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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간성, 삶의 현현(顯現) ; 《The room ; 사색의 공유》 展

1. 광주 롯데 갤러리 고영재 큐레이터는 2017년의 새해를 맞아 현대한국화 작가 두 명, 권인경과 임남진의 작품 전시를 기획했다. 이 전시는 ‘방(The room)’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권인경, 임남진 작가가 그린 한국화 50여 점을 통해 관객들과 ‘사색을 공유’한다. 고영재 큐레이터가 언급했듯이, ‘The room’은 단순히 인간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삶의 다양한 정서들이 함축된 공간이다 : “우리는 저마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다. 이는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세월이 교차하는 기억의 공간이자, 자유의지에 의한 인식의 과정에서 파생된 생의 다채로운 시공간으로, 부연하자면 ‘The room’이라는 주제가 상징하는 것은 우리 생의 현전(現前)일 터이다.”1) 지난 글, 「잃어버린 시간, 지나간 것들의 소환 ; 임현채의 <The Place-기억의 이면(裏面)> 展」에서 나는 장소의 시간성을 언급했다. 즉, 임현채 작가가 제시한 장소와 실재적 대상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흐르는 초(超)시간적 감각을 토대로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했다.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 망각한 존재론적 시간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을 제시 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주목했다. 임현채 작가가 사물과 공간, 장소와 경험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면, 권인경 작가 역시 공간의 문제를 보여준다.2) 특히 권인경은 외면의 공간(도시, 건물)을 통해 내면의 공간을 확보하면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공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접근한다. 이에 임남진 작가는 공간 속에서 보다 일상적으로 ‘체험’하며 ‘살아가는’ 인간존재를 보여준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공간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권인경의 시각은 장소-인간의 상호 관계의 문제를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소환시키는 방식(시간성)으로 면밀히 분석하는 임현채와 현실적 삶의 경험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일상과 공간의 관계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는(현실성) 임남진의 시각과도 대비되는 듯하다. 물론 공간에 대한 세 화가의 흥미로운 시각은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살펴볼 때, 해석의 지평을 넓혀가며 새롭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전시를 통해서 두 명의 한국화 작가 – 권인경과 임남진 –가 공간과 경험의 문제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지형을 그려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권인경 작가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재료인 한지에 먹을 이용한 수묵채색기법을 사용한다. 자세히 들어다 보면, 화폭의 현대적 감각은 그가 아크릴 물감을 함께 사용하면서 전통 산수화의 방식에서 벗어나 그려낸 풍경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재료적 중첩은 그의 소재에서 또한 나타난다. 작가는 바위산, 강과 같은 자연풍경과 주택, 아파트, 상점 등과 같은 도시풍경에 오래된 고서(古書)의 파편을 콜라주 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건물과 내부의 공간들은 가로 또는 세로로 첩첩히 쌓여져 ‘의도적으로’ 재조합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작가가 묘사한 익숙한 공간은 현실에서 벗어난 세계처럼 드러난다. 실제의 풍경을 왜곡시켜 증축된 공간은 푸른 강줄기 사이로 ‘새롭게’ 탄생되며 한 덩어리의 바위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작가는 2005년의 첫 개인전에서 출발하여 수묵을 위주로 한 도시 건물들의 묘사에서 점차적으로 고서 콜라주를 사용하면서 공간의 시간성을 담보하는 작업들로 나아간다. 도시는 작가에게 영감의 장소이자 사유의 영역이다. 도시는 보이는 ‘풍경’으로서만 작용하는 것이아니라, 하나의 화면 속에 다양한 시간과 장면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다양한 시점의 교차, 즉 건물의 내외부와 측면과 정면들의 교차를 통해 그리고 고서들을 낱낱이 중첩시키는 몽타주의 방식을

통해 드러난다.

