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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기본소득제를 둘러싼 가짜 뉴스1)

보편적 기본소득제를 둘러싼 가짜 뉴스1)​

자명한 것과 복잡한 것

극 소수는 그림만 그려서도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림만 그려서는 살 수가 없다. 먹고 사는 문제도 그렇지만 산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모순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림을 그리는 작가 뿐 만 아니라 예술 활동을 유지하면서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최저 생활에 익숙한 오늘날의 예술가나 활동가들에게 있어서 “보편적 기본 소득제2)”라는 것만큼 구미가 땡기는 정책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나라 제도도 ‘복지정책’인지라, ‘최저 생계비’에 맞춘, 사실상 모순이 많은 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매년 ‘복지’라는게 정부 실적을 위한 것인지, 실효성이 있는 것이지를 두고 비판이 많기도 하려니와, 기준 마련을 위해서 ‘예술’의 역할을 따진다거나, ‘누가 예술가인지 서열을 세워보자’ 라고 하고 있는게 우리 현실이다. 여전히 ‘경쟁’ 위주로 자본을 재편성할 수 있고 생산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식의 사회발전론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전세계적 성공과 더불어 가장 확연한 결과로는 중산층과 인텔리전트의 몰락과 국적 상실 사태의 일반화가 있다. 이러한 몰락과 상실의 사태는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창조적 활동을 하는 소위 ‘작가’라는 존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업에 있어서, ‘경쟁’이 초래한 어떤 피폐함은 다소 치명적인 예술의 공동화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여전히 예술을 통해서 매개활동을 하려는 활동가들은 많다. 매우 적은 수고비 혹은 차비만 받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니는 비평가들이라든가, 수년간 고심하면서 끌어온 예술 프로젝트를 2-3주만 전시하고 끝내야하는 현대의 예술가들이라든가, 온 몸을 다 노동시켜서 혼자 오브제를 만들고, 설치하고, 촬영하고, 홍보하고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라든가, 리서치와 정리를 거듭하면서 네댓 개의 기획서를 쓰면서 제도와 현장 사이에서 괴상한 완충지 역할을 하는 독립큐레이터들과 같은 자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실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더 다양한 활동가들이 있다. 이들이 속된 말로 ‘자기가 좋아서’ 예술을 하는 에고이스트들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 무형적인 가치들을 매개하는 치열한 정서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정서 노동자들이 극빈층의 사회복지의 대상으로써 최저생계비 지원을 받으면서 고단한 삶 속에서 ‘활동’을 겨우 유지하게끔 하는 것은 매우 큰 사회적 손실이다.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한다”는 말은 이같은 “활동가들을 보호해야한다”는 말로 고쳐 써야 한다.

사실 “보편적 기본 소득제”만 놓고 보더라도, 이제는 면밀하고 똑똑한 정책과 전제가 매우 절실하게 요청된다. 우선 쉽게 생각해볼 때, 우선 최저와 최상의 보험료부터 잘라나가면서 서서히 중간을 넓히는 방식으로 진행되면 못할 것도 없단 계산이 나온다. 정부의 관점이나 철학, 강한 의지가 추진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부가 언제 정치적 선동, 최근말로 ‘대중추수주의’ 외의 강한 의지를 추진해왔는지를 따져보자면 비판하느라 시간만 다 갈 것이다. 자명한 것을 ‘합의’라는 이름하에 어렵게 만들어 버리거나, 아얘 불가능한 것으로 통제하는 정부를 흔히 스투피더티 관료주의 정부라고 부른다. 게다가 스펙터클 정치에서는 이러한 관료주의와 더불어 실제 삶은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영민한 스펙터클 양산지로써의 정부로 마감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현실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쉬운 길을 일부러 어렵게 가야하고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하는 영역도 있다. 가령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든가, 예술을 키워나가는 일이 그것이다. 물론 현재 시스템은 이러한 양육의 기능을 목적의식적으로 도구화시켜온 시스템이다. 흔히 지름길로 여겨지는 사교육을 중심으로 현 교육시스템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이의 잠재력을 수치화시키고, 목표지향적으로 만드는 것의 위험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 그런 비판은 공허하다. 연달아 사교육 현장과 여파를 비판하는 기사들에서도 나오듯이 문제는 아이가 서울 의대를 가거나 못가서와 같은 것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물수능이건 불수능이건, 수시이건 비리 수시이건, 사교육이건 코디네이터 양육이건 간에 서울 의대를 가는 방법들은 이미 매우 정교해져 있고, 기교적인 차원에서만 대단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의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치 비판, 가령 실제 기존의 질병을 연구하고 새로운 의술을 펼쳐내면서 생명을 연구하며 변화시키는데 일조하는 ‘의사’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식의 공허한 비판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양상이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 정책적 ‘합의’의 지점을 마련해 주고 있다는 점이 더 궁극적인 문제이다. 동시에 언론에서는 아이가 서울 의대를 못가서 학대하는 부모를 살해한다거나 하는 막장들을 기사화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주체들은 텅 빈 죽음 충동적 게임을 치명적으로 즐기고 있다는게 확연하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의 공존은, 교육이나 예술에서도 마찬가지가 된다.

