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운명도 미래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인생은 짧습니다. 젊음과 아름다움은 더욱 짧지요.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받아들여요.
다가오는 그 삶을 향해 당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세요.
그것이 언젠가 죽을 불쌍한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랍니다.
현명해지세요.(...)”
앙리 르페브르, 「오이디푸스」, 『모더니티 입문』 중에서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 오이티푸스는 자신을 좋아했던 지역의 소녀와 여인들이 입을 모아 한 이야기를 무시하고, 결국 방랑하며 파국을 맞았다. 인간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혹은 인간의 삶은 인간 스스로가 이룩한다는 야심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짧은 인생이기에 온갖 영위를 누리면서 살겠노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아니라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오! 그대는 사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오. 그대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소. 그대는 영웅이 될 것이며, 살인과 근친상간을 통해 반신반인이 될 것이오, 오이디푸스. 그대는 왕이 될 것이고, 그대의 아버지 왕국과 법을 통일시킬 것이오. 그대는 권력을 지녔고, 수수께끼를 풀어냄으로써 그 권력을 유지했소. 바로 그것이 당신 스스로를 벌해야 하는 죄목이라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물음 속에서 최초의 인간이자 최후의 인간이라는 답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오. (...)1)
미술 역시 태생부터 비극적인 운명이었다. 고대부터 서구의 모든 시각물은 당대의 권력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미술은 고·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에 종교와 정치권력에, 근대 산업 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권력과 경제 권력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서양의 미술사는 권력의 생성과 해체를 기록한 거시적인 역사의 한 줄기였다. 이처럼 통치와 지배의 도구로서 미술,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던 신고전주의, 아리안족의 우수성과 독일을 찬양하는 작품만 허락했던 나치 정권, 수많은 전쟁과 인권 유린의 현실 속에서도 기계와 자본적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현대미술 등, 미술이 서양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살펴보면 이런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이 진정으로 그 가치를 획득했던 것은 대상(권력, 종교, 자본 등)의 도구 및 자신의 유용성을 위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미술 스스로를 위해 내보였던 반항 정신 혹은 불복종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나는 <미술,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글에서 언급했다. 미술가들은 예술의 자율성을 통해 통속적인 상품화, 미술 시장, 무미건조한 기술 등에 대해 저항해야했다. 미술은 제도에 의해 관리되는 운명에서 자유로워져야 하지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져야 하며, 자신이 만든 것을 팔 수 없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 처절한 경제적·예술적 운명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현대미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지역의 상황을 보면, 미술이 이토록 정치권력에 종속된 경우도 없는 듯하다. 이처럼 개탄스러운 현실 속에서의 미술은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시대의 슬픔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미술이 문화산업 및 상품으로 유통, 소비되며 정치에 밀접히 관련되어 그 수혜를 받는 미술만이 주목을 끄는 안타까운 미술계를 목도하고 있다.
정치적·제도적 처세술에만 능한 예술, 수없이 쏟아지는 문화예술정책들과 프로그램, 그 가운데서 드러나는 예술가들의 빈부격차, 자신의 처지로 인해 자신의 시대를 감각으로 포착 혹은 표현할 엄두를 못 내면서 다만 능숙하게 학습된 기법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미술계(場), 우리는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풍족한 시대의 저주받은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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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시대의 슬픔을 간과하다
이탈리아 카라바조(1571-1610)가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의 적극적인 후원에서 시작되었다.2)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카라바조는 종교화를 주문받아 그렸지만, 기존의 관습적인 종교화의 주제 및 표현 방식을 탈피했다. 예를 들어 〈황홀경에 빠진 성 프란체스코〉(1595)의 경우, 기존의 종교화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주제를 택했고, 빛을 이용한 명암 대비와 극적인 장면 연출을 통해 인물들을 관능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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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카라바지오, <성모마리아의 죽음>, 1601-1605, 캔버스에 유채, 369 x 254 cm,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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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라바조의 회화의 진정한 의미는 종교화에 대한 전통적인 형식 및 주제의 선정에 있어서 새로운 형식의 발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형상에 자신이 겪어온 거리의 부랑자들, 매춘부, 노숙자 등의 모습을 투영해서 그려냈다는 데 있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그림1)에서 카라바지오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는 듯하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에 그토록 오열하면서 길거리에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죽음에는 왜 이토록 관대하는가? 그는 수차례나 로마를 방문한 유럽의 귀족, 대사를 비롯해 로마 부호들의 후원을 받다가 거리의 부랑자가 되는 생활을 반복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내면에 간직하고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자신의 작품에 투사함으로써 기존의 권위에 저항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미술사가 로베르토 롱기(1890-1970)가 “카라바조가 없었다면 요하네스 베르메르, 조르주 드 라 투르, 렘브란트 반 레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외젠 들라크루아, 구스타프 쿠르베, 에드워드 마네의 그림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3)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카라바조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미술 형식의 파괴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의 현실을 그려내고 고발하고자 했다.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며 그 곳에서 저항고자 하는 예술가로서의 의지는 카라바조뿐만 아니라, 스페인 궁정화가로서의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프란시스코 고야 등의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미술을 보존해 줄 수 있는 권력이 사라질 때, 미술은 희생양에 불과하다.4)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일부 화가들은 권력의 수단으로서 미술이 존재했던 시기에도 끊임없이 표현의 욕구와 사회의 현실을 직면하고자 꿈틀댔다. 따라서 이들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권력의 수단으로서의 미술만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힘 또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2 조르조 모란디, <정물화>, 1954, 캔버스에 유채, 36 x 40cm, ©개인소장.
