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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성공 신화들의 ‘숨바꼭질’

‘집’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의 목표가 되기도 하고 또 죽을 때까지 애를 써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한 서린 꿈이기도 하다. 특히 서민들에게는 일생을 거쳐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여 안겨주는 ‘집’이라는 존재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을 이 영화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2013년에 개봉한 허정 감독의 「숨바꼭질」은 살인을 소재로 한 스릴러가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은유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를 실험하면서 한국형 스릴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서사는 성수와 주희가 엮어가는 서사다. 성수는 형 성철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집주인의 전화를 받고 수 십 년 만에 형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주희 가족과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성수 가족과 주희 가족 간의 갈등은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추리로 점점 고조되고, 나중에는 숨막히는 추격과 격투가 진행된다.

또 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이루는 성수와 성철(성수의 형)의 서사는 보조 서사이면서 과거의 시간을 구성하며 현재의 사건들과 이중 구조를 만든다. 그러면서 현재의 사건들과 맞물리게 되고 주인공의 잠재된 심리를 관객들에게 폭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중심서사(성수-주희)

성수가 부동산 주인의 부탁으로 빈 집에 짐을 빼주기 위해 형(성철)의 아파트를 찾아가면서 1막이 시작된다. 성철의 아파트 근처 차 안에서 성수를 기다리던 성수의 가족은 우연한 사건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고 이를 주희가 도와주면서 두 가족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렇게 영화 초반부 우연한 계기로 만난 두 주인공 간의 서사는 대결구도가 아직 드러나지 않으며, 주희가 오히려 성수 가족에게 호의를 베풂으로서 주희의 정체와 성수의 진의가 모두 은폐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막에서도 주희의 평범하지 않는 언행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단 주희는 말을 더듬으며, 대화를 할 때에 상대방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는다. 처음으로 성수의 부인 민지를 집으로 초대하면서 건네는 말은 “옷이 참 예쁘네요. 그 옷 어디서 사셨어요?”이다. 낙후된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희는 한 눈에 봐도 중산층에 속하는 민지의 고급스러운 옷을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옷을 살 의사도 없지만, 주희는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중에 표현하고는 곧바로 다른 대화를 이어나가는 일방적 소통을 시도한다. 이러한 대화방식은 주희가 나중에 성수의 집을 일방적으로 강탈하고자 했을 때의 행동방식으로도 드러난다. 그리고 민지의 딸이 자신의 딸을 ‘더럽다’고 표현했을 때 주희는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되는데, 이는 두 가족의 대립 구도가 벌써 생겨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2막에서는 성수가 이상한 암호를 발견하면서 영화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행된다. 결벽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예민한 성수는 남들이 모두 그냥 지나치는 낙서를 보고 어떤 암호임을 감지한다. 성철이 살았던(주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집집마다 현관문 옆에 어떤 낙서가 있는데, 이는 그 집에 어른·아이·남자·여자가 각각 몇 명씩 거주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누군가의 규칙적인 표식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추리의 국면은 관객에게 성철의 행방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고 급기야 성철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그 범인이 주희임이 탄로나기에 이른다.

3막에서는 자신의 범행이 드러난 주희가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은폐하지 않고 성수의 집을 강탈하기 위한 격렬한 추격전을 벌이는 스릴넘치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처음에는 검은 헬맷을 착용한 채 성수 가족이 사는 아파트 주변을 서성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성수의 가족을 위협하며, 점차 매우 당당하게 그 아파트가 자신의 집임을 주장하면서 맹목적이고 원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 격렬할 격투 끝에 집은 불에 타고 성수의 가족이 승리하며 사건은 일단락된다. 성수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그 집으로 새로 이사 온 가족의 등장,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주희의 그림자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보조서사(성수-성철)

성수의 이복형인 성철과의 서사는 영화 초반부터 중심서사와 함께 이중적으로 제시되는 서브서사이다. 매우 신사적이고 깔끔한 중산층 가족의 가장으로서 청결함에 집착하는 성수의 지금 모습과는 달리, 과거에 어린 성수는 고아였다. 성철의 집으로 입양되면서 ‘형의 가족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며 갈등하는 성수의 주변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성철이 마을 여학생의 성폭행범으로 누명을 쓴 것이었다. 형이 범죄자로 내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성수는 형을 감싸는 양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보고 질투를 느끼며 불현듯 형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거짓 증언을 해버린다.