얼마전 초등학생인 아들이 학교에서 유행한다면서 긴 병풍형태로 접혀진 책을 빌려왔다. 지구의 생명 탄생에서부터 인류세인 지금까지를 도해한 그림책이었다. 그 책을 같이 보고 있자니,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인류세의 스펙터클함이 역시 눈에 띈다. 기나긴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세를 거쳐내는 인간이 해야할 일은 어쩌면 ‘현명한 인공지능’을 제작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지구 자체는 태양열에 의해 타버리거나 뭔가 운석과 충돌하여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계속 살아있을 테니 말이다. 참으로 멀고 아득하며 끝도 없는 이야기. 그래서 말하기 편한 이야기는 지속되지만, 속은 답답하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의 현장은 실제 제도는 여전히 경쟁을 부추기고, 인간의 차원에서는 포스트 휴머니즘적 새로운 생명윤리를 공유해야하는 실로 아주 구체적인 현실과 매우 철학적인 고민이 이율배반적으로 마주쳐있는 현장이다. 마치 예술의 현장이 사회적 빈곤과 더불어 예술향유가 소비적으로만 치닫는 것과 예술을 구원자인 것처럼 부르짖는 것이 마주쳐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전혀 다른 양상은 일종의 시차3)적으로 공존하며, 어떤 총체를 이루고 있다.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술의 존재와 현실은 도저히 공유된 기반을 갖기 힘든 오늘날 페인팅이라는 구체적인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이 처한 상황은 실로 괴이한 풍경이 된다. 구체적인 매체, 배제적이며 경쟁적인 현실, 그리고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예술이란 행위. 이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두 층위이다.

나는 ‘자연’을 그리는 작가 이은희를 한 7-8년 전 대학로 객석 빌딩 2층에 있던 갤러리 정미소에서 만났다. 당시 작가는 독일에서 광활한 자연 풍경 속에서 갖가지 회화 기법으로 그 광활함에서 느꼈던 숭고함을 표현해내고자 했었다. 그 동안 작가는 한국에 귀국하였고 여러모로 작업을 빨리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육아, 한국 사회, 서울에서의 삶, 미술계의 배제와 무관심과 오해의 하모니들이 한 작가로 하여금 뭔가를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천후적 교착 상황을 초래하였으리란 것은 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심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고 하고 있으리란 확신은 들었다. 예감은 맞았고, 그림은 좀 바뀌어 있었다.4)

아주 무심하게 말하자면, 이은희는 서울 만리동의 화분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을 보니 배경은 다소 밋밋하게 처리하면서도, 여전히 화분의 식물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표현하려 하는게 분명했다. 독일에서의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삶에서 낯설고 두려웠던 자연풍경으로부터 이윽고 숭고함의 느낌을 재발견해내었던 것을 상기시켜보면서, 작가는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사적 소유화된 자연물의 비가시성, 황폐해짐, 피폐함, 버려짐과 같은 느낌 속에서 또 다시 역동성이라든가 활기참과 같은 느낌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은 어떻게 도래한 것일까? 이런 희망은 인간의 감수성의 장, 즉 인간이 환경과의 부단한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를 새롭게 변용시키는 능력인 감수성이라는 기제가 작동한다는 증거이다. 감수성이란 기제는 제도와 개인, 환경과 인간, 생명과 생명 사이의 관계성을 보다 유기적이면서도 덜 폭력적으로 만드는 기제가 아닌가 싶다. 감수성은 윤리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써 매우 중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페인팅이란 물질을 이용해서 여전히 ‘이미지’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은 사실상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차원에서 활동하는 자들이다. 당장 이 그림이 팔리지 않으면 생계의 걱정은 더욱 커지지만, 추상성과 개념성, 철학과 윤리적 차원을 놓을 수 없어서 평면 앞에 다시 서게 되는 자들. 한 명 한 명의 작가들이 매번 작업이라는 이율배반의 토대에 다시 서게 되는 순간들을 생각하면서, ‘보편적 기본소득제’의 필요성을 다시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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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2018년 12월에 작성된 것으로, 기성 기관 중심에 두고 공모를 통한 작가 지원제도라든가 복지재단에서 실시하는 최저생계비 지원 등과 같은 ‘세금정책’ 기반의 현재 복지 제도에 대한 복합한 심정 하에서 작성된 것이다. 예술 활동가에 대한 정의나 담론화와 같은 문제 뿐 만 아니라 지원과 복지 정책이 현재의 관료주의에서 갖는 한계 등등을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깊은 숨이 내쉬어 진다. 예술적 담화가 언제 이렇게 궁핍해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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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조건적 기본소득제, 보편적 기본소득제 등에 대해서는 근거의 유무를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http://fen.or.kr/?p=588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607180600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8/07/09/who-really-stands-to-win-from-universal-basic-income,

https://www.forbes.com/sites/marcoannunziata/2018/07/27/universal-basic-income-a-universally-bad-idea/#6b35b4813269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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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차(視差, parallax)란 두 층위사이에 어떠한 공통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서론부분, p.15, 마티 출판사, 2009)

EndFragmentEndFragmentEndFragmentEndFragment4) 2018 광주 ACC 아시아창작공간 네트워크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나는 이은희 작가에게 작업을 마무리할 아주 짧은 시간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몇 달간 작가는 집을 떠나서 ‘작업실’을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이같은 작은 만남과 계기들이 확산되길 바랄 뿐이지만, 좀 더 큰 맥락에서 개인을 좀 덜 혹사시키는 사회를 상상해보게 된다.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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