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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나이든 학자는 여섯 살에서 열두 살 정도의 아이들을 위한 강연을 지속적으로 진행했다. 두 손의 몸짓과 아이들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눈빛은 아이들 못지않게 빛나고 있다. 이 강연이 무척 힘든 토론이었다고 밝힌 그는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로 이곳에서 아이들 앞에 서 있는 어른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일깨움과 자아를 발견하고 있는 한 사상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함께’를 통한 ‘자아’의 발견 없이 사유하기(penser)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여유로움과 포용력은 그의 부드러운 어조만큼이나 따뜻했다.
나는 한 철학자의 겸손함, 즉 매 순간의 일깨움에서 자아를 다시 한 번 발견하고자 하는 철학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 감성적이고 다른 이유들 때문에 우리를 혼돈스럽게 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제약을 갖지 않는 인정(la reconnaissance)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키면 될 것이다. 이 단어는 어떤 진리나 인식이 ‘함께’ 태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십 대부터 모든 강의를 중단하고 투병생활에서도 책을 집필하는 학자의 에너지에, 대상을 가리지 않고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어떤 사상가들의 겸손함에, 제자의 능력을 인정하며 제자의 사유의 자립성을 위한 선생님들의 선택에, 예술이 철학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예술의 진실성을 설파했던 열정에, 수많은 학자들을 자극시키고 일상의 삶의 변화와 ‘사유하기’를 발현시키고자 했던 진정한 예술에, 그렇게 서로에 기대어 완성되어 가는 그들의 삶을 나는 사랑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에서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며 사랑에 빠지도록 하는 예술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까?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예술’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수많은 예술로부터 세계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가능할 수 있는 동력을 길러올 수 있는가? 사회의 조류에 부합된 형태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듯, 현실의 의미를 하나의 완성체로 고체화함으로써 세계의 유동적 의미 변화를 포착하지 못하는 예술 역시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공공연연하게 양식이 되어 버린 아름다움, 타인의 양식을 베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 경험과 관찰의 방식으로 지각되는 예술의 기본적인 것들을 배제시키면서 대상의 이미지와 지적 사고에만 의존해 표현하는 행위 등... 이러한 것들이 현대 예술이라 생각하며,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것들이 예술적 행위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자체로 단순하게 되풀이되는 순간부터 형태란 더 이상 아름다움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랭보는 <지옥에서 보낸 한 철 Une saison en enfer>에서 아름다움에 욕설을 퍼부었다. 랭보는 한 시대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자신의 작품에 견딜 수 없었고, 결국 딱딱하게 굳어버린 조화에 대해 말하는 모든 비평으로부터 벗어났다. 이는 자신에 부합되는 것이건, 한 사회의 양식에 부합되는 것이건 조화를 이루는 모든 것을 떨칠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감각과 지각을 서로 접촉하게 하고, 끊임없이 말하고, 사유케 하는 예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당김과 밀침, 낯섦과 친근함, 기대와 절망 사이의 균열된 틈 사이로 의미가 솟구쳐 나오는 예술을 우리는 접하고 있는가?
2. 세 명의 예술가, 그리고 일상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벤자망 보티에(벤Ben, 1935-), 제라르 즐로티카미앙(1940-), 에른스트 피뇽-에른스트(1942-)는 프랑스 도시의 거리에서 평생을 작업했다. 앙리 르페브르(1901-1991)의 이론과 <국제상황주의자> 단체의 활동(1957-1971)은 이들의 예술적 실천에 주요 동인이었다. 자본주의 침투 장소이자 동시에 예술적 실천의 장소로 일상생활에 주목했던 르페브르의 이론은 예술과 정치에 관한 정치가들과 예술가들의 첨예한 입장 차이로 전개되었다.
