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남진은 그동안 탱화, 민화 풍속도 등의 표현 방식, 특히 감로탱화에 나타난 풍속화의 조형성을 통해 현대인들의 이야기와 시대의 현실성을 재현했다. 또한 인간과 현실의 문제에 관해 자신의 화폭에 꽃, 달, 파랑새, 술잔 등과 같은 상징적 모티브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만의 회화성을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던져 버린 듯하다. 거미줄처럼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하는 올가미와 같은 것들을 전부 털어내고자 했다던 그녀의 묵직한 발언을 통해 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해방감보다는 현실 참여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진실,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둘러싼 상황들 가운데 변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현실에 대한 그녀의 복잡한 감정과 공감하기 위해 최대한 그녀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한다.(물론 깊이 들어갈수록 표면으로 밀어내는 힘은 더 강하겠지만......)
1. 슬픔의 깊이, 블루의 심연(에서)
겨울이 오기 전 깊은 가을 녘에, 아니면 노을이 지고 밤의 시작으로 접어드는 저녁에, 자연의 풍광이 달리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슬픔의 깊이의 차이, 드러남과 숨음의 감정의 차이를 느낄까? 문인 이옥의 표현처럼, 슬퍼하는 자들이 슬퍼할 줄은 알지 슬퍼하는 이유는 잘 모르는 것일까? 작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던 이옥의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에서처럼, 인생의 중반에야 비로소 그 슬픔의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아직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임남진이 그토록 슬퍼했던 시간들의 흔적을 살아보지 못해,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 깊이에 도달할까? 언제나 그랬듯, 나는 작품으로 그 심연을 탐색한다.
그림1 임남진, <파도>, 55x80cm, 한지에 채색, 2010, ©사진, 김미진
임남진은 자신에게 한없이 들어오는 슬픔, 만물의 현상이 슬퍼지는 이유를 몇 회(會)를 거쳐 깨달은 감정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그녀의 슬픔은 중년에 들어선 자신의 마음과 몸의 변화에서 발생된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이 감정처럼, 인간의 수많은 마음을 시처럼 풀어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 너머의 눈빛에서 그녀 스스로 지독할 정도로 억누르고 있는 30여 년 간의 한국사회의 복잡한 시간의 흔적에 매몰되어 있는 그녀의 슬픔의 시를 해석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은 한국 사회의 변화 과정, 즉 민주화, 그리고 지역 미술계 및 한국미술의 급격한 변화의 과정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현세를 풍자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생생한 일상 소재를 결합해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의 삶과 현실성을 집요하게 담아냈던 자신만의 회화적 어법은 인간의 욕망과 현세의 삶을 집요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감로탱화’, ‘풍속도’ 등과 같은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죽은 자인 아귀는 우리 자신이자 거울에 비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아귀’는 최근 10여 년 전부터 ‘상사화’와 같은 새로운 모티브와 결합된다. 거친 파도 위에 불안하게 떠 있는 상사화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한국인들의 욕망이자, 자신 내면에서 꿈틀대는 다양한 욕망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그림1)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의 끝 무렵, 시대의 변화를 외쳤던 수많은 미술인들의 일부가 오히려 보편자 및 총체성의 폭력성에 희생되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불행한 의식의 십여 년을 보냈다. 폭력과 지배의 표지이며 흔적인 포섭(subsumption)의 개념이 시대의 변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화려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예술작품들, 여전히 가난함과 싸우는 와중에, 삶에서는 더욱 고급 지는 미술작품들, 신념에 의해 결속된 단체들의 지속적인 행동에서의 이견(異見), 대중의 변화, 이미 풍요로워진 사회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국가(사회)의 폭력적인 것 등이었다. 시대의 변혁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민주화 운동 이후의 시간이 오히려 혼돈의 시대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자신의 삶과 인생, 그리고 역사에서 사라져 가고 왜곡되어 가는 ‘시대의 미술’의 인식에 대한 절망, 미술과 사람들의 변화 등이 끊임없이 쏟아지며 그녀를 지독하게도 외롭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실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눈이 그토록 슬퍼보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묵시록적인 감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절망, 외로움, 갈구함에서 얻어지는 그녀 스스로의 끊임없는 욕망을 어떻게든지 떨쳐버리고 싶은 몸부림은 긴 심신의 아픔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 그녀는 일상적인 삶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넌지시 던진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의 푸른빛이 그녀의 일상을 물들인다.