시대의 지독한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이 시대적 정신을 대변하는 사회적 사실주의나 정치적 미술, 그리고 예술가의 정치적 참여(Engagement)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 미학에 회의를 느끼고 인간 이성이 초래한 부조리와 불합리한 구조를 비판하는 방식이 다다이스트들처럼 항상 저항적 파괴나 실험적인 것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을 수단으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보다 나은 세계를 갈망하는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래파 선언이 한창이며, 미래파들이 정치적 노선(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는 미래파의 속도의 미적 표현과 정반대에 있었다. 대체적으로 병과 항아리를 표현한 정물화만 그렸던 모란디는 이 시대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시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반파시즘 사상가도 아니었고, 실천가(운동가)도 아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병과 항아리만 그려왔다. 이를 통해 그는 파시즘과 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으로서 파시스트적 신념의 폭력적 사고와 대립되는 그런 존재로 나타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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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케테 콜비츠, <독일 아이들이 굶고 있다!>, 1924, 판화, 40.5 × 27.5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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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그 자체로 많은 발전을 지속해왔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본질인가를 질문하면서 작품 자체에 구현시키는 작가들, 혹은 작품을 구현하며 사회 현실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질문에 응답하고자 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고, 기만적인 현실을 고발하는 미술은 다양한 형태들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중산층 지식인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난 케테 콜비츠(Käthe Schmidt Kollwitz, 1867-1945) 역시 20세기 초 유럽 예술계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혼란스러운 자신의 시대를 정확히 응시했다. 그녀는 도시 빈민의 노동자, 자신의 모습이자 동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고통을 짊어질 여성들의 모습, 전쟁 피해자들의 비참한 생활 등을 거칠고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서 보는 이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억압받고 학대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그녀는 양차 세계대전과 독일 내전, 나치의 제3제국 건설 등이 벌어지던 시대를 살면서 사회의 부조리함과 인간 실존의 문제에 몰입했다. 그녀는 결국 전쟁이 끝나기 전 사망했지만, 독일 표현주의의 뛰어난 실천가였으며 사회적 저항에 앞장선 미술가였다.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했던 그녀의 작업은 근대화 혹은 산업화로 대변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 던져진 고통과 불안을 잘 드러내줄 뿐만 아니라, 이 자체가 현실에 저항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표현주의 역시 인간의 보편적인 실존의 문제와 개인의 생존에 등에 다양한 차이를 보이듯, 시대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저항하고자 했던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수많은 예술가들이 수세기 동안 권력에 종속된 미술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회의 외면 속에서 견뎌왔던 외로운 시간과 배고픔과의 사투를 통해 지켜왔던 미술의 권위를 오늘날 예술가들은 스스로 조롱하고 있다. 수없이 화려하고 쏟아져 나오는 혜택 속에서 시대의 슬픔을 직시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 상황, 그 자체로 우리는 저주 받은 세대이다.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현대미술의 처세술, 미술계(場)의 저주받은 사람들
서양의 근대 문명과 사회적 산물은 역사의 권력 체제 속에서 변화·발전하였고, 미술 역시 쉽게 권력에 순종하고 봉사하였다. 현대 미술이 이러한 체제의 불복종에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미술이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동시대의 미술이 권력 친화적일 때, ‘없는 듯 있는’ 무목적성의 합목적성, 사실적이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인 그림, 대중을 ‘위한’ 듯한 형식으로 판매되는 작품, 대중의 것을 자신의 취미로 삼는 자본주의의 소유욕으로 나타나는 작품들, 기성 제도에 대한 반란으로 시작된 예술이 권력의 수혜자가 되는 현상, 시대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정치(행정) 가담을 통해 오히려 스스로에게 특혜 주는 형태들 등이 바로 오늘날의 미술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처세술이다.
