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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의 <기도하는 아이>

1.

유럽에서 미국으로 유입된 오늘날의 브레즐렌(brezlen, 미국에서는 프레젤Pretzel이라 불림)은 빵집뿐만 아니라 대형 슈퍼마켓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대중화되었다. 유럽에서 소박한 간식으로 사용되는 이 빵은 중세 시대에 독일인 수도사가 성서구절이나 기도문을 외운 아이들에게 상으로 주기 위해 남은 빵 반죽을 가늘고 길게 만든 다음 기도하는 아이들의 팔 모양처럼 구부려 만든 데서 유래하였다. 이 빵은 효소 없이 부드러운 식감에 굽는 동안 물을 살짝 뿌려서 단단하고 진한 갈색으로 변해 오늘날의 대중화된 형태를 갖게 되었다. 가정에서 가족들을 위해 만들고, 빵집에서 이웃의 사람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만들었던 브레즐렌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과자로 재탄생되었다. 공장에서의 대량 생산은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지만, 동시에 대상의 본래적 의미는 상실된 채, 단지 간식의 일부로서만 인식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소아르 갤러리 2층 전시장에서 설치된 1000여개의 기도하는 아이 형상은 작가의 손에 의해 각각 동일한 형상들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작가 이재호에게 ‘반복되는’ 형상은 기도하는 아이 형상뿐만 아니라, 이전에 작업했던 가면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도판 1, 2) 작가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성실히 자신의 손에 의해 기도하는 아이들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작가 이재호에게 ‘반복되는’ 형상은 대상의 본래적 의미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이 인물 혹은 가면 시리즈에서 풀어내는 실타래(도판 3, 4)처럼, 서서히 진행되는 변화이다. 즉, 이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생(生)이기 때문에 이들의 탄생은 그저 손쉽게 되풀이되어 제작된 것이 아니라, 생성이다. 그냥 동일해 보이는 듯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와 바램을 내비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하나’에서 여러 ‘관계’들에 의해 형성된 ‘온’ 힘 즉,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적 힘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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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하는 아이 (1000 EA)>, 2018, 닥종이에 금박(순금), 8×15×8cm, ⓒ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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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 수 없는 표정>, 2014, 가운데 전신(1 EA), 60 X 155 X 20cm / 자화상 가면(500 EA), 40 X 60cm, ⓒ 이재호

2.

그렇다면, 아이 혹은 아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양미술사에서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나온 최초의 그림은 조반니 프란체스코 카로토(Gopvammo Framcesco Caroto, 1480~1558?) <그림을 든 빨간 머리 소년>(1515년경)이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이는 이 초상화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그렸다는 점과 어린이가 그린 그림이 회화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데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문지영 역, 2003)에서 보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어른들 속에 섞여 어른들에 의해 덩치가 작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에 의하면, 아동의 독자적인 시기를 발견한 것은 18세기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서유럽 회화와 달리, 북유럽 작가들은 일상생활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예를 들어, 피터 브뤼겔은 아동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관념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아이들의 놀이>(1559~1960, 118x161cm, 빈 미술사 박물관)는 250여 명의 아이들이 굴렁쇠 굴리기, 공기놀이, 말 타기, 팽이치기 등의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들의 놀이> 역시 어른의 옷을 입고 있다. 이는 단지 아이들의 삶을 ‘독자적’ 혹은 ‘전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에 의해 어른의 삶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즉, 아이들의 세계를 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경고를 함께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귀여움’이나 ‘천진함’과 같은 아동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아동의 세계를 성인의 세계와 분리시키고자 하는 경향 역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아동기’로서 ‘아동’에 대한 관념은 필립 아리에스가 말했던 것처럼,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것이었고, 여전히 서양회화사에서 아이들이 그 자체로 주제를 형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의 형상 및 아이가 그린 형태에 주목을 하며 차용된 이미지 형상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서양 미술사에서 오늘날까지 아이를 주제로 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아이 자체의 주체적인 의미, 즉 예술적 주제로서의 접근은 거의 미비하다. 수많은 아이들의 형상을 그렸던 코브라 그룹 역시도 아이가 그린 형상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지, 아이 자체가 회화적 주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재호의 작품은 현대 화가들이 그리는 아동세계와는 다르고, 조각가들이 그들의 감정과 독특한 시각으로 아이들을 형상화 하는 것과도 다르다. 이재호 작가의 ‘아이 형상’은 과거의 자신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동인은 <알 수 없는 표정(자화상)>(도3)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아이 형상을 어른들의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과거를 투영하고 있는 상징적인 대상으로 구현시켰다는 점에서, 즉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보편적 형상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예술적 주제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개인적 이익에 바탕을 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아이들의 행위를 주목하며 재현한 기도하는 아이 형상이 어른 스스로 현재의 상황을 성찰할 수 있도록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미학적 가치가 완성 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아이 형상을 단순히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의 모습으로 형상화 하는 데 멈추지 않고, 특정 지역, 인종, 성별을 넘어 ‘아이’라는 객체를 형상화한다. 또한 기도하는 아이의 머리에 붙어있는 금박 ‘퍼즐’은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즉, <알 수 없는 표정>(도판2)에서 눌려진 퍼즐 형태와 실타래처럼 풀려진 한지들은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이 자신의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맞춰나가는 회상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변화되는 자신의 모습을 구체화 한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표정 및 인간관계,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인간관계에서 자아는 스스로 문제들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는 공간 내 함께 거주하면서 자아와 타자들과의 상생에 대한 고민, 누군가를 위한 ‘바라는 행위’로 발전된다. 그렇게 탄생된 아이 형상은 어른의 ‘과거’로 투영된 것이 아니라, 아이 그 자체의 행위(기도, 실타래, 나비의 상징 등)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그 무엇이다.