2. 스틸 라이프, 상사화
“죽음도 삶만큼 소중하다.” 영화 <스틸 라이프 Still Life>에서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 고독사를 당한 무연고 시신들의 사후를 처리하는 공무원 존 메이의 업무 방식은 독특하다. 그의 완벽하고, 절제된 감정, 똑같은 행동으로 일상을 보내는 무료한 그의 삶과 달리, 그의 업무는 긴 시간 죽은 자들을 위해 가족을 찾아 주고 장례절차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즉, 존의 삶은 반복된 일상에서 ‘정물’과 같다. 고요할 정도로 정지된 상태, 그의 반복된 일상이 ‘죽음’과 같은 것이다. 멈추어 있는 생명과 마주치는 한 편의 정물화처럼, 먹다 남은 사과가 텅 빈 공간에 남겨져 있는 장면처럼, 존의 삶은 조용하다 못해 공허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업무 행위는 결코 죽음과 같지 않다. 망자들의 삶을 재단하거나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 자체로 경건하게 그들의 마지막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삶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망자를 재단한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사람들조차 한 두 줄로 정의내리지만, 전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존이 몇몇의 사물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진정성 있는 답례로 서술한다. 존이 고독사를 하는 망자들에게 지독히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망자와 교차시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사한 사람의 사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존은 고독사한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존재를 조명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Still’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 ‘계속된’과 ‘정지된’의 양자성이 내재되어 있고, 영국에서 이 단어는 형용사로 ‘고요한’ 혹은 ‘조용한’ 의미도 있다. 그래서인지 존을 둘러싼 삶의 색채는 채도가 낮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부분 잿빛의 장면과 함께 특정 사물에 ‘푸른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푸른색은 무료하고 잿빛의 화면에 ‘희망’과 같은 존재론적 ‘변화’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고정되어 있고, 정돈되어 있었던 존의 삶은 오히려 망자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변화된다. 예를 들어, 망자의 살아 있는 친구들의 삶에서 존은 망자가 자신과 같이 똑같이 통조림 하나와 토스트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망자의 과거 삶에서 자신을 발견한 존은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림자 같은 그의 얼굴에 새로운 색채를 부가한다. 그의 삶에 푸른빛이 맴돈다. 항상 똑같은 통조림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존이 핫초코를 마시고, 상사의 차에 오줌을 갈기고, 노숙자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일상에 누군가를 들여다 놓는다. 망자의 지인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를 둘러싼 ‘상황’이 자신도 모르게 존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망자를 위해 산자들이 행동한 것이 아니라, 망자가 산자(존 자신, 그리고 망자의 친구들)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망자, 윌리엄 스토크의 딸 켈리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화면에 또 다른 색채를 덧칠할 수 있는 기대감을 영화는 채워주지 않는다. 존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들러붙은 외로움을 안고 홀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가 달래주었던 죽은 망자들이 깨어나 그의 옆에 선다. 망자들이 존의 죽음과 삶 모두에게 위로를 보낸다. 윌리엄 스토크의 생을 따라가면서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의 기억에 남았는지를 발견하는 자신(존)과 망자의 지인들이 있다.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을 일깨우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망자를 쉽게 판단하며 기억하지만, 망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존 자신의 삶이 바뀌는 것이었다. 서로 관계없는 상황이 하나의 변화를 통해 연결되고, 변화되는 과정처럼, 우리는 그녀의 그림이, 그녀의 푸른색이, 우리의 삶의 모티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림’은 하나의 ‘푸른빛’과 같은 존재이다. 그녀에게서 그림이 인생의 동행이 되었던 것처럼, 머리로 그려진 작(제)품들과 달리, 그녀의 그림은 우리의 가슴 언저리를 꿈틀거리게 한다. 예술이 살아 있는 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감로탱화를 그리면서 그녀는 어리석고 외로운 현대인들의 영혼들을 붓끝으로나마 감싸 안고 싶어 했으며, 예술이 좀 더 따스하게 인간을 위한 것이었으면 하는 그녀의 일관된 바램이 여전히 푸른색을 통해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리는 것, 그녀의 즐거움
“우리가 태양으로부터 대지를 떼어낼 때,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지구는 이제 어디로 가나? 모든 태양으로부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더 추워지지 않았는가? 계속 밤이 또 밤이 오지 않는가?
오전에도 등불을 켜야만 하지 않을까?”