권력의 수단으로서 미술,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미술이 어떻게 우리의 주체성에 개입하며, 실재가 아닌 허상의 이미지를 동시대 문화에 지배적인 시각성으로 조작하면서 ‘사회적 권력’을 형성하는가? 사회를 변화(?) 시키고자 정치권과 결탁해 수많은 미술프로젝트 및 ‘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미술인들이 이토록 정치와 연계된 시대도 없다. 불행하게도 미술 생태계를 스스로 파괴시키는 이러한 형태들이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구조가 작품 판매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의도로 채워져 있다. 아, 개탄스러운 오늘날의 현실에서 언뜻 보면 활발한 듯한(?) 시장의 형성과 수많은 문화예술정책의 증가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스크린 세대의 관객들에게 “무지하고 비참한, 지쳐버린 인간들”을 위한 혜택이며, “스크린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던 조르주 뒤아멜(Georges Dhuamel)의 언어적 표현이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사회의 구조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지배하고 일그러뜨리는지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의미가 결여된 미술이 현대문명의 피상성을 예찬하며, 현대 공공미술이 어느덧 세속화된 국가 미술 혹은 종교미술과 같은 미술의 힘을 행사하고, 기술에 의존하는 거대해진 작품들이 이유 없이 고·근대의 건축물만큼 위대해지고, 순수라는 이름이 예술을 한정하면서 종종 인간 문명에서 비롯된 수많은 현실들을 배제한 채 정치를 주체적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제한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미술을 위해 정치에 가담한다는 예술가들의 그럴듯한 변명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우리 모두는 저주 받은 세대가 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무엇이 문제인지 진정 파악조차 못하며 지친 채 순응하는 현실 속에서, 넘쳐나고, 화려하고, 정신없이 진행되는 프로그램들 속에서, 진정 소외되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한 채 그냥 이 상황을 바라보고만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과연 이 모습에 축복받은 세대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현실과 발언>,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 <두렁> 등은 저항정신을 상실하지 않은 ‘청년 정신’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인들의 협회는 다른 형태로 변형되면서 현재의 정치판에 숟가락을 얹고 있다. 민중미술 이후 지역의 새로운 감성은 문민정부 출범,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지방자치제 실시, 광주비엔날레 개최 등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세대는 인터넷의 대중화,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팽창하는 대안 공간, 문화예술정책의 변화 및 공공미술 정책 등으로 미술의 ‘정치성’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사회의 정치적 변화는 작품과 세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매개자들(큐레이터, 비평가, 갤러리스트, 미술사학자 등)의 활동 속도보다 일부 미술인들이 정치와 행정 참여에 급격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예술계 밖의 전문인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규합되면서 예술 행정의 주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올바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정치적인 태도를 갖추기 위한 포석이다. 1980년대 미술인들의 연합은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풀어내기 위해 엮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계의 현실 정치와 정책에의 참여는 오히려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사회의 변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대중의 무관심 속에 매몰되고 있다. 이는 사회 현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미술의 역할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사회적 삶의 가치관과 방식을 제안하고자 하는 정치적 관심이 아니다. 이들의 관심이 정치를 제도적인 것에 결부시키고 있는 의미로 사용하고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적극적으로 제도권의 행정에 관여한다. 잘못된 제도와 불합리한 문제에 소리 내는 형태로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미술은 정치권력의 막강한 힘과 그 힘에 의해 파생된 미술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와 관계 맺고 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미술계의 구조가 미술만이 할 수 있는 역할, 즉 정치 보다 더 정치적으로 사회적 가치에 대해 논하고, 시대를 바라보는 데 있어 더욱 창조적이며, 상상을 뛰어넘는 역량을 발휘하는 사회적·정치적 역할을 모색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여전히 미술에 애정을 갖는 것은 끊임없이 권력에 저항하고, 자신의 성공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서 작품에 대한 유용성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노력하고,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고자 몸부림치는 또 다른 미술이 이 개탄스러운 현실 속 어디엔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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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enri Lefebvre, “Oedipus”, Introduction à la Modernité, Minuit, 1962.[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
2)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은 로마 가톨릭의 교리 및 교의, 그리고 교회의 목적을 위해 존재 했다. 예를 들어, 바로크 미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의 대표적인 분수 조각은 나보나 광장의 <네 강의 분수(Fontana dei Fiumi)>(1651)이다. <네 강의 분수>는 교황 이노첸티우스 10세의 의뢰로 만들어졌다. 이 분수의 특이점은 중앙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이다. 로마시대에 이집트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왔던 오벨리스크는 원래 성 세바스티아노 교회 옆에 있었지만, 이 조각물을 위해 재사용되었다. 중앙의 오벨리스크를 기점으로 네 귀퉁이에 네 강을 인격화한 형상들이 어우러진 바로크 조각의 분수대는 옛 로마의 영화를 다시 불러일으키며 이 시대의 가톨릭과 교황의 영광 및 권위를 상징하고자 했다.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3) Roberto Longhi, Caravage, Du Regard, 2004.
[if !mso]> <style> v\:* {behavior:url(#default#VML);} o\:* {behavior:url(#default#VML);} w\:* {behavior:url(#default#VML);} .shape {behavior:url(#default#VML);} </style> <![endif] StartFragment4) 권력의 수단으로서 미술은 애정과 숭배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증오와 파괴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권력 지배 구조가 뒤바뀔 때 미술은 희생되었다. 미술 파괴의 역사는 미술 창조의 역사만큼은 아니겠지만 미술과 문화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자 연구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을 형성해왔던 미술 파괴는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인 행동 양식 즉, 개인의 심리학적, 범죄학적 혹은 사회학적인 현상 등으로 인해 발생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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