그림 1 권인경, <개인의 방 5>, 한지에 수묵채색, 146×103cm, 2015,Ⓒ 네오룩

대표적으로, <개인의 방 5>(그림1)는 자연풍경과 도시 풍경, 낮과 밤, ​현대건물과 수묵화에서 보이는 풍경 등을 뒤섞으며 실질적인비례와 크기를 파괴하면서 원근법을 배제한다. 주택과 상점, 빌딩들은 시점과 비례가 맞지 않고, ​

​나무 숲, 바위산과 같은 자연 풍경과 도시 속에 등장하는 풍경이 공존한다. 이렇게 현실의 이미지들로 ‘새롭게’ 구성된 공간은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무릉도원 혹은 상상 속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또한 작품에서 중요한 고서들의 콜라주는 ‘시간성’을 상징하고, 그 위에 다시 그려진 이미지들은 개개인의 일상의 경험을 시각화하는 화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증축시켜 작가는 개인의 기억 역시 형성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러한 풍경은 안과 밖, 현실과 비현실, 은신처와 세상 등의 관계 안에서 이상적 공간을 창출한다. 작가의 시선으로 보는 이러한 풍경은 도시를 산책하는 산보객처럼, 바라보는 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속에 들어가는 자의 심리에 따른 시선으로 도시를 관조하며 경험한다. 우리 역시 작가의 시선을 따라 그의 작품을 산책한다. 도시가 2차원의 화폭으로 환원되기란 쉽지 않다. 시시각각 변화되며 지각되는 공간이 함께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시와 같이 몸으로 움직여 다니며 지각하는 ‘공간’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공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기하학이다. 따라서 회화 속에서 원근법은 우리에게 그러한 공간감을 이해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특히 서구의 그림의 호소력에는 그러한 기하학적 질서가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계적인 기하학을 드러내는 공간감과 건축물들 간의 거리가 심미적 만족을 주는 데 있어 생각만큼이나 크게 기여하지는 않는다. 심미적 체험을 말하고 미적 체험으로서 중요한 것은 ‘유기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인경은 이러한 도시의 심미적 기능을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했다. 특히 속도와 몰입이라는 도시적 특징 속에서 관조 또는 느림 속에서 삶과 세계의 흐름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산수, 강, 바위 등의 ‘정지’의 요소들을 덧붙인다. 정지는 삶의 움직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또한 원근법의 파괴, 시간성과 거주의 체험의 일부를 담보하는 장치들의 콜라주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관찰하며 경험한 도시의 공간의 의미를 바탕으로 작가는 더 나아가 내면속에서 그러한 경험을 집중시키는 정신적인 사고의 중심지를 형성한다. 권인경 작가는 이를 ‘Heart-land’라고 명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곳의 장소에 표현된 시각적 이미지들을 통해 기억과 상상의 콜라주로서 작가의 심리적 <heart-land>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Heart-land>의 지리학적인 좌표상의 형태를 띠는 작품은 콘스탄트(Benjamin Constant)의 ‘뉴 바빌론(New Babylon)’을 연상시킨다. 