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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애도의 정치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새로운 정치적 운동을 구성하는 동력이 되었던 것은 국가 혹은 공권력이 낳은 죽음들이다. 1960년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은 한 개인의 몸을 파괴한 국가 폭력을 적나라하게 증언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하나로 결집시켰고, 이는 4·19혁명으로 전이되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리고 10년 후 1970년 11월 13일, 서울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의 죽음은 산업화 과정의 한 가운데서 착취와 탄압의 주요 대상이었던 노동자의 형상을 가시화하는 사건이었고, 이후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이라는 그의 부름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노학연대의 길을 열었다. 다시 10년 후 80년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 시위를 시작으로 27일 도청에서의 마지막 항전에 이르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광주 시민들의 죽음이 있었다. 철저한 광주의 고립화와 언론 통제로 인해 ‘유언비어’로 존재하던 오월광주는 점차 죽은 자의 질문으로 변형되어 산 자에게 전해졌고, 이후 광주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민주집회의 공통된 요구사항으로 등장한다. 나아가 열흘 간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저항과 연대의 구성체는 혁명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본격화되는 민주화운동은 오월광주가 남긴 요구와 질문에 응답하고 그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전개된다.

이에 따라 한국의 대중들은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참여의 주체로 거듭나곤 했다. 이는 그동안 노제와 추모제가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는 운동의 주요 형식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권력에 의해 공식적인 애도가 금지된 상황 속에서, 거리에서 치러지는 장례나 광장에서 진행되는 추모의 의례는 그 자체로 정치적 실천 행위가 되었다. 특히 87년 7월 9일, 전 국민이 애도에 동참했던 이한열군의 영결식 장면은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 정치적 행위로 연결되는, 장례와 추모가 곧 저항과 투쟁이었던 80년대 운동의 특이성을 잘 보여준다. 이날 문익환 목사는 단상에 올라 ‘전태일 열사여’를 시작으로 ‘광주 2천여 영령’을 지나 ‘이한열 열사’에 이르기까지 26명의 죽은 자들을 외쳐 불렀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죽어간 이들에게 ‘열사’라는 상징적 이름을 부여하고, 그들을 호명함으로써 현장으로 불러들이는 이러한 의식은 집회의 성격과 그 곳에 모인 이들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규정하는 하나의 관문이다. 이를 통해 집회에 모인 이들은 열사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애도의 공동체로 묶이며, 동시에 죽음으로도 이루지 못한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투쟁을 지속하는 정치적 공동체로 거듭난다. 이후 이어지는 가두행진은 확인된 정체성을 실천하는 투쟁의 한 형식이다. 독재와 자본에 대항하는 ‘민주’와 ‘노동’의 구호를 외치며, 운구차에 실린 죽은 자의 뒤를 따라 걷는 행위는 그대로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는 열사들의 말 없는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노제와 추모제가 치러진 80년대를 지나면서 이후 대중 집회는 민중의례를 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과 애국가를 제창하는 국민의례를 대신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돌아가신 열사들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것이 집회를 시작하는 고정된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한 타인의 죽음이 한 개인을 정치적 참여의 주체로 전이시키고,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현실 정치의 실제적 변화를 이끄는 힘을 지녔던 것은 아마도 80년대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용산에서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많은 죽음들이 있고, 노란 리본과 포스트잇의 물결이 보여주듯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지만, 무엇인가 변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 슬프지만, 말할 수 없이 정치적으로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다.

오래된 죽음과 애도의 정치를 다시 불러들이는 까닭은 그때와 같은 연대와 저항의 운동을 주창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늘날 정치의 형식과 삶의 조건이 80년대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80년대와 같은 운동의 방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지금의 민주주의와 노동현실이 처한 한계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계기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조건들 속에서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을 구성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 속에 내재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데리다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매장되어 버린 마르크스를 다시 읽으면서, 마르크스를 ‘유령’으로, 그를 다시 읽는 작업을 ‘애도’로 명명한 바 있다. 그리고 데리다에게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애도하는 작업은 혁명의 불가능성이라는 유럽 역사가 처한 아포리아 안에서 길을 찾기 위한 사유의 방법이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이제이북스, 2007)

유령은 죽었으나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 ‘낯선 손님’으로 와서 우리의 주변을 떠돌아다닌다. 유령들은 죽음으로 지금 우리에게 현전한다. 따라서 유령을 애도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인해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비-현실의 차원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그들의 꿈을 지금 우리의 꿈으로 다시 사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꿈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지금 우리의 불가능을 타개할 하나의 가능성으로 과거의 죽음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애도의 작업이다. 80년대는 강력한 정치적 변화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처절한 실패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죽어간 자들이 외쳤던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은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며 희망이다. 따라서 죽음의 시공간을 다시 기억하는 것, 그 곳에 내재하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지점들을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탐색하는 시도들이 필요하며, 이 때에야 비로소 오늘의 죽음 또한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진 출처 - 세월호 노란 리본 - http://gokurii.blog.me , 이한열 영결식- 이한열 항쟁 기념관 >

-필자소개-

강소희

필자는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비평 전공 박사과정 수료생이다. 현재는 박사과정 논문 준비중이며, 동신대에서 강의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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