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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유+무형 활동의 비+물질적 터전
영토란 근대적 의미에서의 물리적 땅이나 기계적 생산 수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토란 비물질적 상태로 존재하며 복합적 가치들을 양산하는 지적, 창의적 활동이 지속되는 공간을 함의한다. 그러나 국가는 애초부터 ‘주권’을 획득하는 것으로써 상정하였고, 배제와 예외의 논리로 작동되어 왔다. 현실의 국가는 일종의 특수한 노획물인 것이다. 최근 지속되는 내전들 때문에 발생하는 대량 난민사태, 정부의 경제 정책 한계로 인한 국가부도 사태(그리스), 국가의 기본적 안보 기능을 상실해가는 실패한 국가라는 오명(멕시코) 등에서 보듯이 국가는 실제로는 특정 삶만이 ‘선택’ 당하는 ‘예외적’ 장소임을 예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획물로써의 국가가 아니라 공유지로써의 국가는 어떤 터전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권자 혹은 특정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베어라이프, 즉 벌거벗은 삶, 주권이전의 생명, 나아가 인간이 아닌 그 어떤 생명과 생명활동이라도 펼쳐지는 장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노획물로써의 국가
근대는 탈식민의 과정이라고 했을 때, 국가의 ‘독립’의 과정에서 정부들은 현대로 이어진 부패와 양극화, 생산관계로부터의 배제, 가난과 집단 난민의 양상, 그리고 결국 그 어떤 공동체도 해체되고 심지어 파괴되었다는 결과를 맞이하였다.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연이은 국제 행사와 미술관 기획들에서조차도 작가를 포함한 현대의 벌거벗은 생명들을 조우하게 된다. 한 예로 멕시코 시티에서 거주하고 있는 작가 프란시스 알리스1)가 있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멕시코는 마약 카르텔의 내전이 한창인 나라다. 단지 멕시코 국내만이 아니라 마약 카르텔의 활동은 인근의 중앙 아메리카와 미국 등을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형성된 시장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신세대 카르텔의 전략들이 거듭났고, 이제는 멕시코 자체를 카르텔 공화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국가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단순히 상권을 독점하는 것을 넘어서 헌법시스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해야할 안보 시스템 등 모든 국가라 할 그 모든 것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멕시코를 두고 ‘국가’라는 체제 자체가 무너진 ‘failed state'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멕시코가 진정 국가로써의 기능을 멈추었는지의 여부보다도, 일종의 예외 상태로써의 멕시코라는 국가에서 작업하고 있는 프란시스 알리스는 어쩌면 가장 아감벤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인 조에(Joe)2)를 잘 드러내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멕시코 뿐 만이 아니다. 국가가 어떤 특정 카르텔에 의해서 독점적으로 ‘소유’될 때 국민은 국가를 더 이상 삶을 일궈가는 터전으로 삼을 수 없다. 가장 먼저 ‘죽음’에 이르기도 되지만 마지막까지도 그 영토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은 ‘베어라이프’이다. 삼성 공화국, 부동산 공화국 등으로 불려온 오명을 뒤짚어 쓰게 된 대한민국도 헌법에 공시된 정치 체제로 보면 사실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게다가 IMF로부터도 사유재산을 털어서 국가 부도를 막아내려 했을 정도로 ‘국가’를 지키려는 국민의 의지는 매우 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촛불정부는 ‘적폐청산’을 내걸면서 출범하였고, 정치, 경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교육시스템과 취업 등 생활적폐, 즉 카르텔화된 부패 구조를 재판하며 내파하겠다고 선언 했으며, ‘복지’정책과 ‘4차 산업혁명’을 통해서 생산을 재도모하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내 비췄으니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적어도, 국가의 이상적 존재와 필요성, 그것의 가치에 대해선 의심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동적 공동체로서의 국가