- 프리드리히 니체 -
2차 세계대전 이후 광기와 몰락의 전쟁이 끝나고 변화된 세계, 그러나 더욱 짙어진 어둠은 과연 무엇인가? 상처받은 주체는 자신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자 했다. 시대의 미술이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 녀는 그토록 외로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과 외로움은 미술의 역할과 존재이유를 고민하는 과정의 상징적 표현이다. 10 여년의 이유 모르는 슬픔의 원인들을 그녀는 이제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인간의 냉혹함, 시대의 부조리 등을 시간(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자신을 자유롭게 했지만, 새롭게 구속하고 있는 예술의 이중성을 직면한다. 그래서 그녀는 거미줄처럼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하는 마법과 같은 올가미, 즉 자신을 규정짓는 예술 형식, 반복되면서 채워 넣는 색,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방식, 그림이 ‘머리(지성)’가 되는 방식 등, ‘그리는’ 행위를 잊어버리고 있는 자신, 다시 말해 시간(사회) 속에서 최초의 영감이 진부해지고, 통속화되어가는 모든 것들, 즉 스스로 예술적 ‘달인’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완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리고 고귀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죽음이 삶과 반대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이자 이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그녀는 아직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야만 하고,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그녀가 ‘그리는’ 것이다. 화폭을 구성하는 한지(닥지) 자체의 어려움, 뭉게 뜨리고, 덧칠하고, 마르는 과정에서 무엇을 그토록 뭉개고자 했는지, 그 시간의 과정에서 마주한 이젤은 자신이 걸어온 시간만큼 그녀에게 회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그녀는 ‘달’과 ‘구름’, 거리의 ‘꽃’들을 ‘새롭게’ 보았다. 대상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몸을 감싸는 ‘바람’을 느꼈다. 턱 막힌 어둠의 골목길에서 예전과 다른 향을 느꼈다. 계절의 ‘냄새’가 보였다. 의식의 심층에서 느껴진 일상 속 풍경의 차이와 변화가 일상화되고 규격화된 삶의 국면에 새로운 차이화를 낳은 가능성임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리는 즐거움을 발견한 것이다.(그림2) 과거 기억의 현재로의 중단 없는 참여는 그녀의 ‘그리는’ 과정에서, 일상의 경험에서 정서의 변화가 대상 속에 표현되는 결과이다. 이로써 그의 그림은 일상에서 새롭게 발견된 대상에 대한 의식을 동반하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억압된 의식에서 해방 되고자하는 자유로운 몸부림은 ‘그리는’ 행위로 돌아간다. 그리는 행위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그녀가 오히려 추상, 반구상, 그리고 김환기의 오마쥬(homage)를 끄집어냈다. 지나간 대세에 얽매이지 않고, 지나간 대세를 다시 끄집어 주면서 조망해주는 미술계에 대해 오히려 그녀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비타협적 태도로 접근한다. 이 태도는 그녀가 ‘관리되는 사회’의 바깥에서 자신의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이는 저항의 모든 요소까지 자본이 흡수해 가버리는 현 사회에서 그녀만의 불만과 미움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저항이 있을 수 있으니, 그녀의 추상이 그녀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 즉 자신의 작업과정에서 분출된 에너지를 위해 동원된 근육이나 신경의 움직임에 무관심하듯 표출되는 추상적 행위나 신체적 움직임을 최대한 배제하며 지적 사유의 방식에서 대상을 관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그림의 내용의 목적을 의도하지 않은 채 몸을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그의 표현 속에는 어떤 강제적인 명령도, 규칙도 허용되지 않는 그 자체로의 표현, 그녀만의 차분하고 정제된 감성이 존재한다. 삶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그림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사건들과 얽혀 있다. 그녀는 대상과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 속에서 자신의 삶과 의미의 지평을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녀는 소소함의 가치를 발견하고,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일상을 예술가의 감각으로 직조한다. 즐겁게 시작되었지만, 즐겁지 않았던 사색과 고찰, 그리는 행위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과감히, 그리고 대담하게 도약을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녀는 사물(예술의 원자재) 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속성을 느끼고 기록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한 사실을 새롭게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의 행위에서 우리는 바람 및 구름의 결, 얽히고설킨 전봇대에서 하루 일과를 아웅다웅 보낸 사람들의 흔적, 정적하고, 좁은 고샅에서 시끌벅적 부딪히며 하루를 보낸 사람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삶을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그녀만의 ‘푸른색’의 깊이를 공감해본다. 부조리의 현실과 세상 이면에 감춰진 현실의 혼돈은 숨 쉴 틈 없이 차가운 겨울을 에워싼다. 그러나 살 에일 듯한 추위와 짙은 밤에도 우리는 등불을 켜지 않는가...... 전시장 가득 채워진 그녀의 푸른빛의 향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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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임남진, <Still Life_상사_BLEU>, Detail, 100x100cm, 한지 채색,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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