3) ‘뉴 바빌론’은 어떤 것도 정착시키려 하지 않고, 유동적인 작품의 구조와 유목민적인 도시 세계의 형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계는 지속적으로 변하면서 창조적인 인간의 개입을 통해 계속해서 변형될 수 있다. 물론, 뉴 바빌론과 권인경의 작품의 제작 방식과 의도가 다름에도, 장소-이동-시간성을 통해 공간을 대면하고자 했던 권인경의 시각 역시 점차적으로 사건-구조의 틀에서 도시를 바라보며 사건-경험들 사이의 거리를 형성하면서 ‘상황’을 구축해 나간다. 이렇듯, 작가가 구축한 혼성의 공간으로서의 유토피아의 세계가 은유적으로 펼쳐진다. 동양적 산수의 화면과 표현주의적 붓질의 바탕 위에 세운 건물들 속의 ‘폭포수’와 ‘강줄기’가 대표적인 장치들이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창조해 낸 이러한 자연적 요소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혹은 위로부터 아래로 잠입하는 ‘물리적인 이동의 공간’이자, 개인적 심리의 바탕을 둔 ‘시선의 이동’을 유발시킨다. ‘계단’, 쌓아올려진 ‘돌기둥’, 흘러내리는 ‘폭포수’, 견고한 ‘바위’ 위의 성곽 등은 위와 아래를 가로지르는 물리적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내부와 외부, 인간과 인간 사이를 횡단하는 심리적 공간으로 확산된다. 보는 자의 시선은 내부자 혹은 외부자의 입장에서 관찰되며, 세계를 구조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탈주한다. 즉, 그것은 인간들의 친밀한 거리를 가늠하는 물리적인 장이지만, 동시에 인간과 환경의 관계가 주체와 대상이 구별 없이 섞여 들어간 ‘혼성의 공간’이다. 특히 건물의 실내와 실외의 풍경을 회화적 대상으로 삼았던 작가는 구조물들을 수직과 수평으로 끊임없이 교차시키면서, 공간을 파편적으로 분할한다. 더불어 새롭게 ‘증측된’ 구조물 곁에 있는 산수초목은 풍경과 배경, 풍경 내 건물 등의 양측의 공간을 매개하기도 한다. 수평과수직의 만남은 철저하게 구조의 공간을 구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구조의 공간을 균열시키고 해체하는 작업을 병행해나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바로 공간과 인간 사이의 심적공간으로 표상된다. 자연풍경과 도시풍경의 교차와 상호작용의 운동, 그리고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재료들의 부딪힘으로 자연과 도시, 건물들과 인간의 만남은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비현실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표현은 우리가 사유할 수 있음에도 미처 상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젖힌다. 고서의 파편의 오랜 흔적처럼, 작가는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고민을 표현해 내고자 했다. 관람자 개개인 역시 굳건한 바위처럼 어떠한 자극이나 위협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유토피아의 세계를 만든다. 서양의 경우 자연은 종종 질서나 강제를 나타내는 베르사유궁전과 같은 대칭형 정원과 대비되어 자유를 상징하기도 했다. 이렇듯, 단순한 자연과 도시의 풍경을 통해 작가는 단순한 미학적 즐거움을 넘어 사유의 장을 확장시킨다. 작가 스스로도 전통적인 산수와 나무와 초원이 펼쳐지는 자연풍경과 도시 풍경의 교차, 수묵의 변용과 다양한 재료의 콜라주의 방법을 통해 표현된 공간은 관객 개개인에게 유토피아의 세계를 만들어내며, 한 줄기 강물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흐른다.