생명의 성숙과 주체성의 구축과 재구축, 예외없는 생명활동의 지속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국가는 복합적인 가치들을 양산하는 정동적 공동체이다. 이때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풍부한 정서의 운동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배양시키고 있는지, 그리고 이 공동체가 그 무엇도 배제하지 않는 국가인지 보자면 다소 심란한 것이 사실이다. 가령 IMF때 사유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은 것이 시민의식이 성숙해서가 아니라, 그간 (일부) 국민들은 국가의 영토를 사유 재산화 해왔기 때문에, 즉 국가를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사유재산을 털어서라도 소중한 ‘내’ 영토를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된다는 인식 속에서 행한 것은 아닌지, 나아가 정의로움이라는 이상적 가치를 내세워서 사적 소유가 된 국가, 즉 공공성이란 스펙타클로 무장한 사적 소유화된 국가를 어떻게든 시민의 국가처럼 보이게 해야만 그 (특정) 소유권이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소위 ‘권력’과 ‘제도’가 해온 역할인 것은 아닌지 등의 조롱과 조소는 사실 여전히 만연되어 있다. 헬 조선, 글로벌 호갱, 조상 겐세이, 존재가 금속 숟가락화 되는 등 근대 이래로 계속 대한민국의 국민은 국가를 스스로 조롱하며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노여움의 대상으로 일삼아 왔으니, 과연 현재의 정동은 이토록 우울증적으로 텅 빈것인가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삶이 이뤄지는 한, 당연하다시피 정동의 장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정동의 여부보다는 감정과 충동은 언제나 존재하는데 왜 개별적 정동의 흐름이 왜 운동으로써 돌출하지 않으며, 양극화되고 카르텔화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하는가를 물어야한다. 어떤 차단 기제가 있는가? 최근 뜻깊게 수행했던 최소한의 공동체의 정동의 장이라 부를 수 있었던 촛불시위라든가 미투 운동 등에서 조차도 한편으로는 정동의 결집을 활용하여 노획물로써의 국가를 쟁탈하려는 구태의 연속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주체성 구축과 재구축에 있어서 필연적이면서도 절실한 정체성의 퍼포먼스가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가리기 차원에서 차단되어, 사회적 상호성을 구축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반성적으로 짚어보게 된다. 그 어떤 생동하며 강렬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급격하게 파편화되며 기존 맥락속으로 전유되어버리고 마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과연 희망은 없단 것인지를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3)
이렇듯, 소위 기득권으로 불려지는 시스템을 지속하는 반복된 재영토화는 결국 전체 사회의 교착상태를 야기한다. 더 이상 계급투쟁 따위는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상태, 나아가 ‘주권’의 획득이라든가 어떤 계급으로의 등록이라든가하는 것에 투여된 욕망은 이미 텅 빈 것으로써 실효성이 다함으로써 교착상태말이다. 이 상태에서는 강렬도로써의 충동들을 예외적으로 거르고, 어떤 것은 배재하며, 상호 검열하고 억압하는 등 충동이 그 자체로 발생하게 두질 않는다. 결국 사회의 보수성은 영토를 쉽게 스펙타클화시키고 삶을 빠르게 소진시켜버린다.
