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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밥상

먼저 문화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것으로 여겼던, 치기 가득한 20대의 독백을 이제 내려놓았음을 고백한다. ‘문화’와 ‘산업’의 동침이 몹시도 불편했으며 예술이 교환가치로 계산되는 순간이 괴로웠던 편협함이 오히려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나의 변명이었음을 시인한다.

문화는 밥이 될 수 있는가.

최근 한 달간 그야말로 ‘택시 운전사’들의 계절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한 도시의 정치적 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천만 관객을 불러들인 기막힌 순간이었다. 평소 과속에 얌체운전으로 얼룩진 택시 기사들의 이미지마저 달라 보이면서 광주사람으로서 왠지 훈훈하고 정의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영화는 성공했다. 한 시대의 역사와 정신적 가치가 영화적 문법으로 잘 윤색되어 문화시장에 판매되었고, 결과는 대성공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광주 5.18 하면 ‘전라도 빨갱이’, ‘간첩’ 같은 단어들 대신 그린색의 브리사 택시를, 송강호의 깊고 넉넉한 웃음을, 유해진의 의리 넘치는 표정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문화가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원재료의 적절한 변형이 필요한데 영화 <택시 운전사>는 이미 검증된 소재에 매우 보편적인 감성코드를 섞어 대중심리를 저격했다. ‘보편성’을 획득한 이 상품은 어떤 정치적 견해와의 대립을 무력화시키는 힘마저 얻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는 아도르노가 대중문화를 일컬어 비유했던 소위 ‘아기음식’과도 같다. 가장 가슴 아픈 역사를 소재로 했지만 가장 소화가 잘 되는 보편적 언어로 표현하였으며,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사람들의 체내에 흡수가 잘 될 수 있도록 익숙하고 편안한 재료로만 구성되었다.

영화 속 김사복은 어린 딸을 혼자 어렵게 키우는 홀아비였기에 그의 ‘유턴’이 더욱 영웅적이었으며, 마지막 부분에 검문소를 통과하며 벌인 차량 총격전은 아기음식에 달달한 시럽이 되어준다. 이 영화는 이렇게 실화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의 울음을 쏟아내면서도 극도로 참혹한 장면은 피하고, 또한 극장을 뛰쳐나가지 않을 만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잘 조율됐다.

대학생 구재식(류준열)은 평소 시위에 가담하던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대학가요제를 위해 대학에 들어왔다던 노래 좋아하고 철없던 녀석이다. 계엄군의 구타와 학살을 목격하고 극도의 공포를 경험한 구재식 일행이 황태술(유해진) 택시기사의 집에 모여 서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도 재식이의 형편없는 노래와 춤 덕이었다. 그래서 구재식의 죽음은 더욱 충격적이다.

학살의 장면은 관객이 극복할 수 있는 정도의 불편함만을 주어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에도 리얼리티에 목숨 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주 적십자병원 씬은 비참한 시신만 비춰주기보다는, 비통함에 카메라를 내리는 독일인 기자에게 다시 카메라를 들고 끝까지 기록해달라고 울부짖던 대학생과의 감정교류에 힘을 실었다.

기꺼이 생각해본다. 아도르노는 ‘아기음식’이라는 비유를 대중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영화 <택시 운전사>의 ‘아기음식’적인 표현방식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문화 소비자인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으며, 대중을 안일하기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불편함을 견디게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문화로 어떤 밥상을 차릴까

자, 그러면 ‘문화는 밥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대신 ‘문화로 어떤 밥상을 차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어떤 밥상을 차릴 수 있을까...

영화 <택시 운전사>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실존인물 김사복 찾기로 붐을 일으킬 때, 광주는 “광주로 갑시다! 5.18 택시운전사” 프로젝트로 그야말로 핫한 계절을 보냈다. 영화를 보고 감회에 젖어 광주를 찾은 관광객들을 택시에 태우고, 광주의 ‘택시 운전사’가 직접 가이드를 해주는 프로젝트를 벌인 것. 5.18 민중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전남대학교 정문, 당시 상무대 법정이 있던 5.18시민공원, 시민들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구도청 분수대 앞과 총탄의 흔적을 간직한 전일빌딩, 억울한 죽음을 삼킨 적십자 병원과 망월동 5.18묘역까지. 당시 택시 운전사 당사자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겪은 현장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광객은 심리적으로 영화 속 인물이 되어볼 수 있었다.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의 갑작스러운 작심이 만들어낸 이 짧은 프로젝트에서 행정적 어려움은 관광객들에게는 관심 밖이니 논외로 하자. 준비된 차량은 4대, 예정된 기간은 당초 2주 정도(나중에 한 달 연장), 광주시티투어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하루 2회 운행하였다. 다른 문화프로젝트나 무수한 행사들에 비하면 그 작은 택시에 탈 수 있는 수혜자는 극소수였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아들였을 진실의 무게는 훨씬 깊고 강할 것이리라.

그 동안 우리는 왜 그렇게도 ‘다수의, 다수를 위한, 다수에 의한’ 행사에 집착했던가. 좀 더 많은 시민들에게 문화의 밥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너무나 숫자와 규모에 집착하는 나머지 관객들이 마음속에 무엇을 담아가는지조차 모른 채 그들을 저렴한 문화소비자로 전락시켜왔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그들을 ‘행위하는 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도매급 취급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레 상기해본다. 그리고 “광주로 갑시다! 5.18 택시운전사” 프로그램이 영화 흥행이라는 우연한 기회에 맞이한 것이지만, 어쨌든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도시의 일상공간을 체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미시적 관광’이 단편적이나마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계기였다.

