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재구성, 가변설치, 혼합재료, 2016
<멀티미디어 권승찬전>. 이 명료하고 대담한 전시 제목은 전시장 입구에 놓인 한 장짜리 종이 위 빼곡한 작가의 약력처럼, 즉각적으로 와 닿는 많은 작품들처럼 망설임 없이 그 자체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전시는 특히나 자주 볼 수 없었던 그의 평면작업까지 포함해 <멀티미디어>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여러 가지 매체들로 구성된다. 이 다양한 모습은 <권승찬>으로 수렴되어 내적으로는 긴 시간동안 대동소이하게 전개했던 하나의 맥락을 한눈에 보여주는 아카이빙적 성격 또한 표방하고 있다.
전시공간은 1962년 신학대학으로 설립되어 그 기능을 유지하다 1997년에 대학이 이전하며 이후 카톨릭 평생교육원과 천주교광주대교구청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갤러리 공간을 제외한 지하실과 연결공간이 분절과 간섭의 경계가 모호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구성되어 있다. 약 60점의 추상 평면작업들은 화이트큐브 벽면에 조직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지하의 공간에서는 주로 기존 설치작업들이 이번 전시를 위해 재제작되어 전시공간과 상호관계를 형성해 새로운 감각적 효과 또한 제시한다. 이 외에도 프린팅, 드로잉, 조각과 아카이빙 성격의 비디오 작업이 균형적으로 배치되어 전시의 구성을 완결한다.
좌)자취의 현재사_크리스마스의 추억, 87x120cm, 디지털프린트, 2007
우)Being Unable to Sit Comfortably, 가변설치, 네온, T5형광등, 동파이프, 전선, 2016
그는 작업의 개념을 충실히 시각화하기 위해 매체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확장하지만 반대로 그가 다루는 이슈들은 대개 일관적인 주제를 가진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알고 보면 개념이라기보다 일관된 하나의 태도이다. 그가 가진 의식의 범위에서 개념적인 소재를 채택할 때, 특유의 비판적인 태도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자취의 현대사_배부른 돼지들’에서 그 대상이 되는 것은 거대자본으로 지어지는 알맹이 없는 문화예술기관과, 대중이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정체성 모를 서구문화이다. ‘Being unable to sit comfortably'에서는 약 3천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조사해 얻은, 하루에 먹는 끼니의 평균치를 대입해 ‘문화는 밥이다’라는 허울뿐인 공공슬로건을 무력화한다. 마찬가지로 'Life is so long but there is nothing to do. The world is so big but there is nowhere to go'(이하 Life is so long)에서도 대기업 총수의 고무적인 메세지에 개인적인 박탈감을 조합하여 질문을 던지는 문장으로 변형한다.
남자시리즈, 가변크기, 캔버스에 아크릴, 2016
그러나 이 태도의 유효성은 그것의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돌려질 때 또한 작동한다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그는 자신의 다분히 일상적인 행위로부터 감춰진 욕망이나 콤플렉스와 같은 심리적인 기재를 추출하고 이를 객관화하는 작업을 통해 본질적 의미를 발견한다. 작가는 이 시리즈를 제작하는 나름의 규칙(빠른 시간 안에 완성한다, 선을 사용한다. 즉흥적이다. 등)을 정의했는데, 추상작품 장르특성 상 전제되는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본질적 구조를 추출해낸 것은 그가 자기 비판적 태도와 객관화 과정을 이미 체질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은 차후 그의 작품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법론으로 발전한다. ‘남자시리즈_세상에 가장 믿을 수 없는 남자 1,2,3’은 그러한 작가의 대상의 분석을 통해 아버지와 은사님, 자기 자신 세 남자의 본질을 들여다 보고 나에게서 너를, 너에게 나를 발견하는 필연적 결과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그는 외적 대상과 내면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고 연결하는 작업을 가능케 한다.
우)Being Unable to Sit Comfortably, 가변설치, 네온, T5형광등, 동파이프, 전선, 2016
앞서 언급된 전작들을 통해 그의 작업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를 추출할 수 있었다면, 지하실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설치작품들은 기존에 선보였던 것들과 동일한 맥락 위에 있음에도 설치미술이 태생적으로 가지는 장소 특정적(site-specific) 인 성격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작품처럼 보인다. 이곳은 60년 전 건축되었다가 10년 전에야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된 신비한 지하실 공간이다. 검은 사제들, 화려한 휴가 등의 상업영화에서 장소적 배경으로 등장했으며, 촬영 후 버려진 소품들로 인해 더욱 피폐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띄었다. 작가는 무용한 것으로 인식되어 방치되어 졌던 이 공간을 특유의 비판적 태도를 통해 잠재적인 이야기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빛을 통해 감춰진 이야기를 드러낸다. 직선의 라이트들이 고요하게 발하는 빛은 접점에 있는 것들에 스며들고, 공간에 개입하며, 마침내 작품과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렇게 드러난 공간이 우리의 시야에 잡히면, 벽에 박힌 옷걸이용 못, 낡은 문과 문고리, 그것 잡아 열었을 사람들과 그들이 가졌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어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모퉁이를 돌면 신학대학 시절 있었던 와인창고로 가는 길목에 서게 된다. 근대식 건물 특유의 벽돌 벽이 마주 보고 선 좁은 길을 가로질러 놓인 길고 붉은 라이트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속 미스테릭하고 절대적인 카톨릭 수도원의 한 풍경을 재현하는 것 같다. 마음속에 어떤 이야기와 감정을 담고 고요한 복도를 가만히 걸어 지났을 어떤 젊은 신학생을 상상하게 한다. 그 길의 끝에서 마주하는 ‘Being unable to sit comfortably’는 이 생소한 감각 속에서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공간에 밀착되어 있으며, 그것의 사연들 -우리의 상상이든 실재했던 것이든- 에 힘입어 더욱 섬세하게 내러티브를 발산한다. 모퉁이가 반복될 때마다 고조되는 긴장감은 천장에 매달린 ‘Life is so long’를 마주쳤을 때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를 만난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주변에서 수집한 나뭇가지들은 진취적인 구호에 포획된 한 덩어리의 생명체처럼 그것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관객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이주민라디오방송 5회, 단체채널영상, 각 02:00:00, 2015
이어서 미로 같은 길을 지나 더 깊게 진입하면 아카이빙 성격의 세 가지 영상 작업을 볼 수 있다. ‘이주민라디오방송 5회’는 사회에서 소외되는 제3국 출신의 이주민들과 함께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기록물이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북경에 머물며 작업했던 작품으로 열었던 개인전에 대한 영상과 작가의 인터뷰 영상이 앞선 작품들의 감각적 언어를 조금 더 친절한 언어로 환원하면서 전시의 구성이 완료된다.
작가의 임무는 그가 선택한 방법론과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다. 그러나 기성상품이나 버려진 물건을 소재로 이용하는 다른 비슷한 시도들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그의 임무는 왜 특별히 창조적인가. 권승찬은 비판적인 시선으로 대상 –때로는 주체- 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그것이 가진 이야기를 구조하는 동시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다른 가지에 비해 병약해 기둥에서 떨어져나온 나뭇가지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혼자였던 공간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두피에 더 오래 붙어있는 것만 바랬을 머리칼은 이제 붓이 되어서 기뻤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디어에 부여된 가치를 단지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그의 시도가 멀티미디어 플레이어의 자격을 스스로 수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