국제상황주의자 운동에 중심적인 기 드보르가 말한 삶(일상)의 변혁은 예술이 혁명적 운동과 정치적 이상에 기여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예술정치의 실천 장소가 도시 공간임을 선포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폐기함으로써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군사적 행동가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했던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달리, 예술가들은 삶의 변화를 위한 예술의 활동이 시대(현실)에서 분리되지 않으면서 정치적 수단과는 다른 예술의 자율성을 보장받고자 했다. 예술가들에게 도시 공간은 예술이 선동적 전략으로서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 개개인의 자유로운 욕구에 따라 지각할 수 있도록 새로운 상황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벤의 경우, 그의 제스처(몸짓, geste)는 퍼포먼스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대화와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작품이 완성된다. 그러나 벤은 퍼포먼스나 이벤트와 달리 리얼리티를 강조하면서 그의 위치를 대중과 동등하게 대체시켰다. 즉, 벤은 자신의 행위와 예술작품의 가치가 상응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권위적이고, 고귀하고, 가식적인 행동에서 벗어나면서, 동일 주제를 3~5년간 지속시켰다. 예술가들이 일반적으로 관객들을 자신들의 행위에 최대한 동참시켜 ‘자신의 노력(의도)’에 힘을 싣고자 했다면, 그래서 자신의 위상을 더 견고히 지켜왔다는데 기여했다면, 벤은 예술의 진정성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 연유로 그의 제스처는 이벤트성의 퍼포먼스와 다르며, 단순히 자신의 작품을 재-복제하는 게 아니라, 공감과 소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반복이었다.
따라서 관객은 예술작품으로서 벤을 니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의 제스처들이 일상에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그가 거주하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 끊임없이 나가며 관객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의 수많은 행위들은 주체자의 신체적인 행위의 과정에서 보티에 그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 열성적인 해프닝의 위치를 변형하면서 대중과 자아의 상호 행위를 통해 집단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자기희생(auto-abnégation)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보여줬던 예술가 스스로의 엘리트적이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행위들과 달리, 벤은 동일한 주제의 반복적인 제스처로 자신 스스로(ego)를 자각시키는데서 몸소 출발하며 대중으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그의 제스처는 몸의 운동(mouvement)과 행동(action), 자발성(spontanée), 상황의 발생(bonne ou mauvaise)을 야기하며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자아냈다. 이러한 제스처는 작가 자신, 그리고 대중의 지각을 자극(성찰)시키는 단순한 명제 혹은 질문을 제기하는 수천 개의 <글쓰기 écritures>와 상호 작용하면서 의미를 확장시킨다.
즐로티카미앙과 피뇽-에르스트 역시 거리에서 저항적으로 표현(반복, 이동, 이미지 등)했다. 피뇽-에른스트가 역사의 소환 및 기억이라는 주제를 통해 반복되고 있는 현 사회의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면, 즐로티카미앙은 저항과 반복에 따른 인간 ‘존재’의 문제를 언급했다. 피뇽-에른스트에게 장소는 역사적, 정치적 공감을 의미하며, 장소 특정적(In-Situ)인 작업이었다. 이는 장소 속에서 발생되었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해 시적 은유의 방법을 통해 인간의 기억을 소환시키며 현대의 문제를 발현시키는 데 있다. 상황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시간적 개념인 ‘계기(moment)’가 피뇽-에른스트에게 장소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부분이라면, 벤의 경우는 주체(작가를 비롯한 대중)의 적극적인 개입의지, 즉 ‘행위’가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 세 작가들의 예술적 의미가 서로에게 교차되기도 한다. 예술이 대중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공간으로서 개입하면서 대중 개개인의 지각을 일깨우며 자발적인 창조적 사유와 행위를 발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벤은 활동 내내 젊은 작가들을 규합하며 현대미술을 이끌었다면, 고인이 된 그 스스로가 대부분의 작품을 기증함으로써 오늘날 니스현대미술관을 증축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들의 예술적 실천은 단순히 자신의 작품을 위해 일시적인 행위로 끝나지 않았다. 예술의 중심지, ‘파리’에만 집중하지도 않았다. 도시의 거리에서 이들의 일관된 작업은 사회적·정치적,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들과 직면해 있던 ‘장소’ 그 자체에 집중했으며, 예술이 개입된 그 ‘곳’은 ‘새롭게’ 상황이 구축되는 것이다.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안(미술관)’과 ‘밖(도시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이들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삶 그 자체가 이들의 예술의 목적인 동시에 대중과 ‘함께’ 그 현실을 직시하고, 대중 스스로가 소외시켰던 문제들을 ‘각각의’ 방식대로 지각할 수 있도록 직접적인 ‘참여’를 유발하고자 했다.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이들의 예술적 전략은 또한 수도 중심의 미술에서 지역의 미술을 새로운 프랑스 현대미술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도시 공간에서 진정성 있는 예술의 활동을 가능케 했으며, 예술가들의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사회현장에 발현되면서 프랑스만의 독특한 도시 예술(L’art urbain)의 형태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공공 미술과 공식적(거대한 자본에 이루어지고 있는) 미술과 다른 괘를 형성하면서 도시 공간에서의 예술을 풍부하게 하는 결과를 발현시켰다.