감지하기, 유영하기, 강렬도를 확산시키기
국가란 영토에는 여러 로케이션들이 있다. 이 로케이션을 생산을 위해 구축되어야하는 영토라고 했을 때, 영토는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거품을 활용한 금융정치에 의해서 빠르게 재편되었다. 단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자본 구축은 영토로부터 예상되는 미래가치와 그 위험성 모두를 금융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가능했다. 미래가치는 주로 주식이나 빚, 채권 등으로 발행되고 그 가치의 위험성이 클수록 노획물의 덩치는 커지게 되며, 공유지로써의 영토는 빠르게 특수하고 특권적인 극소수의 사적 소유로 재영토화된다4). 주지하다시피 재영토화, 재전유를 메커니즘 시켜놓은 것이 현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며, 현재의 문제는 이것이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조차도 주의 깊게 가능성의 영역으로써 고려하는 영토는 “목적없는 수단”(아감벤)으로써의 활동, 어린이의 놀이와 같은 비물질적 활동들이 활발하게 운동하는 비가시적 영역이다. 이러한 활동은 우선 목표 지향적이거나 경쟁적인 차원보다는 우선은 충동적 차원에서 발현되는 것으로써의 단독성을 지닌다. 일단은 자본주의적 욕망의 계급투쟁의 민낯이 드러난 지금의 텅 빈 주체들에게 사적 소유화의 방식으로 재영토화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풍부한 가치들이 온전히 그 강렬도를 지속시켜 갈 수 있을 가능성을 점쳐보며, 새로운 욕망으로 가득 찰 수 있을지를 점쳐 보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충동을 살리면서, 비물질적 운동을 장려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식의 예외를 두어선 안된다는 것이 일종의 챌린지가 된다.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행하는 크리틱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으로써의 크리틱이 아니라 충동이 새로운 욕망차원까지 열 수 있느냐의 문제로 끌고 가야하는 것이어야하는데, 일례로 공유가능한 커먼스 운동만 보더라도 뭔가 미적지근하다. 정의로울 수는 있어도 일단 강렬도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이 쉽게 금융경제와 그것을 활용한 스펙터클의 정치 선동의 하나가 아니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비물질적 공유지에도 각각의 차이들이 있고 무형적 활동에 바탕한 생산 가능성도 있는게 사실이기에 이미 이러한 무형의 가치들도 빠르게 기존의 재영토화 맥락으로 빨려들어감을 일찍이 봐왔다. 일례로 무형의 가치들에 대해서 차별적 위계화를 하는 방식은, 정보와 지식의 차원에서도 일어났다. 미시정치적이기만 한 언론은 ‘대중추수주의’적 혹은 ‘선정적’ 감성 몰이의 차원에서 재코드화되면서 ‘조회수’전쟁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술이나 교육처럼 가치창출을 위한 지식노동의 경우도 단순 스펙타클화와 상업화, 계량화 문제처럼 고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전파나 활용, 대중화 등과 같이 남겨진 것들의 정렬과 분배의 문제에만 골몰해 있다는 점은 비관적이다.
거듭 반복하지만, 소수적인 몇몇 양상만이 정동을 정동으로써 매개하며 잠재태를 구축한다. 그것은 특정 국가나 입장을 대표하지 않으며 비물질적으로 유영(遊泳)하면서 생동하고 있으며, 사회의 복합성이 상황적으로 응집, 돌출하는 곳에서 정동적 매개 장치로 존재한다. 기존의 예술제도는 한국의 대학이나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교육적인 태도와 유행을 일으키는 태도로써의 탑다운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게다가 작품들은 물리적인 보존물처럼 특정한 방식으로 전매개되어 유통되고 있기도 하다. 예술작업의 아카이브화에 대해서 이렇다할 철학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행해지고 있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아주 외경스런 비유로 이것이 사회에서 범죄적 충동을 통제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예술적 충동을 통제하는 기제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현대 예술의 몇몇 측면은 상호적으로 섬세하게 유영하며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소멸한다. 발생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존의 제도와 카르텔화된 관습이 일삼아 온 성급함의 실수들은 때로 치명적이기도 하다. 익숙한 탑다운(제도로부터, 실적화된 지식으로부터, 낭만적 예술로부터 등등) 방식으로 진행되는 윤리적 주장 미래에 있을 수 있는 무형의 가치를 너무 빠르게 전유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기존의 국가 시스템에 그대로 흡수되어 급기야는 현대의 글로벌 금융정치를 공교히 해주는 역할에 그치고 말 뿐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지속가능성이라는 것은, 그 충동들이 발생하는 순간들이 지속되어야한다는 것이며 그 조건은 사회 자체에 있다. 적어도 탑다운 관행의 기존 제도와 장치라는 통제기제는 빨리 해체되어야하는게 맞는 듯 하다. 왜냐면 발생하고 있는 정동이 특정 방식으로 스펙타클로써 전매개되기 이전에, 충동의 양태로 여기저기서 돌출하고 있음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그 어떤 충동이라 할지라도 배제하지 않으며 그 자체의 단독성으로 보듬는 것에는 예외가 없어야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라면”, 한반도가 OOOO 국가 라면...