이렇게 보조서사 1막에서 폭로된 성수의 과거사는 현재시점의 성수의 삶과 매우 대조되어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그러면서, 안정적으로 보이는 성수가족의 행복이 사실은 사상누각일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들고 관객을 성수와 함께 추리의 국면으로 이끈다.

청결함에 집착하던 성수의 강박증은 다름 아닌 죄의식에서 오는 공포와 언제 자신의 자리를 또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의 표현이었다. 보조서사의 2막에서는 성수가 형의 행방을 추적해가면서 결벽증이 더욱 심해지고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철의 집에서 형의 실종 단서를 찾던 성수는 형의 집 베란다가 주희의 집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주희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주희의 집 옷장에서 형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의 추리를 끝내고 3막에서는 공포보다는 속죄의 국면을 맞이한다.

보조서사에서 밝혀졌듯이, 주희가 일방적으로 성수의 집을 강탈하는 존재로 보였으나 사실 한때는 성수가 성철의 가정과 유산을 강탈한 가해자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성수의 시선에서 벗어나 성수 주변 인물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형의 시선에서 고아였던 이복동생의 욕망을 바라보고, 성철의 어머니 입장에서 비정하고 무서운 양아들의 폭로를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조서사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승자의 관점에서 잠시 패자의 관점으로 시선을 이동하여 다양한 가치판단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폭로가 일어난 후에 영화는 다시 성수와 주희의 격투 장면에 집중하는데, 비로소 관객들은 성수의 안락함이 처음부터 성수의 것이 아니었다는 데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치는 매우 미약하며, 과격한 격투신을 보는 관객들은 명백한 범법자인 주희가 어서 성수 가족의 곁을 떠나주기를 곧 바라게 된다. 그럼에도 보조서사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서 좀 더 깊은 이면의 주제를 건드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양가적 세계의 공존

이 영화는 초반부터 성수가 속한 세계와 주희가 속한 세계의 극명한 대립을 보여준다. 성수의 세계는 밝고 깨끗한 화이트 톤의 의상과 배경들로 가득하다. 고급아파트,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카페, 청결한 부엌과 환한 조명효과는 성수가 속한 부유층의 세계다. 그 세계는 무엇이든 가지런하며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무엇보다 청결하다. 또한 성수와 성수의 부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예의바르고 배려하는 문화적인 성숙함이 묻어난다.

한 편 주희의 세계는 땅거미가 지는 어둑한 시간 속에 있으며, 재개발을 앞둔 낙후된 아파트로 어두침침하고 위험해 보인다. 그곳에 놓인 물건들은 무엇이든 가지런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쑤셔박혀 있으며 매우 불결한 상태이다. 주희와 그의 딸이 사용하는 언어는 예의가 없거나 비문화적이며 몰상식을 넘어 야만적인 맹목성이 느껴진다.

그래서 성수의 가족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이고 주희의 가족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빼앗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성수가 속한 세계의 모순

그러나 성수가 속한 세계에는 모순적인 과거사가 엄연히 존재했었다. 그는 예의나 문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거짓으로 형을 매장시킨 적이 있으며, 그가 가진 지금의 재산은 형을 배척함으로서 빼앗은 결과이다. 죄의식과 비밀스러움으로 점철된 그의 유년기 삶은 현재의 삶과 양가적으로 존재하면서 자신을 괴롭힌다.

과거사 뿐만아니라 성수의 현재 세계에도 모순은 존재한다. 청결함을 자랑하는 성수의 고급 카페 앞 인도에는 항상 불결한 외모의 노숙자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가끔 성수의 건물 화장실에 들어와 불결한 손자국과 머리카락을 남기기도 한다. 아무리 성수가 깨끗하게 그릇을 닦아놓아도 어느새 오염이 되어있어 성수를 괴롭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귀여운 양 볼과 깨끗한 식탁을 마구 더럽힌다. 또한 아무리 외면하고 배척하여도 성철이 그의 형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으며, 성철의 흔적들은 성수를 계속 따라다닌다.