3. 도시 풍경에 중점을 두었던 권인경 작가와 달리, 임남진 작가는 공간의 일상생활을 더욱 면밀히 다루고 있다. 아마도 내가 유학을 가기 전, 우연히 보았던 <풍속도 II 영흥식당>(2006) 작품과의 인연이 나의 발걸음을 이 전시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10년 뒤, 나는 기존의 감로탱화 형식의 작품과 함께, 인간의 욕망과 그리움을 담아낸 상사화 시리즈, 책가도, ‘스틸 라이프(Still Life)’ 시리즈 등과 조우했다. 세밀한 묘사력과 미시적인 일상 문화를 포착했던 그녀의 관찰력은 이번 전시에서도 달빛 아래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상갓집 풍경, 한국 사회의 역사적 사건들, 일상적 사람들의 모습들, 생활 속 사물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작가의 방과 작업실 등 일상속 풍경이 소박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그녀의 필치는 전시장 한 면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대작, <장막도>(2014)(그림2)와 직면할 때, 더욱 명백하게 느껴진다.

그림 2 임남진, <장막도>, 한지에 채색, 204x560cm, 2014, 롯데갤러리 전시 풍경.

그림 2-1 <장막도> 세부

이 대작은 기존의 감로탱화 형식의 장막도에서 보여준 현대인들의 삶의 풍속에 관한 이야기를 드러낸다. 장막도의 한 가운데는 감로탱화의 형태를 띠고 있고, 좌우는 풍속도의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화면 중앙을 채우고 있는 ‘감로’로 이동하면 그 재단의 붉은 색과 내용이 시선을 끈다. 이를 중심으로 좌우의 도상의 변화가 눈에 띄는 데, 전통적인 풍속도의 형식을 갖추 면서도 현대인들의 모습과 의상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로도의 구도는 삼단의 구도로 되어 있고, 각 단계마다 설정된 주제가 있어서 하단에서 상단으로 상승하는 구도이다. 상승 과정 속에는 과거에서 현재(中段), 그리고 극락의 세계로 상승하는 미래(上段)로 이어지는 며칠간의 삼세 여행과 단계별 이적(異蹟)이 묘사된다. 중단은 화면 중앙에 재단(齋壇)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의식장면을 일컫는다. 의식장면은 상단과 하단과는 달리 현재라는 시간성을 갖지만, 오히려 임남진의 작품에서 좌우의 면이 현실적인 실제 모습을 반영하는 듯하다. 물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감로도는 암울한 순간들을 기본 하단의 도상으로 설정했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인간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하단 화면에 도시 경제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는 여러 장면들이 반영되면서 그동안의 하단에 줄곧 흐르던 침울하고 불행한 죽음의 분위기를 벗어버리고 발랄한 생활 중심의 도상으로 바뀌면서 인간생활을 확대 반영한 것이다. 임남진 작품의 좌우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빌어 표현하고 있다. 이 모습은 우리가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게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들이며, 특히 2014년 한국사회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 – 세월호 –을 반영하였다. 바다 속에 빠져 있는 노란 리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소비와 일상, 밥그릇에 절을 하는 모습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이러한 현실에 무관심한 인간들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우리의 현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대작에서 우리는 그녀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더불어 일상을 면밀하게 포착한 스틸라이프 시리즈는 그녀의 개인적 공간 때문에 보다 쉽게 교감할 수 있다. <그림 3>에서 배치된 작은 시리즈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함축한다. 묘사는 무척 세밀하지만, 그녀 특유의 응축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 커튼(장막), 화면의 구도, 잘려진 대상의 묘사 등은 이러한 메시지의 확장을 유발시킨다. 물론 작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묘사되었지만,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의 개인적인 사유를 바라보고자 하는 우리의 렌즈는 동시에 우리를 향해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그녀가 직면한 자아와 세상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은 방 한 켠에 무심한 듯 덩그러니 놓여 있는 빈 소주병들을 통해 암시된다. 그러한 공간속에서 작가는 단순한 고독과 외로움을 넘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끈질기게 적응한다. 한편의 장막에 가려진 침대에 피어 있는 뭉게구름(이불)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녀의 개인적 공간으로 비쳐진 화폭은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의 삶의 현실적 이야기를 동반한다.

그림 3 롯데갤러리 전시 풍경, 임남진의 <still life> 시리즈, 2016.

그림 3-1 임남진, <Still Life 9>, 27x35cm, 한지에 채색, 2016. Ⓒ 네오룩

<그림3>의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1평 남짓의 기다란 직사각형의 작은 방, 그 속의 유일한 사물들(스탠드 하나와 책상), 그리고 온 몸이 시려오는 마룻바닥에서 한 손의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해야만 했던 방을 회상한다. 그 공간은 사물과 함께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삶의 지평까지도 떠오르게 한다. 걸려있는 작품들의 내용들을 연결하다보면, 내부적 공간에서 시작된 ‘거주’의 체험을 통한 임남진의 사유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면서 외부적 공간(도시, 사회, 세계)과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공간은 그 안에서 대상들이 하나로 조화되는 현현(顯現)의 장이다. 즉, 공간은 대상(사물)들의 자리매김을 가능케하는 매개체며 그러한 공간을 메를로 퐁티는 “공간화된 공간”이 아니라 “공간화하는 공간”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곧 임남진의 작품들처럼, 공간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우리가 공간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공간의 모습을 달리하는 것, 즉 공간성이 지각적 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4. 서로 다른 공간을 묘사했던 두 작가의 시각을 교차시키며 고영재 큐레이터는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시간이 교차하는 기억의 공간이자 다채로운 시공간으로, 이번 전시 ‘The room’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삶의 현재다.”고 주장하면서 관객 역시 공감하기를 희망했다.