2018 아시아 문화전당의 아시아 문화 사업부에서는 기존의 아시아 창작공간 네트워크 사업을 레지던시 형태로 바꾸어 진행하였다. 나는 여기에 광주의 대안공간 뽕뽕 브릿지 추천 기획자로 참여하면서, 김강 작가를 초청하였다. 이때 김강 작가가 참여하고 있는 콜렉티브의 현재 프로젝트 DMZ ART GOP가 실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즉 한국의 비무장 지대를 영구 평화지대로 정착시키자는 목표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5)가 더불어 초청되었다. 내가 김강 작가에게 선뜻 이 제안을 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이긴 하지만 2000년 초반의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일종의 잠재태로써 다시 생각해 보고 싶어서였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예술 정치적 콜렉티브 활동으로써, 김강, 김윤환 두 작가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펼친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작가가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스쾃”이라는 장소 특정적인 예술가 점거 퍼포먼스 뿐 만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상황주의 운동이었을 것이다. 한국은 프랑스와 유럽과는 달리 보다 현실적인 운동과 개입이 필요한 곳이고, 쟁투가 확실하게 일상의 곳곳에서 익숙한 곳이다. 수년간의 활동 속에서 현재 작가들은 협동조합 형태로 그룹을 만들어서 일종의 공유지 운동을 하며, 일종의 ‘보편공유’라는 것을 쟁점에 두고 다소 복잡한 한국 현실 사회에서 개입과 실천이라는 형태로 어떤 식으로든 예술을 유영시키고 있는 듯 보인다.
<목동예술인회관 점거>(2004)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적 성공이 한국을 잠식해가는 과정에서 예술은 시스템이 행하는 교묘한 통제와 무관심의 형태로 자행되는 합의에 걸쳐있는 경계지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프로젝트가 축적되어온 적폐를 드러내는 것에 일임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거 즈음, 동시에 정부는 이러한 현장 활동과 운동들을 정부주도의 것으로 만들어왔고, 정치적으로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어왔다. 이러한 정부주도의 재영토화 속에서도 김강은 계속해서 예술의 새로움에 대한 역할을 부추기며 경계를 확장시키려 하고 있고, 김윤환은 지속적으로 정부 정책에 대해서 간섭, 조율, 제안하며 ‘내파’의 역할을 담당하려 한다. 새롭게 가담한 손민아는 작가의 역할자체를 최소화하면서 미니멀리즘적 전략으로 커뮤니티 아트를 실행해온 작가이며 김영철 또한 사회적 디자인이란 개념하에 디자인의 사회운동적 차원을 확산시키고 있던 와중에 팀으로 활약하게 된 작가들이다. 물론 이 4인 외에도 (협)예술과 도시사회 연구소 회원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일종의 중견 콜렉티브로써, 이 팀은 삶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의 무거움을 한데 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과 문화가 해당 사회에서 해야할 보편적 미래가치에 대한 질문을, 불가능해보이기도 하고 힘들지만 뼈있는 농담처럼 던지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과연 예술은 ‘영토’를 어떤 식으로 점유할 수 있을까?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으로써 유지되어온 한국의 비무장지대가 기존의 정치 경제적 관점만으로 전유된다면, 물론 예측가능한 범주들이 있을 것이다. 관광지, 생태 보전지, 역사의 현장으로써의 아카이브지역 등등. 어떤 것은 참으로 올바른 것으로 보일터이고, 어떤 것은 좀 뜬구름잡는 소리처럼 보일 터이고, 어떤 것은 기존의 젠트리피케이션의 반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국가가 영토를 ‘어떤’ 정치 수단으로 사용하느냐는 실로 중요하다. 물론 우리나라가 여태껏해온 것처럼 영토를 스펙타클화하고 지속적으로 국민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그런 것을 ‘구태’라고 한다면 그런 구태의 관념은 어떻게 완전히 해체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논의들이 오갈 수 있는 또 다른 터전으로써의 비무장지대의 상징성은 실로 크다. ‘삼성 공화국’이나 ‘부동산 공화국’과 같은 그 어떤 사적 소유화와 카르텔화도 용납지 않고 보전된, 어쩌면 유일한 한반도의 역사적 공유지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 프란시스 알리스Francis Alys는 우리나라에서 최근만 해도 국립현대미술관 <몸으로 역사를 쓰다(2017년)>와 2018년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에서 정연심&이완쿤 큐레이팅 섹션 “지진:충돌하는 경계”에 출품하였다. Bird call이 단계적으로 이뤄가는 화음이 인상적이었던 ‘The Silence of Ani' 작품에서는 지금은 황폐화된 아르메지아의 한 지역인 Ani를 배경으로 하여,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지역인 터키의 Kar지역의 청소년들을 출연시킨 집단 퍼포먼스를 하였다. 