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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폭력에게

이 전에도 SNS 상에서 공개적인 설전이 오간적은 많았지만, 최근 강경 페미니즘 발언을 이어오고 있는 한 연예인 지망생의 글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트랜스젠더를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연적으로 트랜스젠더의 트라우마인 남성 성기에 대해 언급하고, 그들의 내적갈등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이 발언은 개인을 지목한 것이 아니었기에 트랜스젠더 성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이를 향한 것이었고, 그들은 영문 모른 채 이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희롱의 피해자가 되었다. 트위터를 통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배우 유아인 역시 같은 대상에게 폭력적이고 성적인 희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젊은 남성이며, 자신의 발언에 기초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성소수자로서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있는 트랜스젠더들의 상처를 공공에 까발려 희롱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 우리나라 1세대 트랜스젠더인 하리수는 SNS에 이 여성을 비난했다가 그녀를 지지하는 강경 페미니스트 집단의 역공에 하루 만에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는 2015년부터 시작된 페미니스트 집단의 전략적 단체행동인 ‘미러링’이었다. 이 페미니스트 집단은 ‘메갈리아’에서 시작해, 메갈리아4, 워마드, 트페미(트위터 페미니스트)등으로 파생되어 서로 정체성과 방향성에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태생을 공유하고 여성혐오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크게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된다.

2000년 초반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과 함께 관련 커뮤니티 ‘디시 인사이드’가 동반 성장했다. 사진 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주제를 ‘디시’화 시켜 노는 유희공간의 ‘메르스 갤러리’를 거점삼아, 남녀의 권력이 뒤바뀐 세상을 묘사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스테디셀러 <이갈리아의 딸들>의 이름을 합성해 ‘메갈리아’가 만들어진다. 당시 신종질병이었던 메르스가 퍼졌을 때 홍콩 당국의 격리조치를 거부한 여성들이 있다고 알려졌고, 이들은 여성혐오적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정보로 판명 났고 ‘~녀’로 이름붙이기 좋아하는 여성혐오에 억눌려온 여성들이 행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베(일간 베스트)에서 주로 행해졌던 여성혐오는 극단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여성을 ‘된장녀’, 더치페치를 하지 않는 여성을 ‘김치녀’로 부르며 폄하하는 현상은 일반적인 남성에게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 잡은 여성혐오를 보여주고 있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 우에노 치즈코는 젠더 질서의 깊은 곳에 ‘여성혐오’가 핵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여성멸시도 같은 개념이라고 말한다. 또한 여성혐오는 남성 간의 사회적 유대를 의미하는 ‘호모소셜’(HomoSocial), 그리고 동성애 혐오증인 ‘호모포비아(Homophobia)’와 늘 함께 다닌다고 한다. 호모소셜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남성들 간의 집단적 행위를 의미한다.

산업사회 초반까지, 가부장제와 그에 따른 남성우월주의의 권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저서 <제2의 성>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은 가장 완벽하고 유일한 형태인 남성에게 종속된 2차적 성에 불과했다. 그러나 90년대 경제적 대변동의 여파로 대거 남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밀려나, 여성이 생계에 뛰어드는 맞벌이 가구가 확산되었다. 이후 여성의 교육수준과 경제력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나, 남아선호사상의 잔재에서 제1의 성으로 성장한 남성의 의식은 노동시장에서 라이벌로 급부상한 여성을 흔쾌히 대등한 관계로 수용하지 못한다.

연애시장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시장지위는 뒤바뀐다. 한국은 손꼽히는 성비 불균형 국가다. 박정희 정권 인구 억제 정책 이후 여아를 감별하는 선별적 낙태가 유행이 되어,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2017년 현재 32-36세 여성 대비 잉여남성은 66,661명, 22-26세 잉여남성은 213,944명에 이른다. 거기에 더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전국 결혼 및 출산 동향 조사(2012)에서 결혼에 호의적인 남성은 67.5%였던 반면 여성은 57%에 그쳤다. 여성의 절대수와 결혼에 의지를 가진 여성의 수가 줄어들면서 여성은 희소성으로 연애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고, 나를 위해 ‘기꺼이 돈을 쓸’ 경제력 있는 남자, 180cm가 넘는 외모적 조건을 가진 남자에게 시장진입의 우선권을 부여한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남성의 의식은 사회적 위치를 븍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혐오를 발동한다.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남성의 존재감을 위태롭게 하고, 연애시장에서는 남성을 서열화하고 상품화하는 ‘김치녀’이기 때문이다.