주희가 속한 세계의 항존성

주희가 속한 세계는 어린 성수가 밀쳐내고자 했던 빈곤의 세계이며, 어른 성수가 밀어내고자 하는 불결한 세계다. 하지만 주희의 세계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자명하게 확인한다. 주희와 같은 빈곤의 대명사는 주희 말고도 그녀의 아파트 곳곳에 존재하며, 무엇보다 주희의 딸 ‘평화’는 제2의 주희로서 엄마의 범죄를 도와주기도 한다. 주희의 어린 딸(평화)이 성수의 휴대폰 고리를 자기 거라고 우기는 장면이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빈곤이 낳은 제2의 빈곤이 또 다른 범죄를 일으킬 수 있으며 이는 계속 반복될 거라는 상상 때문이다.

주희의 가족은 다른 사람의 집에 숨어들어가 주인을 살해하고 그곳을 자신의 집으로 만들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다른 집을 욕망하게 되면 다시 그 다른 집으로 옮겨가고 살해하기를 반복하는데, 영화 중간 중간 보여주는 수많은 아파트 창문들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그러한 주희가 매우 많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사실 늘 ‘집’이라는 공간을 욕망할 뿐만아니라, 내 집이 아닌 다른사람의 집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현재의 집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노력하거나 인테리어 잡지와 블로그에 있는 이상적인 집을 동경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모델하우스는 다른 이의 집을 합법적으로 욕망하거나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며, 소위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기 좋아하는 우리는 다른 이의 공간에 침입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다. 이렇게 우리가 집을 욕망하는 이상 주희는 어디에나 항존한다.

자본주의 신화의 숨은 전략들

3장의 이항대립적 분석에서도 드러나듯이 성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며 주희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실패한 패배자를 표방한다. 기득권층인 성수는 롤랑 바르트가 지적한 ‘탈명명화’된 쁘띠 부르주아이다. 바르트가 지적했듯 쁘띠 부르주아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자’가 그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이며, 타자가 눈 앞에 나타난다면 모른 척하고 부정해버린다.(롤랑바르트, Mythologies) 그래서 신화에서 쁘띠 부르주아가 사용하는 전략은 ‘동일화’ 전략이다. ‘동일화’는 ‘개념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상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그 대상은 공포로서 다가오지만 어떠한 개념적인 언어로 그것을 명명해버리면 그 대상의 본질이 어떠하든 내가 그것을 알고있는 상태로 인식되면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개념화하는 전략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그래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개념과 동일화하기 위한 방편이다.

성수 역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타자들의 정체를 밝히고 규정하려 애쓴다. 성수가 두려워하는 타자는 때로는 카페 앞 거지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때로는 화장실 변기의 불결함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주희와 같이 폭력적인 야만성으로, 그리고 성철과 같이 지우고 싶은 과거로도 나타난다. 하지만 성수는 영화의 절반가량을 그 타자들의 정체를 잘 알지 못해서 애를 먹는다. 그 존재들은 늘상 기습적으로 등장하거나 규칙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다. 항상 숨어있는 이 타자들은 기득권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아 매우 거슬린다. 한마디로 개념화되지 않는 그들로 인해 성수는 동일화 전략에 실패하고 ‘부정하기’ 전략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다.

성수는 이제 그들을 부정한다. 성수의 결벽증은 부정하기 전략의 대표적인 실천양식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띄는 모든 오점을 지운다. 냉장고 안의 음료는 모두 한 방향을 향하도록 하고, 욕실과 타일과 변기는 한 점의 오점도 없도록 하며, 카페 앞의 거지는 치울 수 없으므로 눈을 감는다. 특히 성철에 대한 과거는 최대한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성수의 세계에서 타자들이 놓인 상황은 성철의 편지글에 잘 드러난다. 수년간 가족들의 외면을 받으며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온 성철은 지속적으로 가족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아버지, 저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저는 유령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피부병으로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형의 외모는 그러나, 성수의 세계에 함께 버젓이 공존해 있었으며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표층적 갈등은 어린성수의 거짓말이고, 어른 성수와 주희 간의 집을 둘러싼 격투이다. 하지만 심층적 갈등은 성수가 과거를 제거해버림으로써 시작된다. 성수는 원래 고아 출신으로서 결핍으로 점철된 유년기를 보냈으나, 형을 제거함으로서 부르주아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한다.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성수의 안락함은 사실상 정당하지 않으며, 그래서 주희와 성수의 게임도 페어 플레이가 아니다. 성수에게 자리를 강탈당하고 비참하게 살아온 성철의 현재는 누군가에게 빼앗겼던 과거를 갖고있을지도 모르는 주희의 현재와 비슷하다.