아트선재센터의 국내 최초 개인전 <지브롤터 항해일지>으로 소개되었고, 포스텍 인문사회학부의 우정아 교수의 연구 논문과 강연 등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작가의 홈페이지로부터도 작품들과 프로젝트, 텍스트를 공유할 수 있다. http://francisalys.com/
2) 조에(Joe): 사회 문화적 코드화로부터 이탈된 순수한 생명
3)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2018 미디어 비엔날레 “좋은 삶”에서도 다뤄졌듯이, 현재 많은 국가와 정부들이 당면한 공동체의 해체문제라든가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실로 심각하다. 어쩌면 ‘공유’와 ‘공동 사용’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삶을 예시하면서 미술관 자체를 공동 사용의 공간으로 내놓는 제스쳐는 매우 반가운 것일지 모른다. 나아가 국가의 모든 로케이션과 기관들마저도 ‘사적소유화’의 메커니즘에서 예외가 아니라면, ‘공유지’를 소재화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해체로부터 실천해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일단 아감벤에 의하면,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의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이다.”(목적 없는 수단, p 99.) 그러나 돌이켜 볼 때 ‘임의의 독특성’이란 영역은 무지 혹은 무관심의 대상이었고, 이를 일군다고 상정되었던 대다수의 예술가와 지식노동자의 지위는 사실상 소외된 영역에서 방치되어 ‘창의적 활동’ 자체로부터 멀어져온 게 사실이다. 다급하고 유한한 개별의 삶들은 사실상 기존 국가 조직으로부터 보호되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그 중 일부는 관료화 되어 재영토화 되버리기 까지 하였다. 기존 국가 시스템은 생명(죽음)의 불안을 볼모로 하여 유지되어 왔고,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기존 국가 시스템’이 글로벌 차원에서 버려지고, 트랜스 네셔널 이후의 ‘인터네셔널’이란 단 하나의 공유지를 위한 활동만이 존재하는 상황주의적 행동들은 곳곳에서 발생해야하는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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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적인 예로 대한제국은 일본의 차관을 강제적으로 빌려서 근대화를 실현하려다가 결국 빚을 갚지 못하였고, 그 결과로써 일본이 대한제국이란 국가를 획득하게 되었다.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대부업체들이 줄줄이 파산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반성은커녕 매뉴얼을 알려준 꼴이 되었다. 단지 땅이나 주택, 오브제 등 물리적 대상에 대한 것을 넘어서 현대의 금융정치에 익숙한 국내 정치와 글로벌 전략들은 이미 미시 영역에서 개인들마저도 미래 가치로써의 채권(현대는 문화나 정보 등의 스펙타클화 방식으로써 미래 가능성을 전매개해버림)을 사 들이며, 독점하는 양상은 지속 확산 되고있다. 그리고 미래가치의 위험성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불안을 금융화하는 식의 정동 정치 또한 만연하고 있다. 국민의 삶의 영토로써의 ‘국가’는 이제 주체성을 양성하는 삶의 터전으로부터 점점 더 벗어나게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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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MZ ART GOP 팀은 (협) 예술과 도시사회 연구소의 멤버 중 김강, 김윤환, 손민아, 김영철이 주축이 되어 만든 콜렉티브로 한반도 비무장지대를 영속적인 평화지대로 만들자는 취지 하에 DMZ에 예술 창작 거점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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