관광객은 5.18 기념행사를 보는 대신 전일빌딩의 총탄자국을 눈 여겨 볼 것이고, 차량을 통제한 금남로 행사장 먹거리와 볼거리 사이에서 배회하는 대신 5.18 당시 불에 탄 옛 MBC 건물을 찾아간다. 옛 MBC 건물이라니, 전일빌딩이라니... 모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광객이 도저히 찾아올 이유가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장훈 감독과 제작사 ㈜더램프와 배급사 ㈜쇼박스는 광주의 문화에 가공된 스토리를 제공했고, 도저히 올 가망성이 없었던 타지의 관광객을 광주로 안내했다.

과연 문화는 밥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젠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필자처럼 편협한 사고를 가진 자가 아니고서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끼 때우는 싸구려 백반 말고 김치 한 포기라도 맛깔스러운 그런 밥상을 차려야 한다. 내친김에 수지에 맞지 않더라도 숫자에 좀 집착하지 않고 반찬 하나의 공정에 관심을 기울이면 어느덧 밥상 앞에 손님이 앉아있을 것이라는 편협한 설득도 해본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미시적 관광 특유의 ‘느림’과 ‘소박함’ 앞에서 자꾸 조바심을 느끼게 하는 것의 정체는 뭘까.

문화산업의 ‘합법화’, 문화적 ‘자존심’

90년대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2000년대부터 우리도 역시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무형의 상품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연에서, 공장에서, 혹은 노동으로 교환의 대상을 찾는데 한계를 느낀 도시들은 이제 아이디어를 팔고, 디자인을 팔고, 기발함을 판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재화는 물론이요 1차 산업의 생산물까지 아이디어로 마케팅을 하고 디자인을 입히며 기발함에 승부를 거는 것이다. 공룡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도 상품이 되고, 하다못해 ‘지평선’도 ‘허수아비’도 ‘물’도 브랜드가 된다. 지역경제, 지역경제, 그 놈의 지역경제를 살려야 해서 동네의 버려진 고택도 다시 포장해보고, 오래된 나무를 찾아보고, 특산물을 발굴해서 축제며 박람회며 엑스포까지 열어본다.

이 모든 것이 시대가 낳은 ‘창의적 재화’라고 칭하고 그 어떤 것을 개발해도 좋다. 하지만 가끔은 ‘광주는 어떤 밥상을 차릴 수 있겠는가’를 고민해보자. 광주를 찾아온 관광객들과 혹은 광주에 사는 내 이웃들을 단순히 행사장을 채우는 액세서리나 시간 소비자로 취급하지 말고 진정 그들을 위한 광주만의 미시적 관광을 염두에 둔다면, ‘택시운전사’는 그들을 위한 숭고한 밥상이 될 만하다.

필자도 편협함을 시인했듯, 20세기 후반부터 문화산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의 종식된 듯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도 문화산업을 국가적 전략으로 확대시켰으며 아시아 국가들도 문화 ‘서비스’를 교역의 대상으로 적극 판촉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문화콘텐츠진흥원을 설립하면서 ‘문화콘텐츠산업’이라는 명칭이 통용되었고 문화는 블루오션이라는 기대감이 증폭되었다. 문화와 산업의 동침의 이제 불명예스러운 비판을 잠재우고 그 어떤 산업보다 대안으로 각광받으며 리즈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대중문화가 대중을 기만하며 잘못된 보편성을 실현한다는 아도르노 식의 비평은 이제 고전이 되어버린 듯하다.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승리다. 자동차 산업의 생산벨트가 창조산업에 그대로 이식되는 이 순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문화와 산업의 동침이 합법화 되었다고 해도 ‘문화’가 대세를 따르고 새로움을 배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문화에게는 수시로 자존심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소화되기 쉬운 아기밥상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의 차원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와 ‘광주로 갑시다’ 프로젝트는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형식’으로 취했지만, 그 내면은 결코 접근하기 편한 진실은 아니었다. 역사적 진실이든 인간의 내면이든 사회적 성찰이든 간에 이제 불편한 진실에 대해 정면으로 맞닥뜨려 생산벨트의 속도를 늦추는 ‘훼방꾼’이 관광산업에도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창조적 재화를 생산해내기에만 급급하면 문화산업도 다른 산업들처럼 고갈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우리동네 이야기며 나무며 하다못해 돌멩이까지 다 포장해서 팔고나면 우리동네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겠는가. 속된 말로 영혼 없는 콘텐츠의 대량생산일 뿐. 생산라인에 집어넣기 전에 우리는 더 오래 갈등해야 한다. 끊임없는 현실의 부정을 통해 삶의 비극성을 목도하는 예술의 ‘숭고의 속성’을 끝까지 고집할 때 문화적 재화는 다른 자원과는 달리 고갈 없는 영원한 재창조를 약속해줄 것이다.

때로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며 한 숨 돌려보자.

이제 광주는 광주를 찾는 사람들에게 어떤 숭고한 밥상을 차려줄 것인가.

5.18 자유공원

영화 <택시운전사>

영화<택시운전사> 장면

“광주로 갑시다! 5.18 택시 운전사” 프로그램 홍보물 1

“광주로 갑시다! 5.18 택시 운전사” 프로그램 홍보물 2

_광주로갑시다 5.18 택시운전사_로 활동 중인 한진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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