아이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에서 곧 우리 내면에 감춰진 두려움과 고독감, 반항심 등 복잡한 현대인의 감정의 선을 읽어낼 수 있다. 어릴 적 철없고 순진했던 시절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제거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이재호의 아이들은 그만의 감성과 교배되어 새롭게 태어난 형상이다.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청소년기부터 몰입해온 저항과 자유, 소외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통해 자라온 성장 과정에서, 작가는 아이들이 자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했던 모습을 떠올린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개인적 이익에 바탕을 둔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타자가 아니라, 이들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사랑에 감동받는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및 세계 곳곳의 불행한 사건들에 무조건적으로 공감하며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 즉 개인에서 시작되었던 <기도하는 아이>는 수백 명의 군집형태로 설치되면서 또 다른 힘을 자아낸다. 이는 <알 수 없는 표정>(도판2)에서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의 얼굴들과는 다르며, 그들이 반복된 형태로 자아를 둘러싸며 발휘하는 힘 역시 다르다. 예를 들어, 시리아 내전은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와 생존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보여준다. 시리아 난민들의 삶은 쓰레기통을 일터로 삼아 살아가는 모습, 아이다운 삶을 포기한 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 하얀 시멘트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빵 한 조각을 씹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일상의 참극을 보여준다. 시리아인들의 현실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전쟁으로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 수많은 국가적 피해를 갖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아이들은 기도한다. 이 아이들은 인종, 세대, 성별 등을 뛰어넘어 인류애적인 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을 지닌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작가 스스로의 개인적인 저항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면, <기도하는 아이>(그림1)에서 아이들은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바라는 수천 명의 하나 된 힘을 보여준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로 작가는 세계의 수많은 사건들 – 난민, 전쟁, 기아, 테러 등 - 속에서 이유 없는 희생과 인간의 죽음에 기도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바램의 힘을 수백 명으로 확장시킨다. 계속해서 ‘떨어져나가는’ 닥종이의 실타래와 ‘하나’의 퍼즐은 미래를 열 수 있는 희망의 ‘시작’이다. 작가는 자신의 과거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바램을 형성해 나갔던 것처럼,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모습을 통해 어른들 역시도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매개체로서 ‘아이 형상’과 ‘퍼즐’을 사용한다.

3.

이번 전시에서 기도하는 아이들의 설치작품과 더불어 작가는 연꽃의 전통적인 의미 및 특징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과거의 어릴 적 기억에서의 ‘기도하는 아이’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이 사회에 직면하고 성장해 나가는 ‘어른’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그 잎과 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또한 물속의 더러운 냄새도 연꽃이 피면 사라지고, 연꽃의 향기로 가득 채워진다.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른 연꽃은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연꽃과 함께 그려지고 있는 올챙이 역시 같은 공간에 위치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며 겪고, 깨달아가는 삶의 과정을 작가는 연꽃과 두 생물에 비유한다.

그의 작품들은 한조각의 퍼즐처럼, 그의 연꽃과 올챙이, 그리고 개구리의 일부에 작은 금박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검은 묵으로 담백하게 그린다. 작가 이재호는 서양 미술에서 전통적으로 예술적 주제가 될 수 없었던 아이들, 올챙이와 개구리, 연꽃에 주목하며, 인생사에서 무관심하고 배제된 대상에 관심을 갖고, 이러한 대상에 사회적 주제들을 의미화 시킨다. 이미 어른이 된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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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알 수 없는 표정(자화상)>, 2014, 닥 종이 & 줄기, 40 X 60cm,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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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도하는 아이>, 2018, 닥종이에 금박(순금), 8×15×8cm,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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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 수 없는 가치 (蓮, 祈禱)>, 2018, 닥종이에 금박(순금), 80×80cm,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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