여성혐오가 여성을 원하는 동시에 혐오하는 양가적인 감정인 반면, 남성혐오의 중심정서는 ‘공포’이다.미국의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발생하는 살인 중 87%가 남성에 의해서 저질러진다. 여성들은 평생 범죄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지니고 살아간다. 이 가능성은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명확해진다. 범인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 도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는 평범한 여성이 살아가며 겪는 크고 작은 성적 차별로 인한 불쾌함과 불편함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 공포와 불편함의 정도는 남성에게 체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대부분 설득되지 않으며 오히려 군대와 출산 등의 이슈를 통해 자신이 속한 성의 영역이 역차별 당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강경페미니스트 집단은 교육 등 순화된 방법으로는 이 차별적인 구조를 이해시킬 수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받았던 차별과 고통을 남성이 이해하는 방법은 오직 남성이 여성에게 행했던 폭력적 언어를 남성으로 대상화해서 거울에 비추듯 돌려주는 것이었다. 주비스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언급하는 ‘패러디’이다. 미러링은 여성혐오의 발현지인 일베의 여혐적 언어를 대칭적으로 사용한다. 김치녀는 한남충과 씹치남, 이상적인 여성인 스시녀는 갓양남, 탈김치녀는 코르셋이라는 용어로 바꿔 남성을 대상으로 원색적이고 성적인 패드립을 쏟아낸다. 이 미러링은 남성에게서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주장은 주목받는 듯 했으나 현재 그 유효성은 논란의 여지를 보인다.

그 내적 목표가 미러링 일지언정 이 표현은 표피적으로 폭력의 형태를 취한다. 상대의 모습을 베껴 스스로를 끌어내리면서 시도하는 미러링은 과연 작동하며 집단의 목표인 남성이 스스로의 행동을 자성하게 하는가, 우에노 치즈코는 ‘남성혐오’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미러링의 대상과 주체가 가진 사회적 자원 즉 권력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남성이 상위를 점유하는 사회에서, 언어적 패러디 역시 여성의 역지사지를 남성에게 체현시킬 수 없다.

또한, 행위의 주체자인 페미니스트 집단은 미러링의 언어적 폭력성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상대에게 ‘오죽했으면 이러겠냐’ ‘거친 표현 밑의 우리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느냐’ 라며 숨겨둔 의도를 언뜻 내비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서 경험했듯이, 폭력이라는 방식으로는 교육의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폭력은 발생하는 시점부터 이전의 맥락을 지워버린다. 강경 페미니스트 집단에게 난타를 당한 배우 유아인의 경우 경험으로써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언행을 재고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들이 의도했던, 역지사지를 통한 약자의 고통을 체현하고 공감하는 결과는 이끌어내지 못 할 것이다. 매의 따가움과 집단의 광기를 학습시킬 뿐이다.

미러링은 완전히 하나의 전략이며, 상대(일베)의 언어를 대칭적으로 사용해 자성의 여지를 계산한다는 점에서 섬세하게 행해져야 한다. 동시에 성립요소에서 한 가지만 벗어나도 미러링은 혐오표현으로 붕괴되어 버린다. 일베 밖 세상으로 나온 미러링이 모든 남성을 한남충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은 차가운 전략이 아닌 분노의 혐오표현으로 변이한다. 폭력에 대한 대응책이 아니라 자가 성장하는 폭력이 된 것이다.

이 폭력은 ‘남성이 여성의 권리를 가져갔기 때문에 남성에게서 다시 뺏어와야 한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미국에서 여성이 참정권 획득을 위해 싸우던 시대의 이론적 배경에 일치한다. 인간에게 단지 2개의 성이 존재하고 남성이 인간의 원형이며 여성은 그 대칭에 존재하던 시절이다. 미국의 초기 페미니즘은 여성을 주변부적 존재에서 남성과 동등한 존재라는 인식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으나 백인 중산층 여성 중심의 제한적 페미니즘이었음을 인정했다. 여성이라는 범주로 묶인 집단의 구성원 모두가 단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종과 소득, 교육수준에 따라 젠더 내부에 다양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누군가에게 유리천장을 깨는 문제일 때 다른 누군가에게는 유리바닥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이후 젠더의 개념은 세분화되어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과거에 없던 성 개념이 등장했다. 한국사회의 초고속 발전으로 야기된 사회병리적 현상들은 경제적, 세대적, 지역적인 요인으로써 젠더만큼 차별과 억압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의 차별은 더 복합적인 구조의 요인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가부장적 구조와 경제 시스템은 체제의 유지를 위해 남성우월주의를 작동시키고 젠더를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적 분류로 단순화했다. 주비스 버틀러에 따르면 우리가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본성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며,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 역시 문화화의 결과라고 말한다. 즉 고정된 성역할은 양 극단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내,외적 갈등을 유발하며 현재의 권력구조는 남성에게는 의무, 여성에게 억압의 구조를 순환시킨다. 이러한 상호관계에서 반목할 것은 반대의 젠더가 아닌, 사회에서 고정적인 성역할을 만들어 낸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분법적 젠더의 정의는 확장해 개인성의 획득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에게는 사실 보편이란 없고 개별의 총합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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