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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감지하기

이 전시를 보러 가면서 가졌던 질문들로 글을 연다. 인스타그램에 랜덤으로 뜨는 피드에서 얼핏 본 대표작품의 이미지는 말하자면 ‘세련’됐다. 단 하나의 작품으로 전시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그 정도 판단만이 가능했다. 작가의 이름은 생소했다. 젊은 작가라고 하지만 근 몇년 동안 그 또래 작가들의 신진작가 타이틀을 걸고 이뤄지는 많은 단체 및 개인전에서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전시를 보고 온 누군가의 이야기는 이 의문에 간단히 답을 했다. 전시가 꽤 괜찮으며, 처음 갖는 개인전이라는 정보였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떨까? ‘디아스포라’라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인 기성언어를 전시의 제목으로 정했다는 것은 그럴듯한 어감의 외래어를 붙여 멋을 내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세심한 선별 작업을 거친 필연적인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일까.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는 저 돌멩이들은 내적 일관성을 전제로 태어난 시각적 이미지인 것일까.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큰 덩어리를 뚝뚝 떼어놓은 것처럼 전시장은 3개의 작품으로 크고도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을 세밀히 들여다보기 전에 놀라운 것은, 작가가 전시의 구성을 통해 문맥적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구성을 꾀한다는 것이다. 이미 5년 전에 구상된 이 작품들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다듬어지며 이제 군더더기 없는 형태로 구현되었으며, 작가에 의해 마치 어느 픽션 속 등장인물처럼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는 동시에 큰 맥락에서 하나의 역할을 부여받아 수행한다.

순창에서 공수한 150년 된 고목은, 하나는 우뚝, 낯선 전시장에 놓여있고, 다른 하나는 은은한 붉은 빛을 내뿜고 있다. 현장을 담아낸 사진작업도, 차가운 전시장 바닥에 놓인 실물도 온 몸으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잃은 나무의 일부이지만 오랜 시간 땅속을 헤집던 형태는 죽음마저 생명력이 넘친다.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강력한 오브제는 마치 윤동주 시인이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한 ‘세상의 모든 죽어가는 것들’ 처럼, 자신 앞에 놓여진 시간들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으로 내달음질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삶을 보여준다. 붉은 빛을 발하는 고목과 그저 놓여진 고목 사이를 가로지르는 오래된 문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 놓여진 인간과 소멸되지 않는 정신의 극적인 대립을 재확인시킨다. 이로써 우리는 상반된, 이야기의 두 주인공을 획득한다. 첫 작품을 거쳐 보이는 것은 차가운 거울의 방, '미러룸'이다.

앞서 등장한 두 가지 요소는 이제 공간에 포획된다. 중앙의 일그러진 미러 큐브는 편협한 시선을 가진 인간이 만든 세계이다. 이 큐브는 (당초 계획대로라면 사면을 둘러싸는) 거대한 미러룸에 놓여있다. 이것은 죽어버린 고목이 살아가는 가시적이고 유한한 현실세계이다. 작가의 의지는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당장 눈앞에 놓인 세계 너머의 세계, 그 영원의 공간은 대단한 의식을 통해 우주를 거쳐 나오는 곳이 아니라, 어쩌면 혼재되어 있다. 마치 모태의 태아에게 세계란 어머니의 뱃속이었다가 출산을 통해 진짜 세상을 만나듯이, 아프라삭스가 알을 깨고 나와 신에게 날아가듯이, 장자지몽 혹은 이원론적 자각을 제시한 소수의 사람들처럼, 작가는 초월적 차원을 감지한다.

‘Stone Bulge’는 앞서 제시된 소재와 공간을 묶어 결론에 도달하는 작업이다. 배경은 몽돌해변이다. 마치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듯, 혹은 현실의 속박을 벗어난 유토피아의 세계를 갈구하는 몽돌들이 모여 있는 듯 한 몽돌해변은 그 자체로 거대한 <디아스포라>이다. 전시장에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당시의 현장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업의 주요 포인트는 ‘선택’과 ‘이동’이라는 ‘행위’이다. 수천 년의 시간을 깨지고 뭉그래지며 머물던, 그들의 ‘세계’를 벗어나, 단지 몇 개의 몽돌만이 전시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진입한다. 이 선택은 그 주체에 있어 절대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이것은 작가가 교통사고를 겪은 후 깊이 탐구한 사후세계의 영향인 듯하지만, 정신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은 작가가 학부시절 작업한 작품들을 통해 이미 그에게 내재된 성향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머물던 작은 세계 밖으로의 이동은 절대적 세계에 도달하는, 존재의 최종목적이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작가는 이렇게 미장센의 마지막 작품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또한 나아가고 있는 생의 목적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 가지 작품의 저변에 넓게, 그러나 연하게 드러나는 ‘다른 차원, 즉 공간’에 대한 의식은 타고난 조각가의 기질을 반영한다. 작가는 대학에서 수업의 일환으로 처음 설치작업을 경험한다. 직접 질료를 다듬어 작업을 완성시키던 이전의 과정과는 달리, 다양한 매체를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이 더욱 뚜렷해지며 공간이 작품에 의해 변화되거나 상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현상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디아스포라>를 관통하는 절대적인 세계를 의식하고, 양 극단의 두 세계가 오버랩 되는 차원에 대한 여지를 던지며 작가는 공간과 차원 또한 이중적 입체 구조로 구성한다. 화면 혹은 작품 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관점을 공간으로 확장하여 작품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각가의 기질을 펼쳐 보이는 발상과 전개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다양한 매체와 질료를 사용하는 그의 방식에서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다. 사진, 사운드, 오브제, 설치, 조각 등 작품의 가짓수에 비해 다양한 질료와 표현방식은 작가가 얼마나 왕성하게 그 물성을 섭취해 소화하는지를 보여준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미지를 구현해내기 위해 전국의 고목을 뒤지고, 해가 뜨고 지는 시점의 작업을 위해 철수와 설치를 반복해가며 촬영하며, 현장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사운드를 담아오는 작업과정에서 이미지의 구현을 위해 장르를 선택 및 활용하는 치밀함 또한 엿 볼 수 있다. 현대미술이 확장해놓은 매체와 선택의 범주를 영민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즐거운 소식은 이 흥미로운 작업들이 인트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내적으로 구조를 갖춘 이 <디아스포라>는 작가의 커다란 플랜 안에서 향후 심화, 발전될 전시의 이슈를 제시하는 예고편으로 구성되었다. 다사다난한 일들을 경험하고 그로 인한 깊은 숙고의 시간을 거쳐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된 이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흥미진진하다. 정결한 삶의 정수가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구성될 그의 후속 <디아스포라>를 기대해본다.

임 리 원

글쓴이는 불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하고 광주비엔날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등 광주의 다양한 문화예술현장에서 일하며 지금, 우리의 정체성을 예술을 통해 탐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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