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으로 하느냐 합창으로 하느냐를 두고 정부와 정치권이 논란을 벌였다. 덕분에 ‘제창’과 ‘합창’의 몰라도 될 차이를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국가폭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제창이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씁쓸했다. 한편으로 제창을 거부하는 그들의 불편한 속마음이 무엇인지 짐작 못 할 바도 아니거니와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의지가 꿈틀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금남로 일대를 걷다 보면 과연 우리는 5·18의 정신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현재 구 전남도청 일대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시설이 지하 공간을 활용하고 있어서 위용이라는 말이 부적절할 수는 있으나 건물의 크기나 면적만을 따진다면 국내 여느 문화예술기관에도 뒤지지 않는 규모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전당의 입구 쪽에 구 전남도청(현 민주평화교류원)이 자리하고 있다.
<구 전남도청1>
이곳은 1980년 5월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증명해 주는 몇 안 남은 역사적 장소이다. 애초 도청건물도 전당 건설을 위한 철거 대상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렇게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가끔 주위를 지나가며 말끔하게 단장된 건물을 볼 때면 오히려 불편하고 낯설기만 했다. 지금의 외관만 놓고 보면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이라기보다 오히려 지은 지 얼마 안 된 세련된 현대식 건물 같았다. 분명 당시 계엄군이 쏜 총탄 자국이며 시민군의 저항과정에서 생긴 훼손 흔적이 남아있을 만도 한데 하얗게 칠해진 외벽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하긴 쉽지 않았다.
<구 전남도청2>
이는 건물 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2016년 초 도청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건물 안의 총탄 흔적을 처리한 방법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전당 측이 복원 과정에서 이 흔적을 지워버렸으며 그 외에 상황실이나 방송실 같은 중요한 공간의 원형을 훼손해 유가족 및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은 것이다. 진압군의 사격으로 패인 벽을 메꾸고 페인트로 칠해버린 상태에서 도청 보존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는 마치 죽기 살기로 싸워서 승리한 권투선수에게 얼굴의 상처가 보기 흉하니 가면을 쓰자는 것과 같다.
아시아문화전당이나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청을 복원하려는 일말의 의지가 있는지 매우 궁금할 따름이다. 최근 이에 관해 어느 정도 논의가 진척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와 더없이 빈곤한 역사의식에 다시 한 번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권력이 역사를 은폐하고 지우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정치인과 고위관료 지식인 등 기득권 세력의 형성과정과 유지수단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독재와 부조리를 참지 못하고 일어선 민중들이 결국은 바로 이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싸우다 죽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선열의 뜻을 이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시민의 몫이다. 광주시민이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명예로운 역사를 잘 지켜가야만 한다. 그러나 다소 우려스러운 점은 우리 사회가 명예에 대해 왜곡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자들이 언론에서 떠드는 ‘국격’이나 ‘신인도’ 같은 말에 우리 스스로도 세뇌된 것인지 아니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상처나 논란을 드러내는 것에 매우 예민하다. 월드컵 4강이니 올림픽 10위권이니 또는 누가 어디서 무슨 상을 받고 국가경제력이 몇 단계 올랐느니 하는 것은 자랑하면서 오히려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들은 소홀히 하는 것이다. 논란과 갈등을 불러올 만한 문제를 굳이 부각시키려 하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의 오래된 허례허식과 체면 때문이다.
또한, 조직의 비리를 덮고 허물을 감춰 주는 것이 의리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부정과 비리를 폭로한 정의로운 내부고발자가 조직으로부터 지탄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용기없는 자들이 오히려 용기 있는 자를 매도하고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의 비겁함을 들키기 싫어서이다. 이제는 약자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와 혐오가 정의로 포장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은 풍요로워졌지만 여유는 줄어들었고 올바른 것을 지키려는 마음도 약해졌다. 이 비겁함에 휩쓸리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광주시민이 지켜야할 자세일 것이다.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 배신으로 매도되는 사회에 희망은 없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곪은 것을 긁어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새살이 돋는 것이다. 뼈를 깎는 고통의 과정을 이겨내는 것이 바로 용기이며 명예란 가장 용기 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군부의 만행에 들고 일어선 광주시민의 용기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할 기억이다. 그런데 우리마저 낡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항쟁의 흔적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최신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원한다면 민중의 피로 이룬 역사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공허한 내면으로 이기주의와 탐욕이 빠르게 침투해 들어올 것이다.
<주먹밥만들기1>
<주먹밥만들기2>
5월 28일, 아시아문화전당과 금남로 일대에는 5·18을 기억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었다. 나이 많은 노인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어울리는 화합의 장이었다. 5월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현재의 심각한 청년문제를 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과거 항쟁 기간 주부들이 시민군을 위해 주먹밥과 김밥을 만들어주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주먹밥 만들기를 체험 할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주먹밥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사라지지 않았을 미래를 꿈꾸었다. 또 현대식 건물이 자리한 화려한 도로를 벗어나 1980년 그날 시민군들이 싸우고 피 흘렸을지도 모를 골목을 거닐었다. 어쩌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 주먹밥과 골목이 아닐까.
<전일빌딩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