하지만 성수는 자신의 과거를 성공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현재의 자리가 원래 자신의 자리인양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 성수와 주희 간의 큰 빈부격차가 생겨났는지, 성수는 집이 있고 주희는 집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되었으며, 성수가족은 자신들의 위치와 타자들의 위치를 당연한 위치인양 자연화시킨다. 그런데 알고보면 성수의 부는 거짓된 혀로 얻어낸 불로소득이며, 거짓된 부처럼 그의 개인사 역시 위조된 역사이다. 그의 아내 민지조차도 남편의 이복형인 성철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며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

성수가 차지한 세계에서 패자인 주희나 성철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패자들의 불결하고 불쾌한 외모는 신화적으로 왜곡된 결과이며 이제 그 외모가 자연화되어 관객들에게 당연시 여겨지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이 영화에서 거지나 주희나 성철의 역사는 ‘증발’해버렸다.

영화는 주희를 범법자이자 가해자로 그려내고 있지만, 주희가 왜 범법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다만 관객은 야만적이고, 맹목적이며, 막무가내의 방식으로 상대방의 안락을 빼앗으려 하는 주희가 어서 패자가 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이것은 성수가 이미 승자의 역사를 쓴 신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성수의 세계는 사실 승자의 세계이며 주희의 세계는 패자의 세계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승자 성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성수의 시각에서 주희는 매우 더럽고 주희가 사는 집은 위험하고 불안하며 안락하지도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수의 시각이지만 관객은 이것이 기정사실인양 동의한다.

성수의 시각에서 주희를 타자로서 관찰하기 때문에 주희의 범법의 이유는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 성수는 처음부터 중산층의 자리에 존재했으며, 주희는 처음부터 빈곤한 자였을 뿐만아니라 빈곤의 상태가 변화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승자의 시각으로 쓰인 신화는 반쪽짜리 세계를 보여주고, 세계는 양가적 모순이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의 진실과 한쪽의 진리만을 설교한다. 이런 과정에서 독자는 기득권의 논리에 설득당하고 기득권은 긍정적 가치를 독점한다.

성수는 평범하고 책임감 있고 노력하는 가장이다. 그의 아내 민지는 예의바른 현모양처로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아이들을 맡기면 올바른 아이로 자나랄 것 같은 신뢰가 샘솟는다. 밝고 청결하며 교양있는 민지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주희와의 대결에서 ‘억울하게 빼앗긴 자’로 인식된다. 즉 성수의 가족은 정당성, 문화인, 교양인, 겸손함, 청결함 등 모든 긍정적인 가치를 독점하고 있다.

한 편 주희는 난폭하며 비밀이 많아 보이는 음침한 사람이며, 머리손질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게으르고 불결한 자이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는 빈곤한 자가 게으르거나 또는 지능이 낮을 수 있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그녀의 딸 평화 역시 예의없고 비상식적인 태도로 관객을 경악케 하면서 빈곤한 가정의 딸이 얼마나 교양이 없을 수 있는지를 통감하게 한다. 한마디로 주희가족은 부당성, 강탈하려는 자, 비교양인, 비문화인, 불결함 등 모든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장치는 영화에 몰입하면 할수록 관객은 성수를 응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청결하고 부유하고 예의바른 가장에게 잘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저렇게 불결하고 빈곤하고 불쾌한 여인에게 정당한 이유 따위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는 점이다. ‘집’을 둘러싼 결핍과 욕망의 서사를 한국적 스릴러로 표현한 것에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기득권의 승리의 서사를 일방적으로 전파해버리는 반대급부적 효과도 분명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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