 옷처럼 벗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국민체조를 한 네 명은 그냥 ‘사람’이 되었었다.
그 중에서 누구는 인권단체 활동가이며, 성소수자였고, 어떤 사람은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매니저였다. 국민체조를 하는 동안, 다같이 촬영을 하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사람, 그 사람이 학교에서 배운 체조를 하는 것 뿐이었다.
제 1회 광주퀴어문화축제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꼬마가 명쾌한 답을 내려줬다. 엄마를 따라 온 꼬마는 “이게 좋은 축제인지 아닌지 모르는데.”라는 엄마의 말에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은 축제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은 같이 있는 사람들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보면 되는 것”
즐겁게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어떤 단어로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올란도와 함께 지낸 한 달 동안, 나는 즐겁게 사람으로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
재경
2010년부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10년동안 서울에서 공부와 활동을 병행하다가 최근에 고양이 두마리를 끌고 귀향했다. 웹진기획팀, 소모임 전국퀴어모여라에서 활동 중이다. 현재 전주, 대전, 광주를 중심으로 지역에서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