실제세계와 상상의 세계, 건물의 내부와 외부, 현실과 무릉도원의 산수초목을 결합시켰던 세계를 통해 권인경은 공간의 의미와 가치를 제시하면서 인간 본연의 꿈과 이상 세계를 묘사해나간다. 임남진은 소소한 일상적인 것들과 개인의 삶을 묘사하면서 세계와 직면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체험과 존재를 증명하며 자신에게 질문들을 던지고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묘사한다. 임남진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세밀한 묘사력과 감로탱화의 형식으로서 현세의 냉철한 반성을 통해 다음의 단계에 이르고자 하는 그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언급했듯이, 공간의 ‘사회적 구성’은 그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들 스스로 제도와 규범, 가치 등을 형성하면서 공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 및 변화의 장소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통해 공간은 하나의 가치나 의미를 갖지 않고 다가적인(polyvalence) 특성을 갖는다.4) 그러한 사회적 공간 속에서 ‘진정한’ 인간 존재는자신만의 “리듬”을 발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도시 공간과 일상생활에 대한 두 작가의 깊은성찰을 통해 우리 역시 대상과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반성적 성찰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꿈꾸며 실천하는 방안들을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1) 고영재, 「나와 세상을 향한 성찰」, 《The room; 사색의 공유》, 권인경, 임남진 2인전, 2017.01.20.~2017.03.01., 롯데갤러리 광주점, 전시 설명문 참조.

2) 권인경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사람들은 사물과 공간에 자신만의 상상과 가치를 부여해 개인적인 장소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시공간을 인식하며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고 언급했다. 전시장 내 <Heart-land>에 관한 작가의 설명문 참조.

3) 콘스탄트(Constant Nieuwenhuys)는 아스거 요른(Asger Jorn)과 함께 코브라(CoBrA)그룹을 주도적으로 창설했던 인물이다. 이 그룹은 파리의 한 카페에서 결성되었는데,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 출신의 젊은 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의 활동이었지만, 코브라 그룹의 일부 구성원들은기 드보르(Guy Debord)와 함께 국제 상황주의 운동에 가입했다. 특히 네덜란드 화가이자 건축가인 콘스탄트 작품에서 지배적인 특징은 실험적인 요소이다. 그가 제시한 뉴 바빌론은 기능주의적인 근대 도시계획에 반대해서 고안한 ‘전환된 도시’의 모델이다. 1959년 콘스탄트의 스케치를 본 드보르가 ‘뉴 바빌론’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그는 국제 상황주의자들과 함께 ‘일원적인 도시화(Urbanism Unitare)’, ‘심리-지리(Psycho-géography)’, 자유롭고 창조적인 활동으로서의 ‘놀이’, ‘표류(Dérive)’, 그리고 ‘전용(Détournement)’ 등을 주요개념으로 사용하면서 도시 변혁을 위한 다양한 모델을 실험했다. 이 모델들은 직접적인 참여와 실험적인 놀이를 위한 공간 창출이다. 자율적인 도시 공간을 꿈꿨지만, 국제상황주의 그룹의 내부적 갈등(예술가들과 정치가들 간의 이념적 차이)으로 콘스탄트가 그룹에서 축출되면서 뉴 바빌론 구상은 폐기되었다. Gérard Berreby (éd.), Textes et documents situationnistes 1957-1960, Paris : Allia, 2004.

4) Henri Lefebvre, La Production de l’espace , 4e édition, Paris : Economia, 2000, 참조 ; Critique de la vie quotidienne, Paris : L’Arche, 1997 ; Éléments de rythmanalyse, Paris : Syllepse, 2015. 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 존재가 어떤 권리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본인의 소고, 2장의 “현대 도시 공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살펴 볼 것 : 양초롱, 「도시 미학과 현대예술 : 리옹 시의 도시 계획 속 문화예술정책」, 『인문학연구』, Vol. 53, No.1, 20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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