벤 보티에,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보세요, 1962, 니스, ⓒ 벤 보티에 홈페이지
에르네스트 피뇽-에르네스트, Pasolini. Si je reviens, Roma, 2015, ⓒ 작가 홈페이지 제공
제라르 즐로티카미앙, 하루살이, Beaubourg, 1977ⓒ 작가 홈페이지
3. 다시 우리
오늘날 우리에게 매일 접하는 도시의 공간에서 ‘사유하기’가 가능할까? 도시 공간이 스펙터클한 이미지로만 작용하고, 그 속의 예술작품은 스스로 예술이라 자칭하지만, 한낱 이미지에 불과 하는 것은 아닐까? 예술이 문화예술의 부흥이라는 예술 스스로의 이기적인 상황을 구축하면서 우리의 사유하기를 방해하는 이미지들만 쏟아내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탐욕스러운’ 자본가와 ‘무지한’ 도시계획자들의 아랫배를 불려주는 도시 공간의 재현에 예술 역시 동반자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술작품, 그리고 생산품으로서 예술품이 구분되지 않는 이 현실이 우리를 질식시킨다.
오늘날 한국의 예술이 예술촌 혹은 대안 공간 등과 같은 예술 현장을 국가(시)에 요구해 ‘구축’시키면서 부동산 사업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술 스스로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함’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실제적으로’ 가난한 예술가들은 조용한데, ‘예술은 배고프다’라는 명제를 방패삼아 예술을 정당화하고 배불러 가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영토의 정복 혹은 지리적 점유 등으로 공간을 사유하고 있는 사람들, 예술이라면, 그리고 예술을 위한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찬양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교조주의에 빠지는 사람들, 서구의 미술 시장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사람들, 그 속에 왜곡과 발생되는 문제들이 고려되지 않은 채 자신의 시대만이 혁신적일 수 있다 외치는 사람들..., 새로운 형태를 발현시켜야 된다는 점에서 두려운가? 이미 새로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체제와 다른 것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제외될 까봐 두려운가? 이미 소외되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을 주저하는 것인가? 당신이 하는 게 예술 아니었던가?
도시 공간의 수많은 이미지들 및 ‘예술품’들과 달리, 당신이 ‘예술작품’을 대면하게 될 때, 오늘 하루의 삶(일상)에서 새로운 경험이 시작될 것이다. 시간의 계기를 더욱 빠르게 재촉하는 도시 환경에서 우리를 진정으로 우리의 본래적 실존의 연속적 창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그러한 작품들, 즉 사유(penser)의 운동(mouvant)을 촉발하는 그러한 예술작품들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예술작품이란 바로 세계가 부여하는 코드화된 의미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운동하며 변화하는 세계의 의미를 사유함으로써 그것과 부분적으로 나마 합치하려고 하는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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